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지금은 몸을 만들어야 할 때, 재가안거 2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1. 11:41

지금은 몸을 만들어야 할 때, 재가안거 2일차
 
 
지금 시각 10시 10분, 몸과 마음은 상쾌하다. 사무실 불은 꺼져 있다. 자연채광이다. 바깥의 날씨는 30도가 넘는다. 중앙냉방은 되어서 쾌적하다.
 
안거를 시작했다. 이름하여 재가안거라고 붙이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것이다. 그제 담마와나선원에서 안거입재를 했기 때문에 이를 시점으로 보고 있다. 3개월 후 회향 때까지 매일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안거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약속이다. 이렇게 선언을 해 놓으면 돌이킬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소가 끄는 수레바퀴와 같다.
 
법구경 1번 게송에 “수레바퀴가 발굽을 따르듯.”(Dhp.1)이라는 구가 있다. 수레바퀴는 굴대에 연결된 견인용 황소의 발을 따른다.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살을 도려내려 한다. 바퀴는 황소의 운동을 제어하며 한 발 한 발 황소의 뒤를 따른다.
 
안거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수레를 끄는 황소와 같다. 결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한번 선언한 것은 물릴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앞으로 구르는 수레바퀴와 같다.
 
안거기간 중에는 매일 오전 7시 반에서 8시 반까지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이것이 안거기간 중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생업이 있기 때문에 이것 이상 할 수 없다. 하루 한끼를 먹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일을 하려면 하루 세 끼 먹어야 한다.
 
선원에서 집중수행하면 스님처럼 살 수 있다. 하루 한끼만 먹으며 하루 종일 명상만 하며 지내는 것이다. 스님처럼 계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구족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새벽 예불시간에 8계를 받아 지녀야 한다. 선원에 따라 9계를 주기도 한다. 자비계를 하나 추가 하는 것이다.
 
재가자의 8계는 하루용이다. 단 하루 밤과 하루 낮에 지나지 않는 계이다. 이런 이유로 재가자의 8계는 매일 새벽 예불시간에 받아 지녀야 한다.
 
재가안거에서는 선원에서처럼 살 수 없다. 다만 선원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위치를 선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았을 때 입재법회에 참여하고 재가안거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대단히 중요하다.
 
재가안거 기간 중에는 한시간 좌선을 목표로 한다. 이와 함께 수행기도 작성하고자 한다. 한시간 동안 느꼈던 것, 체험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쓰고자 하는 것이다. 일종의 재가안거 일기가 된다.
 
오늘 아침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잠의 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자는 둥 마는 둥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아침 좌선 시간이 되었다. 실패가 예상된 것이다. 그럼에도 예비수행을 했다. 행선을 10여분 했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이런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가고자 한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잘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앉은 것이다. 그래도 한시간 버텨 보기로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좌선은 고행과도 같다. 온갖 번놔와 망상이 밀려 왔다. 망상이 집을 짓는다. 대상을 놓쳤을 때 생각이 치고 들어와 집을 짓는 것이다.
 
망상이 일어나 집을 짓고 나면 허물어야 한다. 이런 것을 한번 겪고 나면 맥 빠진다. 힘이 든다. 망상이 거듭되어서 집을 짓고, 집을 허물기를 반복하다 보면 피곤해진다. 이럴 때는 좌선을 중단해야 한다.
 
알람을 보았다. 아직 24분 남았다. 망상속에서 보낸 시간이 36분 되었던 것이다. 뒤로 드러누웠다. 잠도 잘 못 잤고, 망상의 집 지은 것도 피곤했다.
 
좌선하다 누우면 편안하다. 명상공간에는 두께가 10센티에 달하는 두꺼운 방석이 있어서 요 역할을 하고 있다. 뒤로 누워 머리를 아래로 하여 가만 있었다.
 

 
때로는 포기도 필요하다. 과도한 기대를 하면 실망하기 쉽다. 포기 했을 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포기의 마음이 되었을 때 진정으로 내려 놓는 마음이 된다. 뒤로 벌러덩 누웠을 때 포기의 마음이 되었다.
 
뒤로 누운 상태로 있으면 편안하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가만 있다 보면 스스로 눈이 감긴다.
 
눈을 떴을 때 당황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잘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나 졸음쉼터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것과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잔 것이다. 필름이 끊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매우 짧게 잤다.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깨어 났을 때 완전히 초기화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안온 한 것이 집인 것처럼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리셋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새로운 활력이 솟는다. 다시 주행을 시작하면 새로운 기분이다. 졸릴 때는 쉬어 가야 한다. 피곤하면 졸음 쉼터에서 자고 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좌선을 하다가 망상에 시달리면 잠시 누워 자는 것도 좋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채워야 한다. 약속한 것이다. 몸과 마음 상태는 이전 보다 훨씬 나아 졌다. 잠시 잠을 잔 것이 매우 상쾌했다. 이런 상태를 놓쳐서는 안된다. 좌선으로 가져 가야 한다.
 
