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마음이 황무지가 되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13. 10:28

마음이 황무지가 되었을 때
 
 
요 며칠 마음의 황무지를 겪었다.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스산하고 음울한 느낌이었다. 감기에 걸려서 약을 먹고 외출을 자제하는가 하면 하루 종일 유튜브만 보다 보니 마음이 황무지가 된 것 같다.
 
마음의 황무지는 금방 해소된다. 경전을 열어 보면 즉시 사라진다. 니까야를 어는 순간 사라지고, 논서를 펼치는 순간 없어진다. 이것이 초기불교의 마력일 것이다.
 
휠체어 탄 노인들을 보면
 
우울한 마음은 의지할 데가 없을 때 나타난다. 하루 종일 가만 있을 때 나타난다. 이럴 때는 걸어야 한다. 공원에라도 나가서 돌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명학공원에는 형편없이 늙은 노인들이 둘레길 돌기를 하고 있다.
 
명학공원 주변에는 요양원이 몇 곳 있다. 일반건물에 요양원이 있는 것이다. 큰 병원에도 요양원이 있다. 빌딩 전체를 요양병원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명학공원에는 휠체어 탄 노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힐체어 탄 노인은 아마 산책 나온 것 같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보호자가 따른다. 보호자는 가족 같지 않다. 아마 봉사자일 것이다. 유급인지 무급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간호 한다.
 

 
어떤 노인은 생이 얼마 남은 것 같지 않다. 휠체어를 탈 정도이면 사회적으로는 이미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봉사자는 등을 맛사지 해 준다. 휠체어에 엎드린 환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걸을 힘만 있어도 행복한 것이다. 밥 먹을 힘만 있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와상이나 준와상이 되었을 때 사실상 사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건강할 때 무엇을 해야 할까?
 
몸이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다. 부귀영화도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몸에 병이라도 생기면 마음이 황무지가 되기 쉽다. 정신적 황무지가 되는 것이다.
 
정신적 황무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존할 데가 없는 것을 말한다. 의존할 데가 없어서 방황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다르면, 스승에 대한 의심, 가르침에 대한 의심, 승가에 대한 의심, 배움에 대한 의심, 동료와의 불화가 그것이다.
 
마음이 황무지가 되었을 때 경전을 접하면 마음이 차분해 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한점의 의혹도 없다. 만일 의심한다면 어떻게 될까? 열어 보지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혓바늘이 돋는 다는 말이 있다. 하루라도 경전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황무지가 되는 것 같다. 경전이나 논서를 펼치는 순간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마음의 황무지에서 마음의 충만으로 바뀐다.
 
자신을 섬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었다. 어떤 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을 횡단한다고 하지만 나는 니까야를 읽으면서 가르침의 대륙을 횡단하고자 한다.
 
상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평소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주석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섬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자귀의법귀의를 말씀하셨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자신을 섬으로 하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윤회의 바다에서 난파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섬은 열반의 상징이다. 그런데 열반은 섬뿐만 아니라 피난처, 동굴, 귀의처, 피안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곳은 어디일까? 파도치는 바다라면 섬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자신을 섬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장 안전할 것이다. 그 섬은 바로 열반을 상징한다.
 
열반을 체험한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까? 가장 안온한 동굴과도 같은 열반을 체험했다면 못 잊어 할 것이다. 마치 최상의 음식을 맛 본 자가 그 음식 맛을 못 잊어 하는 것과 같다. 법의 맛도 그럴 것이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맛은 무엇일까?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고 나면 포만감에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그러나 법의 맛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라고 했다.
 
법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고 했다. 수행자가 궁극의 경지를 체험 했을 때 어떤 감각적 쾌락의 맛 보다 더할 것이다. 궁극의 맛을 봤을 때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이다. 이럴 때 다른 맛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로지 법의 맛만 찾는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 외 다른 가르침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가르침에 의지할 수 없다.
 
뗏목의 비유가 있다. 뗏목을 타고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고 뗏목을 불살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 뗏목을 침수시켜 놓으라는 말과 같다.
 
뗏목을 버리는 것은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뗏목이 가르침을 뜻하기 때문에 가르침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뗏목을 버리라고 하여 가르침마저 버린다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데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한번에 건너갈 수 없다. 가장 먼저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이것이 견도이다. 수다원 단계를 말한다.
 
자기가 자기자신을 보호해야
 
부처님은 자귀의법귀의를 말씀 하셨다. 여기서 자귀의는 자신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 다는 말과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부처님은 자신을 자신의 수호자가 되라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을 섬으로 하라는 말과 같다. 자신을 자신의 등불로 하라는 말과 같다. 어떻게 가능한가? 주석에 따르면, 이는 “길(magga)과 경지(phala)를 계발하는 것이 가능한 자에게 자기가 자기의 수호자이다.”(DhpA.III148)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내가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길과 경지를 계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자기가 자기를 수호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사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열반을 체험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악처에 떨어질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자의 흐름에 드는 조건이 있다. 유신견과 의심과 잘못된 수행방법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핵심은 유신견이다. 몸과 마음, 즉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 오온이 내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성취된다.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체험 했을 때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사악처에 떨어질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가 자기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갖추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창피함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정진을 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지혜를 갖추는 한,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수행승에 대하여 이제 근심이 없다. 그 수행승은 자신의 수호자로서 더 이상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A5.7)라고 했다.
 
