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불타는 세상, 재가안거 5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4. 12:47

불타는 세상, 재가안거 5일차
 
 
오늘은 자리에 늦게 앉았다. 오전 10시 가까이 되어서 일터에 도착했다. 새마을금고에 맡긴 것을 갈아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이율이 높을 때 7개월 맡겼는데 기간이 다 된 것이다. 맡긴 곳이 3등급이라 1등급을 찾다 보니 산본점에 이르게 되었다.
 
재가안거 5일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기로 했다. 나에게 있어서 안거는 한시간 의무적으로 앉아 있는 것이다. 한시간 동안 망상을 피워도 상관 없다. 매일 의무적으로 앉아 있다 보면 길이 들 것이다.
 
자리에 10시 8분에 앉았다. 이전에 예비동작을 취했다. 행선대에서 육단계 행선을 했다. 그러나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비상처방을 해야 한다.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카페트를 돌며 천천히 뜻을 새기며 암송했다. 잘 올라 왔다. 하나도 빠짐없이 놓치지 않고 암송했다. 오분정도 걸린 것 같다. 행선도 하고 암송도 했으니 어느 정도 집중이 이루어졌다.
 
이제 앉아야 한다. 평좌를 했다. 방석은 낮은 것을 사용했다. 눈을 감고 허공을 응시했다. 가만 있으면 호흡이 잡힌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다.
 
좌선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잡고 있으면 이런 망상은 생겨나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대상에 가 있다. 오늘 아침에 글 쓰다 만 것을 생각했다.
 
오늘은 아침에 일찍 일터에 가지 않았다. 새마을금고에 가야 했기 때문에 집에 오전 8시 반까지 있었다. 금고에서는 9시부터 영업이 시작된다.
 
아침에  시간이 남았다. 오전 6시 반부터 8시 반까지  2시간 시간이 남은 것이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읽은 인상적인 구절이 생각났다. 꼭 글로서 남기고 싶었다. 이는 불타는 세상에 대한 것이다. 방에서 스마트폰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 이 말은 중학교 때 접했다. 몇 학년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중학교 일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불교시간에 부처님 일생을 배우고 있었다.

중학교를 불교학교에 배정 받은 것은 행운이었다. 소위 뺑뺑이로 가게 된 곳은 그때 당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이었다.

학교는 멀었다. 미아6동에서 종로5가 방향 쪽에 있던 연지동까지는 버스로 30분이상 가야 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삼년 다녔다.

나에게 불교는 자연스럽게 다가 왔다. 다녀 보니 불교학교였던 것이다. 거부감은 없었다. 불교시간도 자연스러웠다. 음악선생은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노래로 가르쳐 주었는데 저항 없이 따라 불렀다. 하얀 도화지와 같은 마음에 불교가 선점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 지우기 힘들다. 하얀 도화지와 같은 마음에 불교가 자리 잡았을 때 다른 것이 들어 올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그랬다.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종로구 혜화동에 있었던 K고는 전통이 90년이 되었다. 고1 때 90주년 행사를 했다. 교훈은 ‘기독적 인격’이었다. 일주일 내내 예배가 있고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이를 거부했다. 고교 삼년을 방황속에서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 부처님 일생부터 배웠다. 생, 노, 병, 사 등 무거운 주제를 접했다. 교법사라 불리우는 불교선생은 조용길 선생이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알고 보니 동국대 교수가 되어 있었다.

조용길 선생은 부처님 같았다. 흰 얼굴에 이마가 훤칠하고 반곱슬머리였다. 한눈에 보아도 귀공자 타입, 귀티 나는 얼굴이었다. 아마 나이가 서른살정도 되는 총각 같았다.

중학교 일학년 때 불교를 스폰지처럼 빨아 들였다. 교법사가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인 것이다. 어느 날 조용길 선생은 흰 쥐와 검은 쥐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며 설명해 주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도대체 답이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넓은 들판을 걸어 가고 있었다. 사람도 없고 마을도 없는 들판이었다. 그때 뒤에서 무서운 코끼리(象)가 쫓아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우물을 발견했다.
 
