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흑인 피아니스트 같은 블로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5. 09:37

흑인 피아니스트 같은 블로거
 
 
토론하다가 다쳤다. 토론모임에서 발언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평소 나에게 언짢게 생각하던 사람이 저격을 한 것이다.

그 사람은 높은 학위도 있고 지위도 있는 사람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그 사람은 자신이 발언을 할 때 끼여 들었다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런 감정을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표출했다.

 
그 사람의 저격에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불쾌했다. 불쾌와 불편함을 너머 분노가 일어났다. 그렇다고 반격한다면 난장판이 될 것이다. 참아야 했다. 속으로 삭여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번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발언할 때마다 트집을 잡았다. 언젠가는 “남의 얘기를 하지 말고 자신의 얘기를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경전을 근거로 해서 말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경전적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한마디로 잘난 체 하는 것 같아서 몹시 불쾌하고 불편했던 것 같다.
 
상대방에게 저격 당했을 때 즉각 반격하면 하수이다. 이럴 경우 시간을 두어야 한다. 냉각기를 갖는 것이다. 하루나 이틀이면 불쾌와 불편함이 가라 앉는다. 그러나 공개적인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다르다. 꽤 오래 간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본심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저격했는지 알고 싶었다. 또한 사과를 받아 내고 싶었다. 이에 카톡을 보냈다.
 
말로 하는 것과 문자로 하는 것은 다르다. 말로 하기 곤란한 것은 문자로 하면 효과적일 때가 있다. 문자로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정반대로 “제가 말한 것이 불쾌하고 불편하게 생각되었다면 사과 드립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는 효과가 있었다. 불쾌하고 불편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고 한 것이다. 이에 그 사람은 약간의 상황설명과 함께 “저도 반성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서로 윈윈(Win-Win)한 것이다.
 
생활속에서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다. 매일 경전을 접하고 매일 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는 입장에서 상대방의 도발에 발끈하여 감정을 표출한다면 공부가 덜 된 사람일 것이다.
 
한번 뱉은 말은 주어 담을 수 없다. 한번 보낸 글도 회수가 안된다. 마음에 있는 것을 표출했을 때 업이 된다. 억울해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상대방이 화낸 다고 하여 함께 화내면 어리석은 자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11.5)라고 했다.
 
싸움을 해서 상대방을 이기기는 어렵지 않다. 힘이 월등하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지식의 힘이 강해도 제압할 수 있다. 상대방이 열등적 자만으로 도발해 왔을 때 쓸려 간다면 동급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때는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5)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떠 올려야 한다.
 
상대방을 이기기 보다 자신을 이기기 더 어렵다. 상대방을 힘으로 또는 지식으로 제압할 수 있지만 하수나 하는 짓이다. 상수라면 인내해야 한다. 인내는 힘 없는 자, 약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내는 힘 있는 자, 강자가 해야 한다. 강자가 인내하면 사람이 크게 보일 것이다.
 
사람이 크게 보이려면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적이 있을 수 없다. 자비무적이다.
 
살다 보면 불쾌하고 불편한 일이 자주 있다. 특히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때이다. 공개적으로 저격 당했을 때 몹시 불쾌하고 불편하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다 보니 종종 근본주의자라는 글을 접한다. 니까야에 근거해서 글을 쓸 때 불교근본주의자라고 저격하는 자들이 종종 있다. 불교근본주의는 나쁜 것일까?
 
불교근본주의자라고 공격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에는 “저는 불교근본주의자입니다.”라며 맞받아 쳤다. 그러면서 불교근본주의가 왜 평화와 행복을 가져 오는 지에 대해서 경전을 근거로 해서 설명했다. 그러나 나에 대하여 불쾌하고 불편해 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통용될 리 없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연계하여 더욱 더 몰아 부치는 것이었다.
 
글은 어떤 사람이 쓰는 것일까? 옛날에는 문자를 아는 사람들이 썼다. 그래서 한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누구나 글을 쓴다. 인터넷 시대에 더구나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에스엔에스(SNS)에서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글이라고 하여 특별한 계층이 쓰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이전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글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속된말로 개나 소나 글을 쓰다 보니 지식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같잖게 보였을 것 같다. 불교계도 다른 것 같지 않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종종 카톡방에 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우월적 자만을 가진 지식인들, 특히 학위가 높은 자들이나 학자들은 불편하고 불쾌하게 보는 것 같다. 글에 꼬투리를 잡아 공격하는 것이다. 불교근본주의라고 저격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토론방에서나 카톡방에서 종종 저격 당할 때가 있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다. 또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보기에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가 몹시 불쾌하고 불편했던 것 같다. 내용이 좋으면 칭찬해야 하지만 절대로 칭찬하는 법은 없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내용을 발견하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것이다.
 
