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재가수행자의 밥값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25. 16:10

재가수행자의 밥값
 
 
지하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오늘 식사메뉴는 생선가스이다. 소고기장국이 나왔다. 매일 메뉴는 바뀐다. 집에서 밥 먹는 것과 같다. 먹고 나면 뿌듯하다. 오늘은 남김 없이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식판을 반납했다.
 
오늘 점심식사는 12시 50분에 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다. 아침에 일찍 일터에 나오기 때문에 점심 먹는 시간도 빠르다. 대개 11시대에 먹는다.
 
오늘 점심이 늦은 것은 좌선이 늦게 끝났기 때문이다. 좌선이 끝난 시간은 12시 40분이었다. 오전 11시 38분에 좌선을 시작해서 한시간 동안 좌선했다. 목표로 하는 한시간을 채운 것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유튜브로 보낼 수 없다. 유튜브를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것저것 보다 보면 유익한 것도 걸린다. 그러나 대부분 보아도 그만 보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다.
 
유튜브를 보고 나면 허무하다. 볼 때 뿐이다. 모든 감각적 즐거움이 그런 것 같다. 오로지 즐거운 느낌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행복감이다. 행복한 느낌을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인 것이다.
 
행복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엇이든 느껴진 것은 괴로움에 속한다.”(S12.32)라고 했다.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부처님인 이 세 가지 느낌에 대하여 모두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즐거운 느낌은 왜 괴로운 느낌인가? 즐거운 느낌, 행복한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괴로운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행복이 인생 목적인 것처럼 말한다. 매스컴에서더 행복을 말한다. 스님들도 행복을 말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행복을 말한다. 이른바 행복특강이라 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안양에 왔을 때 직접 가서 본 적도 있다.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 감각적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죽어도 좋아!”라며 목숨을 건다. 과연 이 느낌은 내것일까?
 
오늘 오전 유튜브를 보지 않았다.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글을 하나 올리고 나서 여유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먼저 산책 나갔다. 명학공원을 몇 바퀴 돌았다.
 
책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면 언어의 유희에 빠져 든다. 이념 투쟁의 장에 말려들 수도 있다. 새벽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책도 보지 말아야 하고 유튜브도 보지 말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좌선하는 것이다.
 
요즘 좌선에 열중하고 있다. 좌선하기 위한 환경은 잘 갖추어져 있다. 명상공간이 확보되었고 더구나 매트까지 깔아 놓았다. 더구나 경행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일터가 마치 수행처가 된 듯 하다.
 
며칠전부터 오전과 오후에 한번씩 좌선을 하고 있다. 좌선에 임할 때 “오늘은 한시간 동안 앉아 있는다.”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번번히 깨졌다. 다음날이 되면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는다.”라고 다짐한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한다. 매번 실패를 반복해도 성공할 때가 있다. 어제가 그랬다. 한시간을 앉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띠도 확립되었다. 밥값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삼시세끼 먹고 산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현명한자나 어리석은 자나 하루 세끼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것이야말로 성스러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밥 먹는 것이 왜 성스러운 행위인가? 이는 자신이 자신에게 공양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만큼 성스러운 행위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일까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산다면 축생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축생과 다른 것은 가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위도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밥 먹는 것이 하루일과 중에 가장 큰 행사인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과도 같다. 밥 때가 기다려지고 밥 먹을 때 가장 행복을 느낄 것이다. 식사가 대사(大事)가 된 사람들이다.
 
식사대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식사소사가 되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마도 가장 있는 일은 수행일 것이다. 자신을 성장시키고 향상하게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수행자는 밥값을 해야 한다. 특히 출가수행자가 그렇다. 출가수행자가 밥값을 못하면 어떻게 될까? 도둑으로 먹는 것이 되고 빚으로 먹는 것이 된다. 수행자가 밥값을 하면 부처님 유산으로 먹고 사는 자가 된다.
 
수행자는 자신의 밥을 먹어야 한다. 아라한이 되면 자신의 것을 자신이 먹는 것이 된다. 아라한이 되어 복전이 되면 자신의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비록 얻어 먹지만 자신의 것을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재가수행자도 밥값을 해야 한다. 식당에 가서 돈 내고 밥을 먹는다고 해서 자신의 것을 먹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가치 있는 일을 했을 때 밥값을 했다고 말한다.
 
오늘 밥값을 하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전에 한시간동안 앉아 있어야 한다. 한시간 동안 앉아 있기만 하면 밥값을 하는 것이다. 설령 한시간이 고행이 되어도 좋다.
 
자주 앉아 있다 보면 사띠가 확립될 수 있다. 앉아 있는다고 해서 매번 사띠가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맞아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 초보자이다. 오래전부터 수행을 해왔으나 늘 제자리걸음이다. 집중수행에도 참여해보고 미얀마도 다녀 왔다. 수행관련 서적도 다수 읽었다. 청정도론과 같은 수행지침서도 읽었다. 최근에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나는 수행을 잘 할 수 있을까? 끊을 놓고 있지 않아야 한다. 수행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여 앉아 있지 않으면 기회조차 오지 않을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는 기회를 말한다.
 
