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이여, 광주를 기억하자!
오늘은 부처님오신날 전날이다. 크리스마스식으로 하면 불탄절 이브날인 것이다. 오늘은 또한 5.27전날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27일 이브날도 된다.
5월 27일은 어떤 날인가? 광주가 함락된 날이다. 도청이 점령된 날이기도 한다. 결사항전 하던 시민군들이 패한 날이기도 하다. 이날 시민군은 15명 죽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광주에 갔다. 김동수열사 추모제를 맞이 하여 아내와 함께 갔다. 아내는 아직까지 한번도 광주에 가 본적이 없다. 물론 5.18묘역도 가보지 않았다.
대불련에서 추모제 참석할 사람을 파악했다. 예년과 같이 전세버스로 내려 갈 줄 알았다. 그러나 KTX로 간다고 했다. 난감했다. 비용이 문제가 되었다. 후원금으로 십만원 냈다.
5월 20일 광주 조선대 서석홀에서 김동수열사 추모제가 있었다. 추모제가 끝나고 5.18사적지탐방을 했다. 동구청에서 주관한 것이다. 탐방버스 코스는 전일빌딩-계림동최초발포지-5.18묘역-전남대정문-도청 순이다. 이 중에서 5.18묘역까지만 참여했다. 4시50분에 수원터미널가는 고속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이다.
첫번째 사적지 전일빌딩 옥상에 섰다. 광주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특히 저 멀리 있는 무등산이 아주 가까이 보였다. 날씨가 무척 청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도청이 있었다. 뼈대와 골조만 남은 모습이다. 빛나는 오월의 햇살에 광주는 평온해 보였다. 과연 그날도 평온 했을까?
1980년에도 5월 26일이 있었다. 이날 광주사람들은 일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 숨죽이며 지낸 하루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청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김동수열사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조선대 전자공학과 78학번으로 같은 과 친구였던 사람이다. 2007년에 업무로 인해 만난 사람이다. 이후 친구처럼 지냈다. 그리고 광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김동수열사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런 자신은 구호대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5월 26일날 고민했다. 구호활동하던 친구들 세 명이 모였다. 도청에 들어갈 건지 말 건지 결정해야 했다. 침묵이 길어졌다. 한시간 침묵 끝에 한 사람이 “내가 죽으면 우리엄마가 너무 슬퍼할 것 같다.”라고 했다. 이 말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세 명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김동수열사는 도청에 들어갔다.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았을 것이다. 엄마 생각도 났을 것이다. 친구 생각도 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으러 들어간 것이다. 보살정신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5.18묘역에서 박병규의 묘를 보았다. 박병규는 동국대 1학년으로 광주에 내려 왔다가 시민군이 되었다. 정찬주 작가의 소설 ‘광주 아리랑’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5월 26일 도청에 들어갔고 15명의 사망자 중의 한사람이다.
박병규의 묘비 뒷면에 글이 있었다. 묘비에는 “죽음을 앞두고 전화로 안심시키던 네가 주검으로 돌아 온 아침, 에미 가슴도 이나라 정의도 무너지더니 17년 세월 끝에 이제 너를 내가슴에서 보낼 수 있게 됐구나. 에미가”라고 쓰여 있었다.
박병규는 어머니와 통화 했다. 그리고 안심시켰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소설 광주 아리랑에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박병규와 어머니의 대화)
박병규는 동생을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농담을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오메, 병규냐? 밥은 묵었냐? 니 만나러 갔다가 주민증을 집에 놓고 가서 못 들어갔어야. 겁나게 까다롭드라.”
“내 이름을 대지 그랬소?”
“이놈아, 그럴 거 읎이 니가 집에 들어오믄 되야불제.” 이번에는 박병규가 할 말을 잃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집에 들어가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박병규 입장에서는 집에 들어갈 시간이 오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도 모레도 있었다.
“엄니가 걱정하시는 거 알지만 여그 친구덜이 고생하는 걸 보믄 외 면할 수 없어요.”
“그래, 낼 아침에는 집에 와서 밥묵자.”
“엄마, 낼 아침에 일찍 갈께라.”
박병규는 전화가 끊어지고 난 뒤에도 한참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그대로 들고 있었다. 여동생에게 혼잣말로 작별했다.
“잘 있거라. 사랑하는 경순아. 니를 더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내일의 운명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운명이 허락한다면 집에 들어 가 동생과 어머니와 작은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싶었다. 끝내 박병 규는 어머니와도 작별했다.
(소설 ‘광주 아리랑’ 2권, 299쪽)
아마 작가는 묘비를 보고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모른다. 박병규가 어머니를 안심시켰다는 묘비의 글을 보고 이런 문장을 만들어 냈는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박병규가 죽을 줄 알고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5월 26일 저녁에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자원한 사람들이다. 목숨이 아까운 사람은 나가도 좋다고 했다. 살아서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지식인이라면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지식인들은 5.18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시로서, 소설로서, 영화로서 기록을 남겼다. 수많은 기록물이 쏟아졌다. 그 날을 잊지 말자고 했다. 살아남은 지식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부채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이 앞장섰다.