저격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에는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다. 설명을 해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어떤 설명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럴 때는 내가 먼저 “저의 글로 인하여 불쾌하고 불편하게 생각했다면 사과드립니다.”라고 선수 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침묵한다.
 
글쓰기 17년차이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햇수로 17년 된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다. 칭찬도 받았지만 비난도 받았다.
 
글을 쓰면서 노골적인 비난도 받았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도 보았다. 이는 명예훼손감이다. 글을 캡쳐 해서 고소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비난에 방어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나를 대신해서 싸워 준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 이른바 ‘블친’이다. 블로그 친구를 말한다.
 
재가활동을 하고 나서는 지식인들과 싸웠다. 그들은 이미 기득권 세력화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강의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 앞에 글 쓰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갑자기 “툭”하고 튀어나온 사람일 것이다. 더구나 출신은 형편없다. 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글을 써서 올렸다.
 
배경도 없고 지위도 없고 학위도 낮은 자가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견재를 받을 때가 있다. 학위도 높고,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는 사람들이 견재를 한다.
 
그들은 처음 나를 보았을 때 말한 것이 있다. 처음에는 무척 궁금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체를 알고 나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본 것 같다. 아마 안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 한 글을 쓰면 가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공격이 들어 온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영화 그린북(Green Book, 2018)이 있다. 흑인 피아니스트는 백인에게 조롱당한다. 흑인이 피아노를 친다는 것이다. 또한 백인은 복장을 문제 삼는다. 동네 영아치 같은 백인들은 “뭔데 양복을 입었어?”라며 괴롭히는 것이다. 흑인이 같잖게 양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흑인에게도 조롱당한다는 것이다. 흑인이 백인이 사는 곳에서 백인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흑인 피아니스트는 백인에게는 우월적 자만의 대상이 된다. 또한 흑인 피아니스트는 흑인에게는 열등적 자만의 대상이 된다. 흑인 피아니스트는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블로거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경전에 근거하여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이런 글에 대하여 어떤 이는 가치를 인정해 준다. 그리고 격려를 해 준다. 그러나 우월적 자만에 가득한 자들은 깍아 내리려 한다. 심지어 대중이 있는 데서 저격을 하여 모욕을 주려고 한다.
 
불교에 입문한지 오래 되지 않았다. 2004년에 입문했으니 절에 30년, 40년, 50년 다닌 사람들과 비교 되지 않는다. 불교단체에서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2015년부터 인연 맺었으니 고작 8년밖에 되지 않는다. 대학생시절부터 인연 맺어 40년, 50년 된 사람들과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불교계에 기반이 없다.
 
불교계에 기반이 없는 자는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다. 제도권 내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인정은커녕 심한 견재를 받는다. 모욕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같잖게 글을 쓴다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불교 지식인들이나 불교활동가들은 오랜 세월 서로 인연을 맺어 왔을 것이다. 이런 때 갑자기 툭 튀어 나온 자가 글을 썼을 때 불편해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여간해서 공감하지 않는다. 심지어 페이스북에서는 차단하기까지 한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때 분노하면 나만 손해이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지 않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재가불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집과 일터를 왕래하면서 글만 썼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재가불교활동을 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소위 불교지식인들과 불교활동가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때로 공격하고 때로 저격한다.
 
재가불교활동을 하다 보면 영화 그린북에서 흑인피아니스트가 된 것 같다. 흑인이 양복을 입고 피아노 치는 것을 양쪽에서 싫어한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흑인 주제에 피아노를 친다고 무시하고, 흑인들은 흑인이 백인 사회에서 사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재가활동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마치 흑인 피아니스트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저격을 당해도 내가 먼저 사과하면 그뿐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기는 것 보다 나 자신을 이겨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인내는 강자가 하는 것이다. 대인의 면모를 주어야 한다. 아무리 저격해도 저격을 받아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정받으려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인정투쟁’하고자 한다.
 
나의 인정투쟁은 무엇인가? 그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무시하면 된다. 그렇다고 말이나 글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나를 대하는 똑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정투쟁이다.
 
 
2023-06-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