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동자가 되어

이불재 사립문을 밀치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3. 12:47

이불재 사립문을 밀치니
 
 
나에게 지금 세 권의 책이 있다. 정찬주 작가의 아소까대왕이다. 올해 나온 장편 대하소설이다. 어떻게 인도의 왕에 대한 전기적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7월 1일 새벽에 집을 나섰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부리나케 세수를 하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때가 4시 22분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막힐 수 있다. 최대한 일찍 떠나기로 했다.
 
네비 목적지는 전남 화순 쌍봉사이다. 네비에는 358키로 3시간 48분이 찍혔다. 실질적인 목적지는 이불재이다. 정찬주 작가가 사는 집이다.
 
차는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서해안고속도로는 피했다. 지난달 천장사 갈 때 서해대교 전까지 무려 4시간 걸린 기억이 있다. 토요일 오전 6시에 출발 했음에도 거의 서 있다시피 했다. 이번에는 새로 생긴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요즘 장마철이다. 하루는 비가 오고, 또 하루는 햇볕이 쨍쨍하는 날이 반복되고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비가 왔다. 신너릿재를 지나 화순에 이르렀을 때는 새차게 때렸다.
 

 
이불재는 산중에 있다. 29번 국도에서 8키로가량 산속으로 들어 가면 나온다. 비는 점점 가늘어졌다. 도중에 저수지가 있었다. 지도를 찾아 보니 ‘장지저수지’이다. 물안개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도중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불재는 처음이 아니다. 2년전에 처음 찾아 갔었다. 그때 방문한 것에 대하여 ‘이불재에서 정찬주 선생과 함께’ (2021-07-04)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한풀 꺽일 때 갔었다. 그때도 비가 왔었다.
 
만 2년만에 이불재로
 
만 2년만에 이불재를 찾았다. 이번에도 함평제사가 있어서 겸사겸사해서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정찬주 작가가 보기를 원했다. 그것은 새로 나온 소설 아소까대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불재에 도착했다. 쌍봉사 바로 위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암자처럼 보인다. 실제로 암자로 착각하여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개인 사유지이다. 그래서일까 대나무로 막아 놓았다.
 

 
대나무를 보니 제주도에서 보던 정낭과 비슷한 느낌이다. 가로로 막대가 쳐져 있으면 비어 있으니 출입을 금한다는 말과 같다. 도기 굽는 장소는 출입금지 구역인 것 같다.
 
이불재의 정문은 사립문으로 되어 있다. 사립문에 ‘집필중’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집필중에는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연락이 되었기 때문에 사립문을 밀쳤다.
 
이불재는 고요하다. 가느다랗게 비가 내리는 이불재는 산사의 분위기가 난다. “저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정찬주 작가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작가의 부인박명숙 선생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도예전 할 때도 봤었다. 이번이 세 번째이다. 먼저 준비해 온 꿀을 박선생에게 넘겨 주었다.
 
정찬주 작가는 다실로 인도했다. 손님이 찾아 오면 늘 앉는 그 자리이다. 작가가 팽주가 되어 차를 따라 준다. 옆에는 박명숙 선생이 앉았다. 그러나 차맛보다 법의 맛이다.
 
청람(淸覽)의 뜻은?
 
작가는 먼저 아소까대왕 세 권을 건넸다. 어떤 메시지가 있을까? 1권 표지를 열어 보았다. 열자마자 “이병욱님 청람 平常心是道 2023. 7. 1 정찬주 합장”이라고 쓰여 있다.
 

 

 
평상심시도는 마조 도일선사가 말한 것이다. 평상의 마음이 곧 도라는 것이다. 항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면 평상심시도가 될 것이다. 위빠사나로 말하면 늘 사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작가는 ‘이병욱 청람’이라고 했다. 청람이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청람(淸覽)이라는 말은“남이 자신의 글이나 그림 따위를 보는 것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고도의 존칭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은 정해져 있다. 10시부터 11시까지 앉아 있고자 했다. 12시에 광주에서 약속이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칠 줄 몰랐다. 주고받고 하다 보니 11시를 훌쩍 넘겼다.
 