5월 26일 도청에 남은 사람들 중에는 지식인들은 몇 명 없었다. 그 많던 운동권인사들, 그 많던 혁명가들은 숨어 버렸다. 2선에서 활약하던 운동권과 대학생, 재수생, 고등학생, 일반시민들이 남았다.
5월 27일 도청이 함락되던 날 사람들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모두 빚진 자들이 되었다. 그날 죽은 사람은 윤상원(31세, 서점종업원), 민병대(20세,종업원), 김동수(21세, 조선대 3년), 박병규(20세, 둥국대), 유동운(19세, 한신대 2년), 서호빈(19세, 전남대), 김종연(19세, 재수생), 박성용(18세, 조대부고 3년), 안종필(16세, 광주상고 1년), 문재학(16세, 광주상고 1년), 이강수(19세, 재수생), 홍순권(19세, 페인트공), 이정연(20세, 전남대), 문용동(26세, 호남신학대), 박진홍(21세, 표구사 점원) 이렇게 15명이다.
지식인들은 미안했던 것 같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늘 부채의식으로 살아 갔을 것이다.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결사항전 희생자들을 보면 대부분 30세이하이고 스무살 안팍의 사람들이 많다.
김준태 시인이 시를 썼다. 그 시는 ‘아아 光州여!’라는 제목의 시이다. 5.18묘역에 가면 왼쪽 벽면에 시가 새겨겨 있다. 시의 초반부를 보면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찢겨진 산하를 구비쳐 넘어가는/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라고 했다.
시인의 시를 보면 십자가가 나온다. 이에 대하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날 5월 27일 도청에서 희생된 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왜 그런가? 자발적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김준태 시인의 시는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시는 아닐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살행이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을 말한다. 자타카를 보면 자신의 몸을 보시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보살행의 시초일 것이다.
불교에서 보살행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처가 되기로 서원한 자는 언젠가 성불할 것이기 때문에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무려 사아승지하고도 십만겁동안 보살행을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도 없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했음을 말한다. 지금 죽어도 어떤 존재로든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행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승의적 보살행에 대한 것이다. 세 가지 보살행, 즉 일반적 초월의 길(dasapāramī), 우월적 초월의 길(dasaupapāramī),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이 있다. 승의적 초월의 길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도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숨도 보시할 수 있는 것이다. 승의적 초월의 길을 가면 목숨도 보시할 수 있다.
1908년 5월 26일 도청에서 결사항전이 있었다. 목숨이 아까운 사람은 가고 목숨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만 남았다. 비록 패배가 뻔히 보일지라도 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도청을 순순히 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되찾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도청을 결사항전으로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되찾아 올 수 있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가치에 대한 것이다.
시민군들이 결사항전한 것은 광주정신, 즉 5.18정신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도청의 결사항전이 있어서 이후 6.10도 있었고, 더 나아가 2016년 광화문촛불도 있었다.
전일빌딩 옥상에서 무등산을 바라 보았다. 지극히 평범한 산이다. 북한산처럼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아니다. 설악산처럼 장쾌한 산도 아니다. 그럼에도 산이 크게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무등산은 해발 천미터가 넘는다. 광주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저 멀리 함평에서도 보인다. 5.18묘역에서도 무등산이 보였다. 그런 무등산은 무색무취의 산인 것 같다. 마치 고래등 같은 산이다. 덩치가 매우 커서 모든 것을 품어 안을 것 같은 산이다.
5월 26일 그날 사람들은 무등산을 바라 보았을 것이다. 저 무등산이 증언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무등산을 언급했다. 묘역에서는 무등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살아 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민주(民主)와 대동(大同)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해야 하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로서, 소설로서, 평론으로서, 영화로서, 연극으로서 남겨야 한다. 이렇게 블로그로 남기는 것도 지식인의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전일빌딩 사적지 탐방할 때 영상물에서 본 것이 있다. 그것은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날 여자 아나운서는 “광주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애타게 외쳤다.
오늘날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광주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광주를 기억해야 한다. 5.18주간이 되면 광주에 가야 한다. 사적지를 돌아 보고 5.18묘역도 참배해야 한다.
광주 동구청에서 주관하는 5.18사적지 탐방팀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가족단위로 온 것이다. 아이들은 해설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분향했다. 주먹밥도 먹었다. 정문을 나설 때는 단체사진도 찍었다.
오늘은 5월 26일이다. 최후의 결사항전이 있었던 날이다. 지식인들이여, 광주를 기억하자!
2023-05-26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 주어야 (0) | 2023.05.29 |
---|---|
스님에게 등 하나 달고 (0) | 2023.05.27 |
나는 아직도 현역 (0) | 2023.05.26 |
도발에 휘말려 들지 않으리 (0) | 2023.05.23 |
물오리 가족에게서 생명의 경외를 (0) | 2023.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