그 우물 속으로 등(藤)나무 넝쿨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그네는 등나무 넝쿨을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우물 밑에는 독룡(毒龍)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또 우물 중턱에는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그네는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두 팔은 아파서 빠지려고 했다.
 
그런데 매달려 있는 그 등나무 넝쿨 위에는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그 등넝쿨을 갉아 먹고 있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갉아서 끊어지거나 또는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나그네는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벌(蜂)집 속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나그네 입 속으로 들어왔다. 나그네는 꿀방울을 빨아 먹는 동안에 자신의 위험한 처지도 다 잊고 황홀경(恍惚境)에 빠져 있었다.”(岸樹井藤, 출처:인터넷)
 
 
안수정등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중1 어린 마음에 세상에 대한 것이 어렴풋하게 인식되었다. 결국 인생이란 것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갑갑했었다.
 
불교 교과서 부처님의 일생에서 접한 것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 이 말이 이해 되지 않았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불교를 접했다. 처음 접한 불교는 전혀 접해 보지 못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중학교 1학년 머리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화두처럼 지니고 살았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불교는 잊어 버렸다. 그리고 수십년 세월이 흘렀다. 다시 불교를 접한 것은 나이가 40대 중반 되었을 때이다.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틀림없이 불교에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살다보면 파란곡절을 겪는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힘이 들 때 한계를 절감한다. 문제에 대한 해법은 없는 것일까? 중학교 다닐 때 불교를 떠올려 보았다.

 
순수의 시대에 받아 들인 불교는 마음 한켠에 오랜 세월 자리잡고 있었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불교를 다시 생각했다.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다시 접하고자 한 것이다.

불교를 어디서 배워야 할까? 절에 가면 불교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삼막사를 찾아 갔다. 기념품 파는 종무원에게 “불교를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중년 여인은 “우리 절은 기도도량이에요. 불교를 배우고 싶다면 포교당에 가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광명시에 있는 금강정사를 소개 시켜 주었다. 그때가 아마 2003년 이었던 것 같다.

절에 가면 불교를 배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도심 포교당에 가야 하는 것이었다. 안양에서 광명은 너무 멀다. 삼막사 가는 길 입구에 있는 한마음선원을 마음에 두었다. 거기에 가면 불교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용기를 내서 한마음선원에 갔다. 절은 처음 가보았다. 일요일이라 일요법회가 있었다. 영상법회도 했다. 법회가 끝나자 새로 온 사람은 남으라고 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이 칠팔명 되는 사람들에게 절 소개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이지 않았다. 여기도 아닌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나이가 사십이 넘자 다급해졌다. 빨리 불교를 접해야 했다. 불교만 접하면 내가 고민하던 것에 대한 답이 다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땅한 절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능인선원이 포착되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 결과 2004년 3월에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하게 되었다.

불교교양대학 다닐 당시 직장은 성남시 야탑동에 있었다. 선원은 서울 강남 포이동에 있었다. 저녁반이라 차로 이동해야 했다. 다행히도 직장에서는 내가 최고 책임자였다. 명색이 작은 회사 연구소장이었던 것이다. 사장은 충남 아산공장에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 시간 내는 것은 가능했다.

처음에는 그저 듣기만 했다. 제일 뒤에 앉아서 어떤 말 하는지 보기만 한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자만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선원장 스님이 말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마치 코미디언이 원맨쇼하는 것처럼, 마치 가수가 리사이틀하는 것처럼,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받아 적었다.

