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삶을 살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13. 08:43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삶을 살고자
 
 
오늘도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6시대에 집을 나섰으니 빠른 것이다.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일터로 향한다. 집보다 더 편하고 안락한 곳이다. 일종의 ‘비트’라고 볼 수 있다. 나의 비밀 아지트를 말한다.
 
해는 갈수록 길어진다. 점점 정점을 향해서 가고 있다. 앞으로 십일만 지나면 고점을 찍을 것이다. 이후에는 양의 기운이 점점 빠진다. 그러나 추세가 있기 때문에 날씨는 점점 더워질 것이다.
 
비산사거리 안양천을 건너다가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노부부가 둘이 마주 보고 맨손체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장면을 놓칠 수 없다. 염치불구 하고 찰칵 했다. 작년에는 나이가 80대가 되는 노부부가 손잡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여서 뒤쫓아 가서 찰칵 했다.
 

 
노부부는 왜 맨손체조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몸에 근력을 강화하는 운동을 하면 더 좋을 것이다. 걷기 운동도 좋다. 하루에 만보 걷는다면 잔병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노부부의 맨손체조를 보자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군대에 있을 때 수송부에 붙어 있는 구호를 말한다. 그것은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말이다. 이런 구호는 대한민국 어느 수송부대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군용차만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차도 똑같다. 차에 연료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엔진오일도 교환해 준다. 정기적으로 점검받기도 한다. 사람도 마친가지로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할 것이다.
 
요즘 유튜브에 빠져 있다. 틈만 나면 유튜브를 본다. 대부분 쓰레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건지는 것이 있다. 빈집에 대한 프로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빈집만 찾아 다니는 유튜버가 있다. 산중에 독립가옥이 대상이다. 유튜버는 말끝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라며 안타깝게 말한다. 그러나 대안은 없다. 다만 흐트러져 있는 안타까운 화면만 내보낸다.
 
빈집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어지럽혀져 있다는 것이다. 어느 빈집도 정리정돈되어 있는 집은 없다. 거의 백프로 엉망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만일 조금이라도 집이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 집이라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임에 틀림없다.
 
빈집은 내버려 두면 무너져 내린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무너진 채로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은 반듯해 보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가재도구와 세간 물건이 어지렵혀져 있어서 엉망이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가꾸지 않으면 엉망이다. 종종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차림이 남루한 사람을 본다. 얼굴 표정도 밝지 않고 어둡다. 자신을 전혀 가꾸지 않은 사람이다. 마치 빈집을 보는 것 같다. 흉가나 폐가를 보는 것 같다.
 
여기 엔트로피(Entropy) 법칙이 있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한다. 이 법칙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되는 것을 말한다. 물에 잉크방울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잉크는 물에 확산되어 골고루 퍼질 것이다. 결국 잉크는 사라져 버린다.
 
이 세상에 엔트로피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어느 것도 없다. 그 어떤 것이든지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차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금 보는 산천초목산하대지도 한량없는 세월이 흐르면 가루가 되어 버려 평평해질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엔트로피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엔트로피법칙은 무상의 법칙과 유사하다. 항상 이대로 있지 않는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은 영원히 이 자리에 있지 않음을 말한다. 조금씩 변하다가 결국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이를 교육시키기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이를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 아이를 방임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아마 불량학생이 되기 쉽다. 이것도 엔트로피 법칙에 지배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업은 어떠할까?
 
기업도 내버려 두면 망한다. 사장이 기업을 관리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회사를 관리하지 않으면 부도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이것도 엔트로피 법칙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내버려 두면 엉망된다. 이것이 엔트로피법칙이다. 엔트로피법칙은 열평형상태로 가려는 속성이이 있기 때문에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차없이 이동한다. 그래서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무너져 내리는 것도 엔트로피법칙에 의한 것이고, 자녀를 교육시키지 않으면 불량학생이 되는 것도 엔트로피법칙에 의한 것이고, 회사를 관리하지 않으면 부도의 길로 가는 것도 엔트로피법칙에 의한 것이다. 하물며 일반 사람은 어떠할까?
 