인연의 끝을 놓지 말아야 한다.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도 수행인연의 끈을 놓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앉아 있다 보면 사띠가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띠 확립에 달려 있다. 사띠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행이다. 번뇌망상으로 인하여 단 5분도 앉아 있기 힘들다.
 
어떻게 해야 사띠를 확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몸과 마음을 먼저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다.
 
수행은 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일을 하듯이 욕심으로 할 수 없다. 마치 돈을 욕심으로 벌려고 하듯이 해서는 안된다. 잘 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한 앉아 있는 것이 고행이 되기 쉽다.
 
명상에 임하는 자세가 있다. 먼저 복장이 편해야 한다. 집에서 추리닝바지를 가져다 놓았다. 바지를 입는 것보다 훨씬 편한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먼저 몸을 풀어야 한다. 먼저 경행하는 것이 좋다. 명상공간을 가볍게 도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행대로 옮긴다. 경행대에서 여섯 단계 행선을 한다.
 
행선을 하면 어느 정도 집중이 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잡생각은 들지 않는다.
 
행선을 하다 멈출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이 알아차림 한다. 마음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훝어 내리는 것이다. 가능하면 천천히 하려 한다. 세 번 한다.
 
행선이 어느 정도 되었으면 자리에 앉는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가는 것이다. 막바로 자리에 앉는 것보다 행선과 같은 예비동작을 취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좌선을 할 때는 평좌로 한다. 두 다리를 안으로 오므려 두 다리의 장딴지가 바닥에 닿게 하는 것이다.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한다. 나의 경우 평좌를 하다 보면 오른쪽 다리에 반드시 통증이 오기 때문이다.
 
허리는 꼿꼿하게 세운다. 평좌를 할 때 엉덩이에 방석을 댔기 때문에 바닥 보다 10센티가량 높게 된다. 엉덩이와 두 다리가 삼각대가 형성된다. 이때 허리를 최대한 펴준다. 허리를 펴주면 가슴도 펴지게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한시간에 세팅해 두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동안 앉아 있겠다.”라는 각오를 했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한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인가? 자동차를 운전하면 100키로를 갈 수 있다. 한시간 운전하면 안양에서 평택 서해대교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이다. 꿈을 꾸면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다.
 
좌선을 할 때 가장 강한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 호흡이기 쉽다. 그렇다고 코의 호흡을 보는 것은 아니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해야 한다. 부품과 꺼짐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띠가 확립되지 않으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다.
 
좌선의 최대 적은 번뇌망상이다. 앉아 있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에 생각의 집을 짓는다. 생각의 집은 곧 허물어진다. 집을 지었다고 허물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이럴 때 좌선이 무척 힘들어진다.
 
번뇌망상으로 좌선이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는 뒤로 벌렁 누워 버린다. 몸도 마음도 힘이 들어서 뒤로 자빠지는 것이다. 명상센터에서 이렇게 하면 안된다. 나 자신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뒤로 벌렁 누워 있다 보면 약간 잠이 들 때가 있다. 잠에서 깼을 때 상쾌한 마음이 든다. 마치 컴퓨터가 리셋 된 것 같다. 이럴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알람을 다시 한시간으로 설정했다. 이때가 11시 38분이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서 배가 고팠지만 한시간을 꼭 채우고 싶었다.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보다 훨씬 나았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좌선이 잘 되지 않아 벌렁 나자빠진 것 밖에 없다. 이런 행위가 전화위복 된 것 같다. 이전에는 잘 해보려고 애를 썼으나 뒤로 나자빠지면서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다 안되면 포기해야 한다. 세상에서는 “안되면 되게하라!”라고 하지만 수행에서는 정반대가 된다. 안되면 그만 두어야 한다.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포기 했을 때 기회가 온다.
 
두 번째로 자리에 앉았다.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포기의 미학이 작동된 것 같다. 하다 안되어서 뒤로 벌렁 나자빠져 포기의 상태가 되었을 때 몸과 마음이 유연하게 된 것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이번 좌선은 잘 될 것 같았다. 이는 몸과 마음이 이완 되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리셋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리셋 된 상태에서 좌선에 임했다. 사띠가 분명해졌다. 사띠가 분명해지면 번뇌망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신 전체적으로 아는 마음은 분명해진다.
 
사띠는 확립되었다. 새김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호흡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가장 강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도 호흡과 관련 있다. 이렇게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신념처에 해당된다.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좌선을 시작한지 20분이 넘어가자 슬슬 오른쪽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평좌한 다리에서 통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통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이기 때문에 남의 다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 보는 것이다.
 
다리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그러나 마음으로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정신과 물질의 분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상태가 된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자신의 몸이지만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는 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무토막처럼 보인다.
 