법을 지키면 법이 보호해 준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따르면 가르침이 보호해 준다. 수행자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했을 때 이는 자기가 자기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자신의 수호자라고 했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앗따굿따(attagutta)라고 한다. 영어로는 ‘self-guarded’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자신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귀의를 말씀하시고서는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상윳따니까야 읽기를 하다 보니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똑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문구를 발견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깟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집착, 주착을 통해 구속 되어 있지만, 그는 접근, 집착, 그리고 마음의 독단, 주착, 경향에 접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는 독단을 취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앎이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점에서 올바른 견해가 있는 것이다.”(S12.15)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는 유무중도를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가장 표현된 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중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중도를 말한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양극단이다. 연기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는 부처님이 영원주의에 대해서는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또한 허무주의에 대해서는 “세상의 생성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적 관찰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가 사라질까? 이럴 때는 주석을 봐야 한다.
 
부처님은 영원주의를 논파했다. 그것도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단 한 줄로 부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 세상의 발생은 연기의 역관적 조건 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십이연기에서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라는 연기의 소멸구조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해 가는 것을 보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常住論)는 사라진다.”(Srp.II.33)라고 했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세상을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하여 산천초목삼라만상을 말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세상인 것이다. 이는 ‘세상의 생겨남의 경’에서 “수행승들이며,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 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 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세상과 다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상과도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말한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마음이 생성되는데 이를 세상의 생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은 괴로운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35.107)라고 했다.
 
불교에서 세상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존재는 어떤 것일까? 물론 오온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의 각 연결고리로 알 수 있다. 협의로는 집착을 조건으로 발생되는 업으로서 존재(業有)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허무주의도 논파했다. 부처님은 “세상의 생성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단 한 줄로 간단하게 부수었다.  이 말은 연기의 순관적 조건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십이연기에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는 발생구조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업, 무명, 갈애 때문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사실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게 더 이상 내세가 없다는 허무주의(斷滅論)는 사라진다.”(Srp.II.33)라고 했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인간은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한역으로 가전연경이라고 한다. 성철스님이 백일법문할 때 이 경을 인용했다. 가전연경의 중도가르침을 인용하여 법문한 것이다. 그런데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직 경을 완전히 소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짤막한 경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중도사상이 들어 있다. 유무중도를 말한다. 부처님은 이 짤막한 경으로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를 논파했다. 발생을 관찰해서 허무주의를 부수고, 소멸을 관찰하여 영원주의를 부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사성제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고성제이다. 부처님은 원인과 결과에서 왜 결과를 앞에 두었을까? 이는 이 세상이 괴로움의 바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을 일 것이다.
 
고성제에서는 사고와 팔고를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괴로움은 팔고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임을 말한다.
 
인간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다. 그래서 인생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인간은 괴로운 존재로 세팅되어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한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명백하다. 집성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라고 한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이다. 어떻게 해야 갈애를 없앨 수 있을까? 그 해결방법은 도성제이다. 이는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팔정도 수행을 하면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팔정도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계, 정, 혜 삼학으로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면 성자가 된다. 그런데 성자가 되는 조건 중에 하나는 유신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유신견은 오온이 나의 것이라는 견해를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으면 유신견도 내려 놓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나라는 견해를 내려 놓는 것과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먼저 몸과 마음이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는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여 그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오온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가르침의 정수를 맛보았을 때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나의 자아’라는 독단을 취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앎이 있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더 이상 나라는 견해가 없다. 유신견이 부수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오로지 괴로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한 이유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유신견을 버리고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전하지 않게 된다. 이는 자귀의 상태가 되는 것과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에게 의지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흐름에 든님(예류자) 이상의 고귀한 제자는 가르침의 정수를 맛보았으므로 진리에 대한 통찰을 위해 아무한테도 심지어 부처님에게 조차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룩한 님(아라한)이 되기까지 그러한 제자라도 명상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깨들은 스승에게 사사해야 한다.”(Srp.II.33)라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열반 체험을 해야 한다. 이는 주석에서 “고귀한 제자는 가르침의 정수를 맛보았으므로”(Srp.II.33)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여기서 가르침의 정수는 열반을 말한다. 열반을 체험해야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궁극적 경지를 체험하여 도와 과를 이룬 성자는 이제 다른 것에 의존할 것이 없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도의 길을 가면 된다. 이 수행도의 길이 사다함과 아나함이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면 아라한이 된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어서 무학도라고 한다.
 
마음의 황무지가 되었을 때
 
마음의 황무지가 되었을 때 경전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좌선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정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튜브만 본다면 마음은 황무지가 된다. 마치 쾌락을 탐닉한 다음에 찾아 오는 허무함 같은 것이다.
 
니까야와 논서를 볼 때 마음이 안정이 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나의 처지에 대입해 보았을 때 틀림 없는 사실이다. 진리로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단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분명한 사실은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생멸을 볼 수 있다. 한생각이 일어 났을 때 따라가지 말고 지켜 보는 것이다. 좌선에서와 같이 지켜 보는 것이다. 마치 제3자처럼 개입하지 않고 지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사라진다. 매사에 생멸을 관찰하면 집착할 것이 없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건강도 자신이 지켜야 한다. 건강을 잃어 버리면 괴롭다. 건강할 때 이루어 놓아야 한다. 그것은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성자에 흐름에 들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자기자신이 자기지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된다. 이것이 자신을 섬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귀의이다.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황무지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친구로, 자신을 스승으로, 자신을 섬으로, 자신을 등불로 삼아 나아 가는 것이다. 부처님에게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번뇌가 소멸될 때까지는 스승과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자귀의법귀의라고 했을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이 세상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많이 잡아서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섬으로, 자신을 등불로 하여 주욱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래서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라고 했을 것이다.
 
 
2023-07-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