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과 꺼짐과 닿음을 리드미컬하게, 재가안거 8일차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가슴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땀이 가슴을 타고 흘러 내릴 때 상쾌했다. 아니 통쾌했다. 노동할 때 땀을 흘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좌선이 끝났을 때 팔을 만져 보니 축축하다. 등도 땀으로 축축하다. 백색 티도 땀으로 젖었다. 아침 8시 4분부터 9시 4분까지 한시간 앉아 있었다.
재가안거 8일차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다.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날자가 지날수록 점차 방법과 요령이 생기는 것 같다. 오늘 좌선도 그랬다.
안거기간은 길다. 3개월이기 때문에 90일이상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시간 앉아 있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90번 이상 좌선을 해야 한다. 오늘 좌선이 잘 되지 않아 실패 하더라도 염려 없다. 내일 또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내일 잘 하면 된다.
좌선을 하면 할수록 방법과 요령이 생겨난다. 여기서 요령은 좋은 뜻으로의 요령을 말한다. 일종의 좌선하는 노우하우, 나만의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스스로 터득해서 아는 것이다.
오늘 좌선에 임할 때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다. 처음부터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한 것이다. 평좌를 하고 자리에 앉는 그 순간부터 배의 움직임을 보고자 했다.
처음 앉으면 배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가만 있다 보면 보인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오늘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났다. 예전에는 글을 썼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글을 쓴 것이다. 엄지로 치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두세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그러나 재가안거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그만 두었다.
재가안거 기간에는 가능하면 스마트폰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왜 그런가? 좌선에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이스북과 카톡과 같은 에스엔에스를 보지 않고자 한다. 보아서 이득 될 것 없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서 들뜨거나 분노한다면 그 것으로 인하여 페이스가 엉망이 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무엇을 해야 할까? 경전을 읽기로 했다. 그리고 논서를 보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반교양적이나 소설을 본다면 이런 것 역시 명상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경전이나 논서는 예외이다.
새벽에 경전이나 논서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주옥 같은 가르침이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진다. 다음에 한번 더 읽을 것을 생각해서 형광메모리펜으로 색칠하며 읽는다.
오늘 새벽에는 상윳따니까야 ‘도시의 경’을 읽었다. 논서로서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특히 ‘위빳사나 수행방법론’2권 초입에서 ‘기본관찰법’을 새기며 보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크게 와 닿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자신의 배를 마음으로 집중해서 관찰하고 있어 보라. 배가 부풀어 오는 것, 배가 꺼져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풀어 오는 것과 꺼져 들어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할 경우에는 배에다 손을 대어 보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배가 부풀 때마다 꺼질 때마다 움직임이 분명하게 되면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부풀어 오는 움직임을 ‘부푼다’며 새겨라.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져 가는 움직임을 ‘꺼진다’하며 새겨라. 배가 부풀어 올 때 배가 부풀어 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배가 꺼져 갈 때 배가 꺼져 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배의 형체라는 개념도 알게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의심하지 말라.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고 수행할 수 없다. 개념과 함께 분명하게 알면서 관찰하고 새겨야 삼매와 새김, 지혜가 쉽게 성숙된다.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 비로소 모든 개념대상이 무너지고 사라져 실재성품에만 지혜가 잘 머물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62쪽)
자리에 앉아 배의 움직임을 보고자 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 코의 호흡이나 가슴으로 마음이 가기 쉽다. 그러나 잘 보면 보인다. 결정적으로는 배에 손을 대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좌선 중에 배에 손을 대보면 정말 부품과 꺼짐을 볼 수 있다. 이제 배의 부품과 꺼짐을 확인했다. 그 다음부터는 명칭 붙여서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풀 때는 ‘부푼다’라고 관찰하고, 꺼질 때는 ‘꺼진다’라며 관찰하라고 했다.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미얀마에서는 ‘부푼다’ ‘꺼진다’라 하여 동사형을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부품’ ‘꺼짐’이라 하여 명사형을 쓰는 것 같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명칭을 붙이는 것은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처음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개념적인 명칭을 붙여서 관찰한다. 익숙해지면 명칭을 떼도 좋다고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실재 성품을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실재 성품인가?
어제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아들고기의 경’을 읽었다. 물질의 자양애 대하여 “물질의 자양분이 잘 알려질 때”(S12.63)에 대한 주석이 있다. 물질과 정신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수행자는 주의깊게 관찰해서 둘 다 물질인 음식과 혀 사이에서 일어나는 접촉을 살펴보아야 한다. 음식과 혀의 접촉과정을 선관하면 그 선관이 정신적인 현상임을 알게 된다. 나아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현상이 의식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과 물질과 그 원인 사이의 이러한 분별을 ‘알려진 것을 통한 완전한 앎(知遍知: ñātapariññā)’이라 한다.
2) 그 다음으로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신체적 과정의 발생과 소멸을 선관하면 그것들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탐구를 통한 완전한 앎(度遍知: tīraṇapariññā)’이라고 한다.