몸 컨디션이 좋으면 좌선도 잘 된다. 몸 상태가 엉망이면 좌선은 망상에 시달리기 쉽다. 두 번째 좌선은 잘 될 것 같았다. 아니 잘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좌선을 하면 오른쪽 다리가 저려 왔다. 이런 이유로 한시간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좌선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넣었다. 오늘도 도중에 다리저림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도중에 자세를 바꿀 것도 생각했다.
 
오전 9시부터 두 번째 좌선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좌선은 실패 했지만 이번 좌선만큼은 반드시 한시간 앉아 있고자 했다. 수행초보자는 일단 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안거기간 중에 매일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도와 과를 이룬다거나, 빛을 본다든가, 깨달음을 이루는 것 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앉아 있는 습관 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몸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 있는다. 가만 있다 보면 강한 대상이 있다. 그것은 호흡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면 망상이 집을 지을 수 없다.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있으나 금방 제압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간격이 있다. 그 간격으로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있다. 생각은 틈만 나면 밀고 들어 오는 것이다. 그 간격을 메꾸어야 한다. 어떻게 메꾸는가? 엉덩이의 ‘닿음’을 보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명칭을 붙이라고 했다. 처음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배의 부품, 꺼짐에 대하여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부품과 꺼짐 사이에 간격이 있을 때 잡념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닿음’을 집어 넣는다.
 
부품과 꺼짐 사이에 닿음을 집어 넣었다. 또한 꺼짐 다음에도 닿음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부품-닿음-꺼짐-닿음이 된다. 이렇게 면밀하게 관찰하면 잡념이 발 붙이지 못할 것이다.
 
명상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괴롭게 하기 위해서 명상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이 재미가 있으려면 번뇌망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두어야 한다.
 
마음을 어떻게 묶어 두어야 할까?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두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묶어 두면 밧줄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마치 소를 기둥에 묶어 놓았을 때 그 길이만큼만 땅에서 풀을 뜯는 것과 같다.
 
마음을 대상에 완전히 붙여 버리면 사마타가 된다. 마음을 대상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서 관찰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놓은 것과 같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놓으면 번뇌망상은 힘을 쓰지 못한다. 설령 들어 오더라도 금방 제압된다. 더 이상 망상의 집을 짓지 않는 것이다.
 
좌선 중에 사띠가 확립되면 명상이 쉬워진다. 힘이 들지도 않는다. 그냥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종종 좋은 생각도 떠 오른다. 법회에서 법문 들었던 것도 떠 오르고 경전에서 봤던 문구도 떠오른다. 이런 것은 불청객처럼 찾아 오는 망념과는 다르다.
 
망념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집을 짓게 된다. 나중에 알았을 때는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좌선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힘이 빠진다. 그러나 사띠가 확립 되었을 때,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밪줄에 묶여 있을 때 망념의 집을 지을 수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났다. 명상으로 한시간 보내기가 쉽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를 한시간 보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오로지 대상을 관찰 했을 때 한시간은 아득한 것이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애인과 보내는 한시간은 너무 짧을 것이다. 그러나 기합을 받을 때 일각은 여삼추와 같다. 초보 수행자가 좌선으로 한시간 보내는 것은 마치 얼차려 받는 것처럼 긴 시간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 상당히 흐른 것 같다. 놀랍게도 오른쪽 다리 통증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까지 한시간 앉아 있지 못했다. 도중에 자세를 바꾸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통증이 없는 것이다.
 
풍선 효과가 있다. 한군데를 누르면 다른 곳이 나오는 것이다. 오른쪽 다리 통증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엉덩이 통증이 시작되었다. 묵직한 느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게가 더 나가는 것 같다.
 
통증이 심하면 자세를 바꾸어도 좋다. 다리통증이 있을 때 자세를 바꾼다. 그러나 엉덩이 묵직함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결과 알람이 울릴 때까지는 고행이 되었다.
 
정주행(正走行)이라는 말이 있다. 에스엔에스에서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정주행이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연재되는 글이나 만화 또는 드라마나 영화의 시리즈물 따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봄”라고 설명되어 있다.
 
좌선 하면서 정주행을 생각해 보았다. 엉덩이 묵직함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자세를 바꾼다면 정주행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알람이 울릴 때까지 앉아 있는 다면 정주행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좌선을 정주행했다. 한시간 채운 것이다. 현재 단계에서 어떤 지혜나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고행하는 것처럼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은 몸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2023-08-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