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이 통증은 나의 것인가? 재가안거 6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5. 14:15

이 통증은 나의 것인가? 재가안거 6일차

 

 

오늘 좌선은 늦게 시작되었다. 오전 113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한번 더 있었다. 좌선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만 두고 드러누웠다. 알람소리에 깼다.

 

명상을 하려면 주변정리가 되어야 한다. 명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피해야 한다. 책을 읽는다든가, 뉴스를 본다든가, 대화를 하는 등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은 피해야 한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페이스북을 보았다. 어제 저녁 늦게 올려 놓은 반응이 궁금했었다. 북콘서트에 대한 것이다. 이를 관련 카톡방에도 올렸다. 반응이 있어서 답글을 달았다. 이런 모든 행위는 명상에 영향을 준다.

 

어떻게 해야 들뜬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할까? 명학공원에 가서 세 바퀴 돌았다. 무척 더운 날씨이다. 스마트폰을 보니 33도이다. 체감온도는 3도가 더 높다고 나왔다.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난다. 일터에 돌아와서도 땀이 났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것 같다. 그럼에도 좌선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비수행을 해야 한다.

 

집중을 일으키기 위해서 암송만한 것이 없다. 암송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집중이 된다. 암송하는 것 자체가 집중을 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카페트를 돌면서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빠다나경을 거침없이 외웠다. 암송중에 잡념은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 한 구절을 암송하고 나면 다음 구절이 즉시 올라왔다. 계속 이어지고, 이어서 25게송을 5분도 안되어서 외운 것 같다.

 

암송으로 형성된 집중을 행선으로 가져 가고자 했다. 행선대에 표시된 간격대로 발을 옮겼다. 확실시 이전 보다 새김이 달랐다. 한 발 떼고 난 다음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반복했다.

 

행선을 하다 보면 방향 전환할 때가 있다. 그때 멈추어야 한다. 가만 서 있는 것이다. 방향전환 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위빠사나 스승들은 그때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스캔하라고 한다.

 

명상은 앉아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은 행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워서 하는 와선도 있고, 서서 하는 입선도 있다. 어떻게 서서 명상을 할 수 있을까?

 

서서 명상을 하려면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느낌을 스캔해야 한다. 어떻게 스캔해야 할까? 이제까지 단지 형식적으로 했었다. 머리에서 발까지 빠르게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다.

 

스캔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나만의 방법을 계발해 보기로 했다.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명칭 붙이는 것이다.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단계적으로 명칭을 붙여 새기는 것이다.

 

가만 서 있는다. 눈을 감은 상태로 서 있다. 먼저 마음을 정수리에 둔다. 이어서 이마로 옮긴다. 다음으로 눈으로 간다. 그리고 코, 입술, , , 가슴, 윗배, 배꼽, 아랫배, 엉덩이, 허벅지, 무릎, 장딴지, 발목, 발바닥 순으로 명칭을 붙여서 스캔했다.

 

서서 머리에서 발까지 명칭을 붙여서 스캔했다. 명칭을 붙이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이전에는 설렁설렁 넘어 갔으나 명칭을 붙여서 새김을 하다 보니 시간을 요하는 것이다. 세 번 반복했다.

 

명상을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긴다. 행선할 때 서 있을 때 스캔하는 것도 요령이 생겼다. 명칭을 붙여서 스캔하다 보니 새김이 더 드러나는 것 같다. 정수리, 이마, , , , , , 가슴, 윗배, 배꼽, 아랫배, 엉덩이, 허벅지, 무릎, 장딴지, 발목, 발바닥 순으로 하나 하나 새김을 두었을 때 집중이 되는 것 같다.

 

오전 좌선에서 한번 실패 했다. 내가 말하는 실패는 한시간 앉아 있기가 실패 했음을 말한다. 좌선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시간 앉아 있기만 하면 초보수행자에게는 성공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 좌선은 113분에 시작 되었다. 첫 번째 좌선보다 조건은 좋다. 첫 번째 좌선에 실패 한 후에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상태가 좌선하기 가장 좋다. 그래서 새벽좌선은 거저먹기라고 하는지 모른다.

 

좌선은 새김의 확립에 달려 있다. 새김, 즉 사띠가 확립되지 않으면 마음은 방황하기 쉽다. 이런 저런 생각이 치고 들어와 집을 지을 때 피곤한 일이다.

 

사념의 집을 짓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호흡에 의지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호흡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호흡이라 하여 코끝을 보지 않는다. 호흡과 관련된 배의 움직임을 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허공을 응시하듯 가만 있으면 움직임이 포착된다.

 

배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잡아야 한다. 한번 잡은 것은 놓지 않아야 한다.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처음에는 희미하지만 마치 부품, 꺼짐하며 명칭 붙이듯이 관찰하면 점차 선명해진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 할 때 간격이 있다. 이럴 때는 닿음을 관찰해야 한다. 엉덩이의 닿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품, 꺼짐, 닿음또는 부품, 닿음, 꺼짐식으로 관찰한다.

 

좌선을 한지 30분이 지났을 때 자세를 바꾸어 주었다. 오른쪽 다리에 저림이 왔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풀고 위치를 맞바꾸어 주었다.

 

자세를 바꾼 후에 다시 좌선이 시작되었다. 한번 잡은 호흡을 놓치기 싫었다. 호흡을 놓치면 잡념이 치고 들어 온다. 잡념에서 해방되려면 호흡을 잡고 있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고 있으면 잡념이 치고 들어오지 못한다. 이럴 경우 호흡이 피난처가 된다. 망망대해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섬이듯이, 온갖 망념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호흡이 가장 안전한 곳이다.