한시간 이상 이야기한 것을 다 기록할 수 없다. 기억에 남는 것, 인상적인 것을 남겨야 한다. 가장 먼저 나의 글쓰기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글쓰기에 대한 코치를 받고 싶어서 물어 본 것이다.
 
작년 박명숙 선생 도예전 열렸을 때 글쓰기 지도 받은 바 있다. 딱 두 가지 이야기 했었다. 하나는 동어반복이고, 또 하나는 비속어이다. 글을 쓸 때 두 가지는 가능하면 피하라고 했다. 여기에 내가 하나 더 자발적으로 추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비하에 대한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가 일상이고 글쓰기가 생활화 되어 있다. 어떤 것이든지 쓴다. 이럴 때 작가의 세 가지 충고는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이 동어반복인 것 같다.
 
동어반복에 대하여
 
동어반복은 무엇인가? 앞에서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는 식을 말한다. 마치 중언부언하는 것과 같다. 마치 나이 든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잔소리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럴 때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똑 같은 단어를 두 번 사용하지 않는 것도 해당된다. 그런데 문장을 두 번 사용했을 때도 동어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강조하기 위해 한 것일 수도 있다.
 
동어반복이라 하여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기능적 동어반복과 기술적 동어반복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기술적인 동어반복은 가능하지만 기능적인 동어반복은 피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화장의 비유로 설명했다.
 
화장을 하면 예뻐진다. 그러나 지나친 화장은 혐오를 주기 쉽다. 칠한 것에 덧칠 했을 때 인조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덧칠하는 것이 동어반복인데 기능적 동어반복으로 본 것이다.
 
기술적 동어반복은 허용된다. 같은 동어라고 하더라도 다른 구조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또 다른 얼굴 본바탕 같은 것이다. 문장을 새롭게 전개할 때 가능한 것으로 본다.
 
소설은 소설 읽듯이 읽어야
 
이불재 정찬주 작가를 만나기 위해 5시간 반을 달려 왔다. 이렇게 왔는데 책만 받고 갈 수 없다. 혹시 글쓰기에 대해서 더 충고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지 물어 보았다. 더 이상 없다고 했다. 동어반복만 주의하면 된다고 했다.
 
글이 긴 것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다. 처음 글을 접한 사람들의 최대 불만은 글이 긴 것이다. 그래서 제발 좀 글을 짧게 쓰라고 한다. 아마도 짧은 글에 익숙한 사림일 것이다.
 
긴 글을 읽었을 때 시간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래서 불편한 마음에 흔적을 남긴 것인지 모른다. 작가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글이 긴 것은 나름대로 전달해야 할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글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을 경전 경전 읽듯이 읽고자 한다고 말했다. 애써 쓴 책을 하루밤에 다 읽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작가는 빠른 속도로 읽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가능하면 집중에서 며칠 이내로 읽으라는 것이다.
 
소설은 경전이나 논서와는 다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이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났을 때 여운이 남듯이, 소설도 읽고 나면 무언가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소설은 소설 읽듯이 읽어야 할 것 같다.
 
붓다빅퀘스천에서
 
어제 귀가 길에 작가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함평에서 안양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받은 것이다. 카톡에는 붓다퀘스천 유튜브 영상이 소개 되어 있었다. 작가가 강연한 것이다. 영상은 ‘정찬주, 아소까왕의 자세에서 자비의 삶을 발견하다 소설 '아소까 대왕': 평화, 공존과 생명의 가치 [붓다빅퀘스천 25]’(https://youtu.be/YahfLmg5M74)라는 긴 제목이다.
 
고속도로로 이동 중에 영상을 다 보았다. 한마디로 소설 아소까대왕의 모든 것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영상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소설 아소까대왕을 읽으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문자를 남겨 놓았다.
 
영상에서 기억에 남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쥐 이야기’와 ‘눈뜬 사람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소설 아소까대왕을 쓰기 위해서 인도로 열 차례 이상 여행했는데 공통적으로 짐을 들어 주는 호텔종업원과 대화한 것이다.
 
오성급 호텔에 쥐가 들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호텔종업원은 태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쥐도 사는 세상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번에 함평에서 본 것이 있다. 홀로 사는 사촌누님 집에는 고양이가 있다. 누님은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다. 고양이가 농기구가 있는 창고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끼를 나은 것이다.
 
