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가안거 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6. 11:42

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가안거 7일차
 
 
요즘 안거 중에 있다. 스스로 재가안거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스님들이 선방에서 안거하는 것처럼 재가불자도 세상 속에서 안거해 보자는 것이다.
 
안거를 하다 보니 여러 이점이 있다. 첫째, 안거를 하다보니 생활이 매우 건전해진다. 오전에는 명상으로 보내기 때문에 건전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욕망, 분노, 들뜸 등 불선법이 있다면 5분도 앉아 있기 힘들다,
 
둘째, 안거를 하다보니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먹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가장 크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 기름진 것을 피한다. 좌선 중에 허리를 꼿꼿하게 하며 한시간 버티기를 하다 보니 허리도 좋아 진 것 같다. 전반적으로 건강이 좋아 졌다.
 
셋째, 안거를 하다 보니 긍정적 사고방식이 지배한다. 물질과 정신적 현상을 관찰하다 보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역시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도 차분하게 된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안거에 들어간 자는 일요일이 있을 수 없다. 스님들이 선방에서 일요일이라 하여 쉬는 것은 아니다. 재가자의 안거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약간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새벽에 에스엔에스를 열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전에 한시간 좌선을 목표로 한다. 이번 안거기간은 몸만들기에 있다고 보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시간 앉아 있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스마트폰을 열어 보지 않는 것이다.
 
뉴스를 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TV도 보지 않는다. 한시간 좌선을 위해서는 당연히 스마트폰도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보았을 때 들뜸이나 격정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 새벽 스마트폰을 열어 보았다. 카톡방에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렸다. 칭찬하는 글이다. 내 글에 대한 칭찬의 글은 아니다. 약간 서운했다. 이는 불교교양대학 동기 카톡방에서 찬탄을 접한 것과 대조적이다. 많이 배운 사람들, 지위가 있는 사람, 명예가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 것일까?
 
사무량심에 무디따(mudita)가 있다. 이는 ‘기뻐함’ 또는 ‘함께 기뻐함’으로 번역된다. 이는 다름 아닌 수희찬탄(隨喜讚嘆)이다. 타인의 성공과 번영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희찬탄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슬픔은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쁨은 함께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백권 책 만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 그 사람 것이다. 어떤 작가는 노고를 치하하며 ‘백권당(百卷堂)’이라는 사무실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백권당, 참으로 좋은 이름 같다. 사무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그래서 현판을 만들기로 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현판을 쳐 넣었다. 곧바로 제작 업체를 찾을 수 있었다. 조만간 사무실 출입문 바깥 벽에 백권당 현판이 걸려 있을 것이다. 사무실은 백권의 산실이다.
 
카톡을 보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시당한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그러나 군자는 ‘누가 알아 주지 않더라도 게의치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빨리 부정적인 마음을 씻어 내고자 했다. 가장 좋은 것은 경전을 보는 것이다. 마치 쐐기의 원리와 같다.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쳐서 없애는 것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밀어내는 것과 같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를 읽었다. 매일 조금씩 읽고 있다. 아들고기의 경이 눈에 들어 왔다. 수없이 글에 인용한 경전이다. 그럼에도 오늘 다시 읽어 보니 더 크게 다가 왔다.
 
아들고기의 경은 윤회하는 삶에 대한 것이다. 이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네 가지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식사, 접촉의 식사, 의도의 식사, 의식의 식사를 말한다. 이 중에서 오늘 마음에 가장 와 닿은 것은 의도의 식사에 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의도의 자양이란 어떻게 져야 되는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사람의 키보다 큰 숲 불화로가 있어 연기가 나지 않으면서 작열하는 불로 가득 차 있을 때, 삶을 바라고 불사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이 힘센 두 남자에 의해 두 손을 잡혀 숯불화로 가까이 끌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 사람의 의지, 그 사람의 희망, 그 사람의 소원과는 거리가 먼 것일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이와 같이 ‘내가 숯불화로에 떨어지게 되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의도의 자양은 이와 같이 여겨져야 된다고 나는 말한다.”(S12.63)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바란다. 또한 죽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삶을 바라고 불사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S12.63)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행복을 바라고”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행복을 말한다. 안양에 행복투어 왔을 때 들은 바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복을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말한 행복은 궁극적 행복이다. 열반의 행복을 말한다. 그런데 열반의 행복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에서 행복은 느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느껴질 수 없기 때문에 전정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행복감이다. 이는 느낌에 대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느낌이 행복감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행복도 결국 괴로운 것이 된다. 왜 그런가? 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행복은 오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가지 않아 불만족이다. 불만족인 것은 괴로움의 범주에 해당된다. 그래서 그 어떤 느낌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범부들이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삶을 바라고 불사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S12.63)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범부는 죽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여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범부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의도하기 때문이다.
 