안양천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자건거를 타고, 어떤 이들은 달리기를 하고, 어떤 이들은 빨리 걷기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천천히 걷기도 한다.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서이다. 어쩌면 엔트로피법칙에 맞서는 것인지 모른다.
 
엔트로피법칙은 열평형상태를 지향한다. 그래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차없이 진행한다. 이는 비가역적(非可逆的)이다. 물에 흘린 잉크방울을 되돌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생명 있는 것들은 엔트로피 법칙에 저항한다는 사실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자기조직화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질서에서 질서로 만드는 것과 같다. 이는 엔트로피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책 ‘엔트로피’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에 반대 되는 현상에 대하여 ‘네겐트로피(Negentropy)’라고 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 산천에 있는 초목은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들에 피는 들꽃도 아름답다. 당연히 동물도 아름답고 사람도 아름답다. 생명 있는 것들 중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이는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네겐트로피적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무질서로 가는 것에 저항한다. 생명은 엔트로피에 저항하여 거꾸로 간다. 음식을 먹어서 피와 살을 만들고 기관을 형성하는 것은 엔트로피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다했을 때 버려질 것이다. 더 이상 엔트로피에 저항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은 죽음명상 게송이 잘 말해준다.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
 
아!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다.(Dhp.41)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11)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예경지송, 723-725쪽)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죽음명상 다섯 게송이다. 경전에 있는 죽음과 관련된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어쩌면 엔트로피와 네겐트로피 둘 다에 해당되는 게송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가기 마련이다. 음식이 공급되면 엔트로피에 저항하며 살아간다. 자기조직화 하며 네겐트로피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늙고 노쇠하고 병들면 결국 엔트로피에 항복하게 된다. 이를 잘 표현한 것이 네 번째 게송이다.
 
네 번째 게송은 엔트로피적 죽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아!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다.(Dhp.4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과 같이 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 안양천에서 맨손체조하는 노부부를 보았다. 둘이 마주 보며 맨손체조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안양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걷기 운동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말이 연상되는데 나만 그럴까?
 

 
건강한 육체에서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육체를 닦고 조이고 기름치다 보면 건강해질 것이다. 건강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아마 대부분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삶이다.
 
나이가 한살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고 건강할 때 무엇인가 이루어 놓아야 한다. 한평생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다가 가는 사람이라면 축생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축생의 특징이 있다. 사유가 없는 축생은 먹는 것에는 선수라는 것이다. 하루종일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먹거리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후손을 남기기 위해서 교미하고 즐기기 위해 교미한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은 빈집과도 같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집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무너져 내리기 쉽다. 폐가를 보면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는데 흐트러진 채 그대로 있다.
 
사람이 사는 집과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다. 도구가 밖에 나와 있을 때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무너져 내린다. 사람이 사는 집에 무너진 곳이 있다면 바로 잡을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은 무너져 내린 집과 같다. 제자리로 가져다 놓지 않는 것이다. 마치 부도난 회사와도 같고 교육받지 않은 아이와도 같다.
 
오래 전 군대에 있을 때 수송대 구호는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였다. 사람도 주기적으로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엔트로피에 저항할 수 있다. 질서 있는 삶이다. 그리고 관리하는 삶이다. 그래야 부도나지 않는 삶이 된다.
 
부도 나지 않는 삶을 살려면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조금이라고 건강할 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이루어 놓아야 한다. 무엇을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열반이다.
 
죽음의 명상 마지막 게송은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이는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1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차없이 진행되는 엔트로피에 대한 승리의 게송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트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가장 먼저 식물이 맞이 해 준다. 아침 햇살에 식물이 빛난다. 어제 저녁 물통에 담구어 놓은 난들을 제자리에 올려 놓았다.
 
도시락을 싸 왔다. 오늘 점심 때 먹을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계란후라이를 올렸다. 메일을 점검해 보았다. 새로운 주문은 보이지 않는다. 명세표 제출해달라는 메일이 보인다. 지체없이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관리를 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주어야 하듯이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삶이다. 오늘 하루일과도 절구커피와 함께 시작한다.
 
2023-06-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