법당은 무척 컸다. 과장해서 말하면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만큼 넓직했다. 법당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역별로 앉았다. 강남1, 강남2, 강북, 수도권으로 대분류 되었다. 수도권은 성남, 안양, 등으로 소분류 되었다. 안양지역 사람들은 불상을 바라보고 우측에 앉았다. 항상 가장 뒤에 앉아서 들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 있었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불교교양대학 가는 날이었다. 화요일은 원장스님이 강의했고 목요일은 동국대 교수가 강의했다. 처음에는 방관자적 자세를 가졌다. 듣다 보니 들을 만 했다. 익숙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 배운 것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불교교양대학에서도 부처님 일생부터 가르쳤기 때문이다.

동국대 교수는 아함경을 가르쳤다. 자신이 편역한 아함성전을 교재로 한 것이다. 그러나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다.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불교와 관련된 것이다.

불교교양대학은 4개월 다녔다. 6월이 되자 졸업했다. 연비를 하고 계도 받았다. 법명도 받았다. 법명은 ‘성공(聖供)’이다. 성인 성자에다 받들 공자이다. 성공이라는 말이 좋았다. 어쩐지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불교교양대학을 졸업했. 그렇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경전공부 과정이 있었다. 9월부터 금강경 공부가 시작되었다.

능인불교대학에서는 금강경 공부까지만 다녔다. 이후에는 스스로 공부했다. 블로그를 만들어 좋은 글은 저장해 놓았다. 2006년부터는 블로그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초기불교와 접하게 되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수많은 검색이 이루어졌다. 어느 날 어느 사이트에서 얼굴이 매우 익숙한 교수를 접하게 되었다. 눈매가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강의 스타일도 낯 익었다. “어디서 보았더라?”라며 의문하다가 이름을 보게 되었다. 동국대 교수 조용길이라는 이름이 들어 왔다. 2004년 능인불교대학에서 목요일에 강의한 그 교수였다. 중학교 때 바로 그 불교선생이었다!

불교교양대학 다닐 때 왜 조용길 교수를 못 알아 보았을까? 아마 그것은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명 되는 인원에서 가장 뒷자리에 앉다 보니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조용길이라는 이름도 잘 다가오지 않았다.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교법사와 동국대 교수는 다른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조용길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중학교 때는 서른 살 정도였는데 60대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 불교선생을 불교교양대학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것도 인연일까? 중학교 때 불교선생은 부처님처럼 보였는데 세월이 흘러서 교수가 된 선생의 모습은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불타는 세상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부처님은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라며 의문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사회생활 할 때도 문득문득 생각났다.

마침내 의문이 풀렸다. 그것은 니까야를 보았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경’(S35.28)에 답이 있었다. 부처님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이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산천초목삼라만상의 세상은 아니다.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이 만들어 낸 세상이다. 이를 일체(sabba)라고도 한다. 자신이 만든 세상이다. 탐, 진, 치의 세상이다.

불타는 세상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썼다. 그때마다 탐, 진, 치는 윤회의 땔감이라고 했다.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 했을 때 탐, 진, 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데, 우빠다나(執着)에 대하여 윤회의 땔감으로 본 것이다.

탐욕을 내면 낼수록 탐욕의 불은 거세게 타오른다. 분노와 어리석음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윤회의 땔감이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며칠 전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읽다가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땔감 열 짐, 땔감 스무 짐, 땔감 서른 짐, 땔감 마흔 짐으로 큰 불꽃더미가 타오를 때, 어떤 사람이 때때로 마른 풀들을 던져 넣고 마른 쇠똥을 던져 넣고 마른 나무를 던 져 넣으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러한 연료와 땔감을 가진 큰 불꽃더미는 오랜 시간 동안 타오를 것이다.”(S12.52)


불은 땔감이 있어야 타 오른다. 땔감이 계속 공급되어야 계속 타오른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커다란 불꽃더미는 세 가지 윤회의 세계[三界]를 말하고, 불을 지피는 자는 거기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범부를 말하고, 그가 불꽃에 연료를 집어넣는 것은 갈애 때문에 여섯 감역을 통해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Srp.II.82)라고 설명되어 있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 자신의 여섯 감역에서 만들어 내는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집착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서 즐거움을 보는 자에게 갈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 난다.”(S12.52)라고 했다.
 