의도는 네 가지 식사에 해당된다. 아들고기의 경에서 사식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영분이 있다.”(S12.63)라고 했다. 그 네 가지 자양분 중에 의도의 자양분이 있다.
 
의도의 자양분은 의도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의도를 가진 행위를 하면 윤회를 위한 식사가 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숯불화로의 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큰 숲 불화로가 있어 연기가 나지 않으면서 작열하는 불로 가득 차 있을 때, 삶을 바라고 불사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이 힘센 두 남자에 의해 두 손을 잡혀 숯불화로 가까이 끌려왔다.”(S12.63)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숯불구덩이는 윤회 하는 존재의 세계[三界]를 말하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윤회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범부이고, 두 힘센 사람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하고, 두 사람이 그를 붙잡아 숯불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은 범부의 행위가 무르익어 다시 태어남으로 이끌어지는 것을 말한다.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겪는 고통은 윤회의 고통을 말한다.”(Srp.II.112-113)
 
 
경전은 주석을 보아야 한다. 각주에 있는 주석을 읽어야 읽는 맛이 난다. 단지 경전만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놓치기 쉽다.
 
주석에 따르면 숯불구덩이는 삼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말한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화택의 비유가 연상된다. 이 세상을 숯불구덩이와 같다고 말한 것은 불타는 세상과 같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이는 연소의 경에서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범부의 특징은 무엇일까?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다. 이는 “삶을 바라고 불사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S12.63)을 말한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은 범부이다. 왜 그런가? 행복하기를 바라면 윤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윤회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범부”(Srp.II.112-113)라고 했다.
 
살기를 바라고, 죽지 않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범부의 운명은 어떤 것일까?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의도적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와 착하고 건전한 행위”라고 했다. 악업도 윤회로 몰아 가고, 선업도 윤회로 몰아 간다. 경에서는 악업과 선업에 대하여 “힘센 두 남자”라고 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열반이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삶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의도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 것이다.
 
악업을 지으면 악처에 떨어진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를 말한다. 선업을 지으면 선처에 태어난다.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남을 말한다. 누구나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범부는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는 천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선업도 짓지 말아야 한다.
 
법화경 화택유를 보면 삼계가 화택이라고 한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상은 불타는 집이라는 것이다. 불타는 집에 사는 사람들은 범부들이다. 범부는 자신의 만든 연료로 살아 간다. 탐욕의 연료, 성냄의 연료, 어리석음의 연료를 말한다.
 
연료는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한다. 이 생뿐만 아니라 다음생도 불로 타오르게 한다. 이와 같은 탐, 진, 치의 불은 의도에 따른 것이다. 의지와 의도에 따른 행위를 했을 때 현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식사가 되는 것이다.
 
아침에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읽었다. 아들고기의 경을 읽고 나자 들뜬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다. 명상을 앞두고 스마트폰을 열어 볼 일이 아니다.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보았을 때 들뜸과 흥분이 있어서 명상에 영향을 준다.
 
일터에 7시에 도착했다. 오늘 일요일임에도 일터에 나온 것이다. 자영업자, 개인사업자, 일인사업자는 주말이 없다. 언제나 월, 화, 수, 목, 금, 금, 금인 것이다. 안거에 들어간 자 역시 주말이 있을 수 없다. 일요일이라 하여 한시간 좌선을 쉬는 것은 아니다.
 
한시간 좌선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비수행을 하는 것이다. 경행과 행선을 해서 몸을 풀고 어느 정도 집중을 유지해야 한다.
 
사무실에 행선대를 만들어 놓았다. 30센티 간격으로 열네 개의 표시를 해 놓았다. 행선할 때 보폭을 계산 하여 만든 것이다. 길이는 4.2미터이다.
 

 
명상한다고 하여 곧바로 앉지 않는다. 충분히 행선을 한 다음에 앉는다. 육단계 행선을 한다. 바닥이 딱딱해서일까 착착 달라 붙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집중이 잘 되게 하려면 몸과 마음을 변형해야 한다. 어떻게 변형해야 할까? 최근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행선 중에 서 있을 때이다.
 
행선중에 방향을 바꾸어 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일단 멈춘다. 그렇다고 “획”하고 돌아서면 안된다. 천천히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더 좋은 것은 멈춘 상태에서 가만 있는 것이다.
 
멈춘 상태에서 가만 있는 것도 수행이다. 이를 입선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위빠사나 스승들은 서 있을 때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느낌을 보라고 한다. 이를 ‘스캔한다’라고 말한다.
 
행선 하다 멈추어 섰을 때 스캔하고자 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마음이 앞서서 빠르게 행한다. 너무 빠르게 하다 보니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이는 진정한 스캔이 아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머리, 이마, 눈, 코, 턱, 목, 가슴, 윗배, 배꼽, 아랫배, 엉덩이, 허벅지, 무릎, 장딴지, 발목, 발바닥 순으로 내려 가는 것이다.
 
