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갈 데까지 가보자, 재가안거 4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3. 10:11

갈 데까지 가보자, 재가안거 4일차
 
 
지금 마음은 지극히 평온하다.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마음도 평온하다. 형광등은 켜지 않았다. 자연채광으로 들어 오는 빛이 평화롭다.
 
재가안거 4일차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안거 기간 동안 동참하기로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안거는 스님이나 한 줄 알았다. 재가안거는 특별한 사람이나 한 줄 알았다.
 
빤냐와로 대장로의 안거법회 법문을 듣고 발심했다. “나도 안거라는 것을 해볼까?”라는 마음을 낸 것이다. 큰 욕심 부리지 않는다. 그저 아침에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6시 5분에 배낭을 매고 모자를 쓰고 아파트를 나왔다. 걸어서 일터로 향했다. 늘 그렇듯이 코스는 동일하다. 비산사거리에서 이마트 안양점을 돈다. 경수산업대로를 건너면 이편한세상 아파트단지가 나타난다. 더 가면 안양천이 나타난다.
 

 
이른 아침이다. 안양천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깅하는 사람들도 있고 달리기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도 있다.
 
밥을 먹어야 한다. 아침에 먹을 것은 준비해 왔다. 감자와 계란을 가져 온 것이다. 감자는 한박스 샀다. 계란은 한판 사놓았다. 매일 아침 감자와 계란 한 개씩 가져 온다.
 

 
일터 냉장고에는 어제 먹다 남은 밤호박 조각이 있다. 마실 것은 꿀물이다. 꿀은 가성비가 좋다. 900그램 하나에 2만8천원가량 하는데 한번 사놓으면 보름 이상 먹는다. 아침을 먹을 때 알아차림 하며 먹어야 한다. 일상에서도 새김을 해야 한다.
 
아침을 먹었으니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다. 한시간 좌선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자신과의 약속이고 모든 사람과의 약속이다.
 
먼저 옷을 갈아 입었다. 양복바지를 벗고 추리닝바지로 갈아 입은 것이다. 추리닝바지는 무척 편하다. 한번 갈아 입으면 밖에 나가기 전까지는 계속 입고 있는다. 찾아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치 결전에 임하는 것이다. 한시간 좌선이라는 큰 일을 앞두고 마음가짐부터 단단히 챙겨야 한다. 먼저 몸을 풀어야 한다. 명상공간 매트를 돌았다. 빠른 걸음으로 돌았다. 그럼에도 “왼발, 오른발”할 때 알아차리고자 했다.
 
몸은 충분히 풀어 주어야 한다. 이완 해주는 것과 같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예비동작을 하는 것이다. 이는 좌선을 잘 하기 위한 것이다. 집중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경행만으로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행선을 해보기로 했다. 경행대에서 걸었다. 30센티 간격으로 표시를 해 놓은 경행대이다. 14보 된다.
 
행선할 때는 육단계 행선을 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를 말한다. 처음에 의도를 알아차린다. 그 다음에 여섯 단계를 차례로 알아차림 한다.
 
행선할 때 자꾸 뒤뚱거린다. 여섯 단계 행선을 해보지만 알아차림이 선명하지 못하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가면 좌선에서 알아차림이 수월하다.
 
암송을 하기로 했다. 암송이야말로 확실히 현재의 상태를 바꾸어 준다. 명상공간 매트 안에 있는 카페트를 오른쪽방향으로 돌았다. “땀 망 빠다나 빠히땃따~”하며 빠다나경(정진의 경, Sn3.2)을 암송했다.
 
빠다나경 25게송을 빠알리어로 암송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떠올랐다. 이렇게 암송하고 나면 집중이 된다. 암송하는 것 그 자체가 집중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 집중을 행선에 적용한다.
 
다시 행선을 했다.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암송으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가 선명해졌다.
 
자리에 앉았다. 이번 좌선은 잘 될까? 해보아야 안다. 스마트폰 알람을 한시간으로 설정했다. 7시 41분부터 좌선을 시작했다.
 
앉는 것도 전략이다. 요가매트 위에 앉았다. 엉덩이에 받치는 것 없이 앉았다. 두 다리는 최대한 사타구니쪽으로 붙였다. 그래야 안정적인 삼각대가 형성된다.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임을 알기에 경행을 하고, 암송을 하고, 행선을 했다.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갈 데까지 가 보기로 한 것이다.
 
명상하는 것도 요령이 있다. 배운 것을 응용해서 하는 것이다. 가장 기본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잘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집중이 잘 되는 경우 잘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때는 엉덩이의 ‘닿음’을 관찰하라고 했다.
 
호흡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고 허공을 응시하듯 가만 있으면 호흡이 보인다. 코끝을 보는 것은 아니다. 배를 본다. 때로 등 뒤에서 보일 때도 있고 가슴에서 보일 때도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배에서 보는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지 않으면 망상에 시달린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주의기울이지 않으면 그 틈을 헤집고 들어와서 집을 짓는다. 집을 허물 때 맥이 빠지고 힘이 든다. 다시는 집 짓게 하지 말아야 한다.
 
도중에 다리 저림이 왔다. 평좌한 왼쪽 다리가 묵직해졌다. 허리에도 통증이 왔다. 새김도 분명하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자세를 바꾸기로 했다. 스마트폰 알람을 보니 30분이 남았다. 다리를 서로 바꾸었다. 다리 저림이 있는 왼쪽 다리를 안으로 했다. 그리고 방석을 엉덩이에 댔다. 차량용 방석이다. 두께는 3센티가량으로 약간 딱딱한 것이다.
 