삶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삶을 살다 보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 끝은 절망이다. 죽음은 곧 절망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탐욕의 불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생에서도 계속 타오른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연료와 땔감을 가진 큰 불꽃더미는 오랜 시간 동안 타오를 것이다.”(S12.5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세상이 불타는 원리에 대하여 알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불을 꺼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큰 불꽃더미가 타오를 때 새로운 연료를 넣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최초의 연료가 다 떨어져도 다른 것이 채워지지 않는 불꽃더미는 땔감도 없고 연료도 없어 꺼져버릴 것이다.”(S12.52)라고 했다.
 
불은 연료가 계속 공급되어야 타오른다. 연료공급이 중단되면 결국 불은 꺼져 버릴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불 끄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은인이 와서 그 사람에게 불을 끄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그는 그 충고를 따를 수 있다. 은인이 부처님이고 충고가 바로 수행의 주제에 대한 설명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이다. 그 사람이 그 가르침을 따를 때가 수행자가 빈 방에서 앉아서 윤회의 세계를 통찰하는 때이다. 그 사람이 목욕하고 자신을 치장하고 고요히 행복하게 앉아 있을 때가 수행자가 여덟 가지 고귀 한길[八正道]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을 목표로 하는 여러 경지에 드는 때이다. 불꽃더미가 꺼졌을 때가 아라한의 존재의 다발이 부서져 남김없는 열반[無餘涅槃]의 완전한 열반에 드는 때이다.”(Srp.II.82-83)
 
 
부처님은 불 끄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팔정도로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을 끄는 것이다. 부처님이 알려 준 방법대로 명상 주제를 잡아서 빈 방에 앉아 윤회의 세계를 통찰 할 때 불은 꺼질 것이라고 했다.
 
일터에 있는 명상공간에 앉았다. 한시간 좌선하는 것이 목표이다. 좌선한지 30여분이 지났을 때 다리가 뻐근하고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이미 번뇌망상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때는 기분 전환을 해야 한다. 자세를 바꾸어 주는 것이다.
 
평좌한 자세를 바꾸었다. 왼쪽 다리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20여분 남은 시간에 전력투구하기로 했다. 번뇌망상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눈을 감은 채 허공을 응시하자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 잡은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명칭을 붙여 가며 부품과 꺼짐을 봤다. 여기에 닿음도 보았다. 엉덩이의 닿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품-새김, 꺼짐-새김, 닿음-새김”이 되었다.
 
명칭을 붙여 가며 계속 관찰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품과 꺼짐만을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명칭을 붙이지 않았다. 이렇게 부품과 꺼짐을 계속 보고 있으니 번뇌망상은 들어 오지 않았다.
 
배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그러다 보니 몸이 가벼워졌다. 통증도 없어졌다. 몸이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졌다. 번뇌망상이 없으니 마음도 가벼워졌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한시간으로 설정된 알람이 울려져 그만 두었다.
 

 
요즘 저녁 때가 되면 노을이 벌겋게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노을을 볼 때마다 세상이 불탄다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보는 노을은 세상이 불탄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시각, 청각 등 여섯 감각영역에서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타고 있는 것이다.
 
중학교 때 세상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십년 세월이 흘러서 알게 되었다. 그것도 니까야라는 초기경전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집착이었다. 집착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를 것이다.
 

 
탐, 진, 치라는 연료가 공급되는 한 세세생생 불에 탄다. 세세생생 어떤 존재로 태어나서 절망으로 귀결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읽다 보니 ‘연소의 경’(S35.28)의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했다.
 
경전은 필요한 부분만 읽어서는 안된다. 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석까지 모두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귀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집착의 경’(S12.52)을 읽었을 때 환희했다. 중학교 때 의문했던 것이 이 경으로 인하여 풀린 것이다. 수십년 된 화두가 타파된 것 같다.
 
 
2023-08-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