몸은 내것일까? 사람들은 몸이 내것이라고 말한다. 얼굴도 내얼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사띠가 확립되면 몸은 더 이상 내몸이 아니다. 다리에 통증이 생겨도 마음에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다리 보듯 한다.
 
다리의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통증일 뿐이다. 마음으로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다리 보듯이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몸은 나무토막 같은 것이다.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머지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Dhp.41)
 
 
생명기능이 없는 몸은 나무토막 같은 것이다. 정신이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좌선 중에서 사띠가 확립되면 몸은 나무토막 같은 것이 된다. 다만 살아 있기 때문에 호흡과 신진대사는 일어난다.
 
사띠가 확립되면 몸과 마음은 분리되는 것 같다. 몸은 단지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나무토막 같은 것이다. 이런 몸에 대하여 대념처경에서는 한 개의 입구와 한 개의 출구가 있는 자루와도 같다고 했다.
 
인간은 어쩌면 똥자루 같은 것이다. 왜 똥자루인가? 이는 대념처경에서 부처님이 “양쪽 입구로 육도, 적미, 강낭콩, 완두 콩, 기장, 백미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곡식으로 가득 채운 푸대자루”(D22.7)같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푸대자루 같은 인간의 몸이다. 온갖 장기가 들어가있는 똥자루 같은 것이다. 입구는 입을 말하고 출구는 항문을 말한다. 자루 안에는 장기가 있다. 음식을 먹으면 장기에서 소화되어서 똥으로 나온다.
 
푸대자루 같은 몸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활발하게 대사활동을 한다. 음식을 먹으면 피가 되고, 뼈가 되고, 장기가 되는 것도 나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호흡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신진대사활동 하는 것과 같다. 이런 호흡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지켜만 보면 된다.
 
좌선을 해서 사띠가 확립되면 몸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호흡은 나의 의지와 관련 없다. 다리에 통증이 일어나는 것도 나의 의지와 관련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켜 보는 것 밖에 없다.
 
두 번째 좌선을 시작한지 40분이 되었다. 오른쪽 다리의 통증으로 인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통증이 정신으로 까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신진대사를 하는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다.
 
다리통증이 심하면 자세를 바꿀 수 있다. 자세를 바꾸어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향하게 하고 왼쪽 다리를 바깥에 하기로 했다. 이렇게 자세를 바꾸었어도 사띠는 계속 유지 되었다.
 
자세를 바꾸자 몸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여전히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움직이지 않고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만 지켜 보면 된다. 이럴 때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을 하게 된다.
 
사띠가 확립되면 번뇌망상이 치고 들어 오지 못한다. 그대신 이전에 경전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오른다. 이는 교양서적이나 소설에서 본 것과 다르다. 수행과 관련된 문구가 떠오르는 것이다.
 
좌선의 핵심은 사띠에 달려 있다. 사띠가 확립되지 않으면 앉아 있을 수 없다. 온갖 번뇌망상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사띠가 확립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새김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경전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오르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띠는 바로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사띠가 기억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띠는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라고 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띠는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분별은 지혜와 동의어이다. 이렇게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는 것을 사띠라고 하는데 또한 이를 총혜(聰慧)라고 한다. 최상의 기억과 최상의 분별을 갖추면 강력한 사띠가 된다.
 
기억과 결합된 분별은 강력한 것이다. 그런 사띠는 부처님 가르침도 된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새기는 것 자체가 기억을 뜻하는 사띠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새겨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고 기억하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관찰하는 것, 바로 그것은 다름아닌 법념처이다.
 
사념처에서 법념처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법념처는 어떤 것인가? 대념처경에 따르면, 오장애, 오온, 육내입처, 칠각지, 사성제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다.
 
사띠가 확립되면 번뇌망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부처님 가르침이 떠오른다. 이는 마치 신념처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수념처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는 법관찰을 할 수 있다. 오장애, 오온, 십이처, 칠각지, 사성제와 같은 가르침이 떠 오르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법념처이다. 그래서일까 칠각지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고 했다.
 
오전 좌선은 12시 40분에 끝났다. 11시 38분에 시작한 좌선이 한시간 넘게 지속된 것이다. 한시간 앉아 있었으니 성공이다. 더구나 사띠까지 확립되었다. 밥값 한 것이다.
 
좌선 중에 배가 고팠다. 좌선 시작 전에도 배가 고팠는데 질적으로 달랐다. 좌선 전에는 단지 내가 배고픈 상태였다. 그러나 좌선 중에 배고픈 현상은 분리된 것이었다. 마치 신진대사가 일어날 때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듯이, 배가 고픈 현상도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다리통증이 생겼을 때 남의 다리 보듯 하는 것과 같다.
 
12시 40분에 좌선을 끝냈다. 그리고 지하식당으로 밥 먹으로 갔다. 평소와 달리 밥값 한 것 같았다. 비록 내 돈 주고 밥을 먹는 것이지만 떳떳하고 당당하게 먹었다. 남김없이 비웠다. 오늘 밥값 했다. 재가수행자의 밥값이다.
 
 
2023-07-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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