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꽁꽁, 재가안거 3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 11:40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꽁꽁, 재가안거 3일차
 
 
오늘도 승리자가 되었다. 한시간 좌선을 마쳤기 때문이다. 이제 재가안거 3일차이다. 안거가 마칠 때까지 90회 가량 좌선을 해야 한다. 하루도 멈출 수 없다.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오로지 앞으로만 가는 황소가 끄는 수레가 되고자 한다.
 
한시간 좌선을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욕심으로 앉아서는 안된다. 주변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좌선은 실패하기 쉽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페이스북을 봐서는 안된다. 카톡이나 밴드를 봐서도 안된다. 당연히 신문, TV, 유튜브를 봐서도 안된다. 좌선에 영향을 준다. 격정에 휩싸이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일터에 와서는 이메일을 열어 봐서는 안된다. 주문 온 것이 있을 때 그 생각으로 명상이 되지 않는다. 당장 처리해야 할 메일을 봤을 때는 그 일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방석에 앉을 수 없다.
 
아침식사도 좌선에 영향을 준다. 식사 후에 곧바로 앉아서는 안된다. 소화가 좌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가능하면 적게 먹어야 한다. 식사후 30분 이상 되었을 때 들어가는 것이 좋다.
 
좌선 전에 경행 하는 것이 좋다. 몸을 풀어 주는 것이다. 경행이 끝나면 행선으로 간다. 행선으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앉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첫 좌선은 실패하기 쉽다. 아무리 준비가 잘 되었어도 몸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번뇌망상에 시달리다가 그만 두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좌선은 두 번째 시행 했을 때 가능하다. 첫 번째 좌선은 몸풀기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이와 시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방석에 누워서 와선을 하는 것도 좋다. 잠시 잠이 들면 최상의 조건이 된다.
 
한시간 좌선을 하기로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목표달성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해야 한다. 한시간 알람설정이 울리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평좌를 했다. 두께가 10센티 되는 푹신한 방석에서 평좌를 한 것이다. 방석은 엉덩이만 걸쳤다. 두 발은 바닥에 놓았다. 허리는 곧게 폈다. 허리를 펴면 자연스럽게 가슴도 펴진다.
 
호흡을 찾아야 한다. 억지로 배의 움직임을 봐서는 헤매기 쉽다. 이럴 때는 허공을 바라 보아야 한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허공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1초도 안되어서 호흡이 보인다. 배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이다.
 
배의 움직임을 포착하면 따라가야 한다. 부품과 꺼짐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를 지속적으로 지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집중이 생긴다.
 
지금으로부터 14년전의 일이다. 그때 위빠사나 선원에 있었다. 법사는 호흡을 보라고 했다. 호흡을 어떻게 보는지 몰랐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코의 호흡을 보라는 것은 아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보라는 것이다.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가장 강력한 대상은 호흡이 된다. 눈을 감고 가만 있는 상태에서 호흡이 가장 강한 것이다. 가장 강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을 보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망상에 시달릴 것이다. 명상할 때는 오로지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는데, 그 마음의 문으로 온갖 생각이 들어 오는 것이다.
 
도중에 자세를 한번 바꾸었다. 이번에는 왼쪽 다리가 저려 오는 것이었다. 앉는 방법이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방석이 너무 두꺼운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방석 두께가 얇다. 두께가 1-2센티 정도 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처럼 두꺼운 방석이 없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두께 10센티 되는 방석을 치웠다.
 
바닥에 앉았다. 두께가 1센티가량 되는 요가매트에 앉았다. 다리는 요가매트 아래에 위치했다. 사실상 바닥에 앉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 상태에서 평좌를 했다.
 
자세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자세는 결가부좌일 것이다. 결가부좌로 앉아 보고자 했다. 양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러나 5분 앉아 있기 힘들다. 이 상태에서 두 발을 아래로 했다. 그랬더니 평좌가 되는 것이었다!
 
평좌는 가부좌가 변형된 것이다. 두 다리를 꼬은 상태에서 꼬은 발만 아래로 내려 놓은 것이다. 새삼 알게 된 것이다.
 
평좌를 제대로 하려면 다리가 벌어지면 안된다. 두 다리를 바싹 안으로 잡아 당겨야 한다. 마치 결가부좌하는 것처럼 안으로 잡아 당기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가장 안정적이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알람설정을 한시간으로 해 놓고 앉는다. 마치 고속도로를 주행하듯이, 앉은 상태에서 한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망상에 빠지기 쉽다. 이를 방지하려면 사띠가 확립되어야 한다. 사띠가 확립되면 잡념이 들어와도 힘을 쓰지 못한다. 망념의 집을 짓는 일은 없다.
 
어떻게 해야 사띠를 확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꽁꽁 묶어 두는 것이다. 그러면 새김의 밧줄 길이만큼만 행경(고짜라)이 생겨날 것이다.
 
마음을 대상에 딱 붙이면 사마타가 된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틈이 있다. 사띠의 밧줄만큼이나 간격이 있는 것이다. 이 간격이 있기 때문에 자각이 있고 반조가 있다.
 
명상 중에 자각과 반조는 번뇌망상과 다른 것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는 오래 된 것도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그 기억이 사념의 집을 짓지는 않는다. 오히려 관찰이 잘 되도록 도움을 준다.
 
