진흙속의연꽃

도발에 휘말려 들지 않으리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23. 07:21

도발에 휘말려 들지 않으리



말려들지 않으려 한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그가 어떤 글을 남겨도 말려들지 않으려 한다. 그의 행위를 보고서 나를 본다. 그는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그가 글을 남겼다. 부정적 글이다. 댓글을 보면 두 가지 중에 하나라고 보면 틀림 없다. 부정적 글 아니면 긍정적 글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남긴 글을 보면 사실과 거리가 멀다. 또한 극히 단편적이다.

그 사람은 그분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분을 폄훼했기 때문이다.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 그분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문만 듣고 쓴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 두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이전에도 부정적 글을 남겨서 속을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으로 간주 하면 그뿐이다. 고쳐지지 않을 사람이다. 교리에 대한 것도 그렇다.

논쟁하면 피곤해진다. 감정만 상하게 된다.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이럴 때는 침묵하는 것이 났다. 부처님도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는 침묵하지 않았던가?

질문같지 않은 질문,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답을 해서는 안된다. 답을 하면 말려 든다. 교리에 대한 것도 그렇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박해서는 안된다. 말려 들게 된다. 상처투성이가 될 수 있다. 그를 설득해서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진리만 말하면 된다. 진리를 말하는 자는 싸우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인정욕구가 있다.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말한다. 글을 쓰는 것도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인정투쟁해야 한다.

인정투쟁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 사람에게 나를 인정해달라고 애원하면 인정해 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말려들게 된다. 이럴 때는 그 사람을 무시하면 된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나도 그 사람을 무시하면 그뿐이다. 이것이 나의 인정투쟁이다.

타인의 행위에서 나를 본다. 타인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그 사람은 마치 똥 싸고 달아나듯 댓글을 남겼다. 나도 이전에 이런 행위를 했었다.  

사람이 분노할 때가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공격했을 때 그렇다. 견해가 다를 때도 그렇다. 이럴 때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너무 심하다. 상처투성이가 되기 쉽다. 말려든 것이다.

나는 왜 말려들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집착이다. 집착이 있었기 때문에 말려 든 것이다. 그 사람 주장을 반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람의 견해를 바꾸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집착이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진리만을 말해야 한다. 진리를 말하는 자는 싸우지 않는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 들이지 않는 자가 싸움을 걸어 온다. 도발적 자극에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 무대응이 정답이다. 본래 그런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 사람의 업으로 생각해야 한다.

후유증이 너무 크다. 단지 진리만을 말했을 뿐인데, 단지 진리에 입각해서 견해를 표출했을 뿐인데 그 사람은 과도하게 받아 들인 것 같다. 아마 자신의 명예 때문일 것이다.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은 명예가 침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끈하는 것 같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든가, “내가 누군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많이 배운 자일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그런 것 같다. 그 사람의 우월적 자만을 건드린 것 같다.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건넜던 것입니다.”(S1.1)



상윳따니까야 1번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윤회의 바다를 건너려 하는 자는 머물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라고 했다. 윤회의 폭류, 윤회의 소용돌이에서 머물면 가라앉고 애쓰면 휩쓸려 버린다고 했다.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면 머물러 버리는 것이 된다. 저 언덕에 건너가려고 애쓰면 휩쓸리게 된다. 말려들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과도한 집착 때문이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는 욕망과 집착이 있다. 그러나 출세간에서는 욕망한다고 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집착한다면 더욱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정에 들어가는 조건이 있다. 가장 먼저 감각적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악하고 불건전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당연히 수행을 잘 하고자 하는 욕망도 내려 놓아야 한다. 내려 놓고 또 내려 놓아야 선정에 든다고 말한다. 하물며 집착은 어떠할까?

과도한 집착은 인생을 파탄으로 이끈다.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과도한 집착 때문이다. 자신과 견해가 다르더라도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집착한다면 휘말려 들 뿐이다.

그 사람의 댓글을 접하자 분노가 치솟았다. 그 분에 대해 폄훼하는 것이 못 마땅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사실은 이렇습니다. 잘못 알고 계십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교리에 대한 것도 그렇다. 반박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댓글을 달고 반박할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명백한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것과 경전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과 이야기하면 말려 들어 간다.

그 사람의 행위에서 나를 비추어 본다. 그때 상대방의 못마땅한 것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람으로 간주하면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견해를 표출했을 때 말려 들었다. 그 결과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대인다운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인내 했어야 했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S11.4)



인내는 힘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다만 진리의 말만 해야 한다. 대꾸하면 말려 든다. 인정받으려 하면 휘말려 든다. 과도한 집착은 파탄으로 이끈다.

인내하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 인내하면 둘 다 윈윈(Win-Win)할 수 있다. 인내하는 자에게 적이 없다.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오더라도 자비의 마음으로 인내해야 한다.

부처님은 사섭법에서 애어(愛語)하라고 했다. 항상 사랑스럽게 말하라는 것이다. 자비무적이다. 어떤 도발에도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한다.



2023-05-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