 

좌선이 거의 끝날 때쯤 되어서 다리 다리저림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오른쪽 다리이다. 자세를 두 번 바꿀 수 없다. 아파도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다리저림이 발생되면 묵직하다. 오른쪽 다리 전체가 마비된 듯 하다. 처음에는 겁이 났으나 지금은 남의 다리 보듯 한다. 다리 통증과 나를 분리한 것이다. 단지 새김만 있을 뿐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 할 때 부품, 꺼짐하며 명칭 붙여 관찰한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부품-새김, 꺼짐-새김이 된다. 왜 그런가? 물질과 정신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배의 부품은 물질적인 현상이다. 부품이라고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그래서 부품은 부품-새김이 되는데, 이는 물질-정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다리저림에 따른 통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리저림이 왔을 때 이는 느낌에 대한 것이다. 사념처에서 느낌관찰, 수념처에 해당된다. 그래서 통증-새김이 되는데, 이는 느낌-새김이 된다.

 

느낌은 내것일까? 느낌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통증도 내것이 된다. 그래서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좌선 중에서 다리저림에 따른 통증이 왔을 때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제3자처럼 객관적으로 지켜 볼 뿐이다.

 

 

 

좌선 중에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큰일 날 것 같다. 그럼에도 내버려 두었다. 평좌를 풀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원상회복되기 때문이다. 겁 먹을 필요 없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여기면 집착이 된다. 그래서 몸도 내몸이 되고, 느낌도 내 느낌이 된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떠할까?

 

몸은 내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마음은 내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쉽다. 왜 그럴까? 마음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몸은 정체성이 어느 정도 있다. 십년전의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나의 모습에는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나라고 할만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을 자기 자신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차라리 좋을 것이다.”(S12.6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범부들은 몸을 내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마음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 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하다.” (S12.61)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변화무쌍하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원숭이의 비유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 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S12.61)

 

 

이 가르침은 마음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숲은 대상의 숲으로 대상의 숲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원숭이이다. 대상을 붙잡는 마음이 나뭇가지를 붙잡는 원숭이이다.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가듯이, 마음은 대상의 숲에서 옮겨 다니며 시각적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고 때로는 청각적인 대상 등이나 과거, 현재, 미래의, 때로는 외적, 내적의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킨다. 원숭이가 새로운 나뭇가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땅바닥으로 내려와서 앉는 것이 아니라 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그 위에 앉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대상의 숲을 옮겨 다니다가 대상을 새로운 발견하지 못하면, 한 종류의 대상에 정착한다. 이 비유는 닦여지지 않은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항상 대상과 함께한다는 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Srp.II.100)

 

 

주석에 따르면 마음은 항상 대상과 함께 한다고 했다. 이는 법구경에서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범부는 몸에 대하여 자신의 몸이라고 할만하다. 그래서 내 세울 것이 얼굴 밖에 없는 가람은 얼굴 가꾸기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마음은 다르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법구경에서 마음의 품이 있다. 33번 게송에서는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고 했다. 34번 게송에서는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 (Dhp.34)라고 했다.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불선한 것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법구경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 온다.”(Dhp.35)라고 했다. 마음은 닦는 다기 보다는 제어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변덕이 죽 끓는 듯 해도 자신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몸이나 느낌도 자신의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으로 본다. ,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이 있는 한 해탈 할 수 없다. 특히 변화무쌍한 마음이 그렇다.

 

마음은 변화가 심하다. 어느 것이 내마음인지 모른다. 몸이나 느낌은 어느 정도 자신의 것이라고 할만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것을 오랜 세 월 동안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애착하고 탐착하고 집착해왔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 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그것에서 싫어하여 떠날 수 없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다.”(S12.61)라고 했다.

 

범부는 해탈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며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어떻게 해야 해방될까?

 

부처님은 오온의 집착에서 벗아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연기의 법칙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킨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S12.61)라고 하여 연기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라고 했다. 그러면서 연기법을 설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는 이 비구들이 물질에 대해서 지나치게 붙들려 있었을 때에는 먼저 이들이 물질을 거머쥐는 것을 버리고 정신에 확고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런 뒤에 다시 정신을 거머쥐는 것을 버리고 물질에 확고하도록 하셨다. 그런 뒤에 여기서 세존께 서는 이제 비구들이 물질과 정신에 붙들려 있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셨다고 주석서에서는 설명하고 있다.”(초기불전연구원 340번 각주)

 

 

부처님의 연기법은 조건발생이다. 이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말한다. 오온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지만 이는 조건적 연기의 발생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무아이다. 그래서 이 몸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좌선 중에 다리저림으로 인한 통증이 왔다. 그런데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는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가 끊어질 듯 통증이 와도 마치 남의 다리 보듯 새기는 것이다. 느낌은 나의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몸은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것 같아서 내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순간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내것이라고 볼 수 없다. 결정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 좌선 중에 몸을 관찰하면 내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호흡이 대표적이다.

 

호흡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호흡을 한다. 나의 의지, 나의 의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인체에서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것도 나의 의지, 의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좌선 중에 통증이 있다. 통증도 나의 의지, 나의 의도와 무관한 것이다. 일어 날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통증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3자적 입장에서 남의 다리 보듯이 지켜만 보면 된다.

 

좌선 중에 마음이 있다. 번뇌망상도 있고 새기는 마음도 있다. 모두 생멸하는 것들이다. 어느 것도 내것이 아니다. 단지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 이런 마음도 단지 지켜 보기만할 대상일 뿐이다.

 

좌선 중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가장 강한 대상을 지켜 볼 뿐이다. 호흡이 강하면 호흡으로 가고, 통증이 심하면 통증으로 간다.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으로 간다. 단지 지켜 볼 뿐이다. 이는 부품-새김하는 것처럼 단지 물질적, 정신적 현상만 있게 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알게 된다.

 

 

2023-08-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