명상 중에 어제 읽었던 논서가 기억이 났다. 호흡관찰 수행에 대한 것이다. 명상하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내용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새기면서 새김, 삼매, 지혜가 예리해지고 힘이 구족되면 ‘배의 부품’이라고 하는 물질과 ‘부푼다’하며 새기는 마음, ‘배의 꺼짐’이라고 하는 물질과 ‘껴진다’하며 새기는 마음, 앉아 있는 물질 과 그것을 새기는 마음, 굽히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펴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드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나아가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내려놓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이러한 등으로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계속해서 쌍을 이루면서 마치 붙어 있는 것처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8쪽)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위빳사나 지혜의 향상’에 대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 했을 때 새김이 있게 된다. 이는 물질과 정신에 대한 것이다. 배의 부품은 물질적 현상이고, 이를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그래서 배의 부품-새김, 배의 꺼짐-새김이 쌍으로 있게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반드시 좌선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가능하다. 팔을 굽혔을 때 이를 아는 마음도 위빠사나 관찰에 해당된다. 팔을 굽히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굽히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아는 것이 위빠사나 지혜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경전의 지식이나 논서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경전을 읽지 않아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 경전지식이 없어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은 항상 쌍으로 존재한다. 명상 중에 볼 수 있는 부품과 새김, 꺼짐과 새김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두 가지일 뿐이다. 여자, 남자라고 하는 것도 이 두 가지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어떤 개인, 중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새기는 중에 이해하여 결정할 수 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9쪽)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개념에서 해방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쌍으로 되어 있는 물질과 정신 현상을 관찰하다 보면, 나, 여자, 남자, 중생, 신과 같은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경전지식이 없어도 된다. 다만 경전지식이 있으면 좀더 깊이 있게 파악된다. 경전지식이 없는 사람은 단지 부품-새김, 꺼짐 새김 정도로 지혜가 생겨나지만, 경전지식이 있는 사람은 토대로서의 물질과 새기는 정신, 이 둘만 새길 때마다 경험하여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경전과 논서 지식이 있는 수행자는 오로지 “새길 때 새겨 알아지는 물질과 새겨 아는 정신, 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라고 알게 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아는 지혜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 16단계 지혜 중에서 제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물질과 정신만을 개인, 중생, 남자, 여자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명칭일 뿐이다. 사실은 개인 중생, 여자, 남자라고 하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새겨 알아 지는 물질과 [새겨 아는] 정신의 성품만 존재한다’라는 등으로 이해하고 반조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한 반조들도 계속해서 생겨날 때마다 ‘반조함, 반조함’이라고 새긴 후 부품과 꺼짐 등 원래 새기던 대상만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새겨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80쪽)
 
 
명상 중에도 자각 할 수 있다. 또한 명상 중에 반조할 수 있다. 이런 자각과 반조는 번뇌망상과 다른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일어나는 자각과 반조는 위빠사나 지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자각이나 반조 마저 그치라는 것이다.
 
명상중에 부품-새김, 꺼짐-새김을 관찰했을 때 오로지 물질과 정신적 현상만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를 확장하여 일상에서도 굽힘-새김, 앉음-새김 등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을 때 역시 물질과 정신의 성품만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이는 다름아닌 생멸이다.
 
정신과 물질은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에 집착할 것이 없다. 이는 위빠사나 지혜에 해당된다. 우리 몸과 마음이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어 있고, 정신과 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났을 때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자, 남자, 중생, 창조주는 단지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인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이 명상중에 반조로 나타났을 때 위빠사나 지혜가 있게 된다. 그런데 그런 반조에서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다.‘반조함’이라고 새기면서 다시 배의 부품과 꺼짐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항상 호흡으로 돌아 오라는 것이다.
 
재가안거 3일차이다. 오늘도 한시간 명상을 했다. 안거가 끝나려면 90일 남았다. 이제 시작이다. 지금은 몸 만들기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명상을 생활화 하는 것이다.
 
명상을 생활화 하려면 먼저 주변 정리를 잘 해야 한다. 명상에 방해 되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명상을 잘 할 수 있도록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평좌가 가장 좋다. 바닥에 앉아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명상은 사띠의 확립에 달려 있다. 사띠가 확립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눈을 감고 허공을 바라 보았을 때 금방 호흡이 보인다. 그 호흡을 대상으로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다.
 
호흡관찰이 잘 안될 때가 있다. 사띠가 확립되지 않을 때 포기하고 싶어 진다. 이에 청정도론에서는 “수행을 포기하지 말고 물질만으로도 거듭해서 사유하고,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파악하고 판별해야 한다.”(Vism.18.15)라고 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점차로 물질이 분명하게 얽힘이 없이 선명하게 드러남에 따라서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비물질적 사실도 자명하게 드러난다.”(Vism.18.15)라고 했다.
 
명상 중에는 부품-새김, 꺼짐-새김 식으로 관찰해야 한다. 선명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거듭관찰하다 보면 마치 흙탕물이 맑아 지는 것처럼, 더러운 거울을 닦는 것처럼 새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함으로 인하여 새김이 확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로지 물질과 정신적 현상만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한시간 앉아 있으려면 사띠를 확립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마음을 호흡에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꽁꽁 묶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새김의 길이만큼만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자각을 하고 반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2023-08-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