 
청소를 하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가구를 다시 배치하면 새로워진다. 자세를 바꾸니 기분이 전환되었다. 30분을 남겨 두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두 다리는 사타구니에 바싹 당기고 안정적인 삼각대를 형성했다. 허리는 최대한 곧게 폈다. 자연스럽게 가슴도 펴졌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이 되었다.
 
이번에는 방법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배의 부품을 관찰할 때 명칭을 붙여 보기로 한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초보자에게 명칭 붙이기를 권유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마하시사야도가 지은 것이다. ‘위빳사 수행방법론’ 5장에 따르면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부품-새김, 꺼짐-새김”하는 식으로 명칭을 붙이라고 했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명칭을 붙였다. 의도적으로 “부품-새김, 꺼짐-새김” 해 보았다. 그러나 명칭붙이기 보다 부품과 꺼짐이 더 빨랐다. “부품, 꺼짐”이라고 해야 따라갈 것 같았다.
 
배의 푸품과 꺼짐을 관찰하면 자동적으로 알아차림도 뒤따른다. 부품 했을 때 새김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호흡에 따라 “부품, 꺼짐”해도 이는 “부품-새김, 꺼짐-새김”이 되는 것이다.
 
붓토명상이라는 것이 있다. 태국명상법으로 알고 있다. 해보지 않았지만 명칭붙이기로 본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부품, 꺼짐”하며 명칭붙이기와 같은 것으로 본다.
 
배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부품-새김, 꺼짐-새김”하는 식으로 관찰한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자 집중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번뇌망상도 적어졌다. 설령 망념이 치고 들어와도 힘을 쓰지 못했다.
 
명상중에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는 망념과 다른 것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자각 또는 반조라고 할 수 있다.
 
명상중에 망념과 반조는 다른 것이다. 어떤 반조를 말하는가? 부품과 꺼짐 등을관찰하여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생겨 났을 때 경전이나 주석서에 있는 구절대로 반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법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괴롭지 않도록 할 수 없는, 괴로움의 무더기일 뿐이어서, 어떻게 주재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생겨나서는 즉시 사라져 가는 것일 뿐이다. 확고한 실체라고는 전혀 없다. 전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생겨나지 않도록 할 수도 없고 사라지지 않도록 할 수도 없어 주재하는 자아가 아닌 것일 뿐이다. 자기 성품에 따라 생멸하고 있는 고유성품일 뿐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64쪽)
 
 
명상을 하다 보면 경전에서 본 것이 떠오를 때가 있다. 논서에서 본 것도 떠오른다. 법문 들은 것도 떠오른다. 이런 것은 번뇌망상이 치고 들어 오는 것과 다르다. 자각과 반조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반조는 경전적 지식이 있을 때 일어나기 쉽다. 직접 체험한 것이 경전의 지식과 결합되었을 때 반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을 계속 관찰했을 때 무상, 고, 무아라고 반조하는 것은 경전적 지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명상중에 반조는 필요하다. 부품과 꺼짐, 닿음, 통증 등을 새길 때마다 때로 반조가 일어날 수 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생멸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라져 가는 것일 뿐이다. 무너져 가는 것일 뿐이다. 항상하지 않구나. 항상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구나”라고 숙고하고 반조하는 것이다.
 
명상은 앉아서 안온한 상태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체험한 것에 대한 숙고와 반조가 뒤따라야 한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계속해서 새겨 알던 정신과 물질들을‘원인인 정신과 물질들 때문에 생겨난다’라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이전 생, 과거에도 이러한 원인들 때문에 이러한 물질과 정신들만 생겨났었다’라고도, 또한‘다음 생, 미래에도 이러한 원인들 때문에 이러한 물질과 정신들만 생겨날 것이다’라고도, 또한 ‘개인,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없다. 창조자도 없다. 원인법들과 결과법들만 존재한다’라고도 반조하고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반조들도 새기고 나서 다시 원래 새기던 대상들만을 끊임없이 새겨가라.”(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83쪽)
 

 
반조는 경전적 지식이 적은 사람은 적게 생겨난다. 경전적 지식이 많으면 반조도 많이 생겨난다. 그러나 반조가 일어나면 “반조함, 반조함”하며 알아차려 한다는 것이다. 다시 본래 새기던 대상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한다. 다시 “부품, 꺼짐”하며 배의 움직임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한다.
 
자세 변경후의 30분은 변경전의 30분과 달랐다. “부품-새김, 꺼짐-새김”을 명칭 붙여서 관찰했다. 마치 승기를 잡은 자가 계속 밀어 부치듯이 나아갔다. 마치 오토바이 탄 자가 험한 길을 계속 주행하는 것처럼 밀고 나갔다.
 
자세는 좋았다. 두 다리를 사타구니로 바싹 붙여 안정된 삼각대를 형성하자 자세가 나온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는 뻐근했지만 오히려 시원했다. 곧게 편 허리가 뻣뻣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시원했다. “부품, 꺼짐”하며 계속 달리고 싶었다. 갈 데까지 가고 싶었다.
 
한번 자리를 잡고 달리기 시작하자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마음이 생겼다. 이런 기회를 놓치기 싶지 않았다. 계속 밀어 붙이고 싶었다. 갈 데까지 가 보는 것이다.
 

 
사륜구동차가 거친 오프로드를 질주하듯이, 한번 시동이 걸린 승용차가 뻥 뚫린 고속도로를 주행하듯이 달렸다.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다리의 뻐근함과 허리의 뻣뻣함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계속 이렇게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종이 쳤다. 스마트폰 알람이 울린 것이다. 시계를 보니 8시 41분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다.
 
 
2023-08-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