스캔 할 때 눈과 코, 입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턱, 목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가슴과 배는 잘 느껴진다. 호흡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을 엉덩이, 허벅지로 내린다. 마치 꿀룩꿀룩 파도치며 넘어가는 것 같다. 발에 이르렀을 때 발바닥 감촉으로 끝난다.
 
스캔을 제대로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천천히 느낌을 관찰하면서 마치 스캐너가 스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스캔은 세 번 한다.

스캔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만 날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 언젠가는 능숙하게 될지 모른다.

 
행선하기가 쉽지 않다. 방향전환할 때 멈추어 서게 되는데 이때 스캔해야 한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느낌을 천천히 스캔하면 집중이 된다.
 
스캔으로 형성된 집중이 있다. 이 집중을 육단계 행선에 적용하면 새김(사띠)이 분명해진다. 발이 착착 바닥에 붙는 것 같다. 발을 떼고 밀 때는 경쾌한 느낌이다. 이처럼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가야 한다.
 
행선을 마쳤다. 20여분 걸렸다. 이제 자리에 앉아야 한다. 방석에 앉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경을 암송하면 집중이 더 해진다. 빠나다경(정진의 경, Sn3.2)을 암송했다. 부처님이 성도과정에서 악마와 싸워 이긴 승리의 경이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앉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처음부터 세 개 밀어 붙이고자 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선과 암송으로 어느 정도 집중이 되었다. 이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와야 한다. 그냥 앉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무엇보다 빠다나경을 암송하면서 부처님의 피나는 정진을 새기는 것이다.
 
 
“Nadīnamapi sotāni, aya vāto visosaye;
Kiñca me pahitattassa, lohita nupasussaye.”
 
이러한 정진에서 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차 마르게 할 것이다.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는 나에게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Stn.435)
 
 
평좌를 하고 앉았다. 오늘 행선을 의미있게 해서인지 집중은 잘 되는 편이었다. 번뇌와 망상도 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과 함께 닿음도 새겼기 때문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간격이 있다. 다음 부품과 꺼짐이 있기 까지 틈이 있을 때, 그 틈으로 망념이 치고 들어 온다. 이를 막아야 한다. 그래서 엉덩이 닿음을 추가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닿음을 새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순환되는 것 같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것 같았다. 더구나 닿음도 왼쪽 엉덩이와 오른쪽 엉덩이 두 곳을 느꼈다. 그래서 “부품, 꺼짐, 닿음1, 닿음2”가 되었다.
 
명상 환경이 좋은 편은 아니다. 도로 옆에 사무실이 있다 보니 차 소리가 난다. 전철소리도 난다. 이런 소리가 거슬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질 때가 있다. 차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1초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명상을 하라고 했다. 이는 “고귀한 제자는 숲속으로 가서 나무 밑이나 빈 집에 앉아서 이와 같이 ‘이것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인데 텅 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M106)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명상하기 좋은 장소는 한적한 숲속이나 빈집, 동굴이 될 것이다. 도시에서 차 소리 나는 것은 좋은 환경은 아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차가 적게 다니는 것 같다. 명상 중에 차 지나가는 소리가 1초가량 끊겼을 때 매우 고요했다. 심산유곡 산속이나 동굴에서 명상을 한다면 무척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두마을과 같은 명상센터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좌선 중에 배의 부품과 꺼짐, 닿음에 집중했다. 이렇게 집중하다 보니 잡념은 생기지 않았다. 몸은 가벼워졌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거의 한시간이 끝날 무렵 오른쪽 다리가 마비 되었다. 그렇게 되자 새김은 “부품, 꺼짐, 통증, 닿음”이 되었다. 새김의 대상에서 통증이 추가된 것이다.
 
통증도 관찰해야 할 대상이다.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아주 강한 대상이다. 좌선할 때는 강한 대상을 관찰하라고 했다. 보면 사라진다고 말한다. 부품, 꺼짐, 통증, 닿음 순으로 관찰하자 참을 만 했다. 그러나 도중에 자세를 바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알람 울리기 5분전이었다.
 
재가안거 7일차이다. 안거가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시간 좌선을 하고 있다. 또한 수행기를 작성하고 있다. 수행기를 작성하다 보면 좌선한 시간 보다 더 많이 걸릴 때가 있다. 그럼에도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은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는 사실이다!
 
좌선할 때는 눈을 감는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 중에서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는다. 그러나 귀의 문은 닫을 수 없다.

심산유곡에 앉아 있으면 소리가 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동굴에 들어가 있으면 가장 안전할 것 같다. 소리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수행자들은 동굴에서 수행했었던 것 같다.

 
소리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그러나 도시에서 소리는 피할 수 없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 때로 오토바이 소리도 들린다. 그렇다면 이 소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소리에서 무상을 지각하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부처님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했다.
 
 
2023-08-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