홀로 사는 누님은 홀로 살고 있지 않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시에서 보는 것처럼 애완으로 기르는 것은 아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먹이는 준다. 고양이와 공존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갖가지 생명이 살고 있다. 그들은 누가 보건 말건, 누가 관심 두건 말건, 때가 되면 새끼를 치고 산다. 마치 저 멀리 있는 꽃이 누가 보건 말건 홀로 피고 지는 것과 같다.
 
호텔종업원은 자신을 ‘붓다’라고 했다고 한다. 왜 그런지 물어 보았다고 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니 붓다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그것은 경전에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에 대한 여러 찬탄의 말이 있다. 그 중에 귀의문(歸依文)이 있다. 외도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귀의할 때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Sn.1.4)라는 정형구를 말한다.
 
부처님에 대하여 눈을 뜬 자라고 말한다. 이는 가려진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이는 눈을 갖춘자와 같다. 잠에서 깨었을 때 눈을 뜨듯이, 무명에서 깨어 나는 것에 대하여 ‘눈을 뜬 자’ 또는 ‘눈을 갖춘 자’라고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붓다빅퀘스천에서 아소까대왕의 대강을 설명했다. 유튜브 영상을 본 다음에 소설을 본다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는 아소까대왕, 그 분은 어떤 분일까? 이는 책의 ‘띠지’를 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띠지에는 소설의 핵심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한줄로 요약되어 있다. 공통적으로 “평화와 공존의 철학으로 정법을 세계로 펼친 전무후무한 아소까대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것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한줄 메시지일 것이다.
 
아소까대왕 읽기 대장정에
 
아소까대왕 읽기 대장정에 들어가고자 한다. 하루 몇 페이지씩 여러 달에 걸쳐서 읽으려고 했으나 그만 두었다. 작가의 말대로 영화나 드라마 보듯이 몰입해서 단숨에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아소까대왕에 도움을 주었다. 언젠가 작가가 3차결집과 관련하여 자료를 요청했을 때 메일을 발송한 바 있다. 찾아 보니 3권 5장에 있는 ‘아소까라마 3차 결집’이다.
 
3차결집의 특징은 논장이 추가 된 것이다. 이렇게 논장이 추가 된 것은 이교도를 추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소설에서 “목갈리뿟따띳사가 카타왓투를 정리한 까닭은 외도 추방을 일단락 짓고 아소까라마에 모인 1천명의 장로들과 여러 논서를 암송해 결집하기 위해서였다.”(3권 286쪽)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카타왓투는 아비담마 칠론 중의 하나이다. 아비담마 칠론은 담마상가니(법집론), 위방가(분별론), 카타왓투(논사), 뿍갈라빤냐띠(인시설론), 다뚜까타(계론), 야마카(쌍론), 빳타나(발취론)를 말한다.
 
3차결집으로 율, 경, 론 삼장이 완성되었다. 빠알리삼장이 완성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법(正法)이다. 빠알리 삼장이 있고, 팔정도의 수행이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성자가 출현하면 정법이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
 
담마의 승리를 위하여
 
아소까대왕은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했다. 그 중에 한 곳이 스리랑카이다. 스리랑카에 전승된 공인된 불교는 오늘날 빠알리삼장형태로 남아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정법이다.
 
아소까대왕은 전륜왕으로서 명성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정법의 수호이다. 그리고 법의 바퀴를 굴렸다. 그렇다면 아소까대왕은 왜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고자 했을까? 이는 아소까 바위칙령에 잘 나타나 있다.
 
아소까대왕은 담마비자야(dhammavijaya)를 천명했다. 이는 담마에의 의한 승리 또는 담마에 의한 정복을 뜻한다. 그래서 바위칙령을 보면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바위칙령 13)라고 했다.
 
담마에 의한 정복이 왜 가장 훌륭한 정복일까? 그것은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바위칙령 13)라고 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 아소까대왕은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천명했다. 이와 같은 아소까선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소설로, 영화로, 드라마로, 글로 담마를 말해야 한다. 담마의 승리를 위하여.


2023-07-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