3) 그리고 맛의 본성에 관해 숙고하면 그것이 감각적 욕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그 욕망을 오염된 것으로 앎으로써 ‘끊음을 통한 완전한 앎(捨遍知: pahānapariññā)’에 도달한다. 이것이 돌아오지 않는 자(者)의 지혜에 해당한다.”(Srp.II.109)
상윳따니까야 ‘아들고기의 경’에서 물질의 자양에 대한 설명이다. 물질의 자양이 완전히 알려질 때 위와 같이 세 단계로 지혜가 생겨남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법의 성품을 아는 것이 된다.
법의 성품을 알려면 물질과 정신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맛에 대한 관찰이나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한 관찰이나 법의 성품을 아는 것에서는 같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정신도 관찰되는데, 이는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맛을 보았을 때 혀에서는 맛과 이를 아는 새김이 있게 된다. 이때 혀의 맛과 새김은 쌍이 된다. 이는 물질과 정신이 상호 의존하고, 물질과 정신이 쌍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부품-새김”과 “꺼짐-새김”라며 관찰한다. 여기서 부품은 물질적 현상이고, 새김은 정신적 현상이다. 오로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밖에 없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다 보면 물질과 정신적 것 이외 다른 것은 없다. 여기에 자아나 영혼, 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만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이 구분 되어 있다. 이렇게 아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알려진 것을 통한 완전한 앎(知遍知: ñātapariññā)’이라고 했다.
법의 성품을 아는 두 번째 지혜는 ‘탐구를 통한 완전한 앎(度遍知: tīraṇapariññā)’이다. 이는 법의 성품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삼특상을 꿰뚫어 아는 것이다. 복주석에 따르면 일곱 가지 관찰이 있다. 무상의 관찰, 괴로움의 관찰, 무아의 관찰, 염오의 관찰, 이욕의 관찰, 소멸의 관찰, 놓아버림의 관찰을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법의 성품을 알기 위한 것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오온은 몸과 마음에 대한 것으로서 오로지 정신물질적 현상으로서 정신과 물질이 구분 되어 있는 아는 것이다. 또한 정신물질적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알았을 때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호흡새김에서도 알 수 있다.
대념처경 호흡새김을 보면 몸에 대해 생성과 소멸을 관찰한다고 했다. 여기서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호흡에 대하여 몸의 생멸로 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몸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몸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을 관찰 했을 때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새김이 있는 정도만큼 ‘몸이 있다.’라는 새김이 이루어진다.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4)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배의 부품과 꺼짐을 잘 관찰할 수 있을까?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배의 부품이 있을 때와 꺼짐이 있을 때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을 메꾸어야 한다. 메꾸지 않으면 망념이 치고 들어 온다.
어제 좌선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 다음에 닿음을 봤다. 엉덩이의 닿음을 말한다. 오늘은 약간 달랐다. 부품과 꺼짐 사이에 닿음을 보고, 꺼짐과 부품 사이에 닿음을 본 것이다. 그래서 ‘부품-닿음-꺼짐-닿음’이 되었다.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닿음을 넣으니 확실히 망념이 줄어 들었다. 망념이 들어 올 공간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치고 들어 왔다. 치고 들어 와서 사념의 집을 지었다.
사념의 집을 허물 때 허탈하다. 그리고 힘이 든다. 한마디로 맥 빠지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집 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품과 꺼짐과 닿음을 관찰할 때 리드미컬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엑스(X)자 모양으로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 것이다. 부품 다음에 오른쪽 엉덩이의 닿음, 그리고 꺼짐 다음에는 왼쪽 엉덩이의 닿음을 새겼다. 이렇게 새기다 보니 리드미컬하게 운율을 타는 것 같았다.
한시간 좌선은 짧지 않다. 일각이 여삼추인자에게는 아득한 시간이다. 사념의 집을 허용했을 때는 지루하기가 그지 없다. 그러나 부품과 꺼짐, 닿음을 관찰 했을 때는 지루하지 않다. 때로 시간이 빨리 지나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시간 좌선하면서 수도 없이 망념을 허용했다. 그때 마다 알아차려서 부품과 꺼짐으로 돌아왔다. 이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생각하면 ‘생각함’하며 새겨라. 망상하면 ‘망상함’하며 새겨라. 상상하면 ‘상상함’하며 새겨라. 숙고하면 ‘숙고함’하며 새겨라.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면 ‘달아남’하며 새겨라. 어느 곳으로 마음이 도착하면 ‘도착함’하며 새겨라.”(2권, 64-65쪽)라는 지침에 따른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닿음과 함께 계속 새겼다. 이럴 때는 마치 운전하는 것과 같다. 자전거나 오토바이, 자동차를 탈 때 운전대를 잡는다. 한눈을 팔거나 운전대를 놓친다면 어떻게 될까? 치명적인 사고가 날 것이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오로지 앞으로만 달려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 닿음을 새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시간 앉아 있다보면 반드시 오른쪽 다리 저림이 온다. 평좌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발생되면 자세를 바꾸어 주었다. 다리를 풀고 피가 돌게 한 다음 안쪽에 넣는 다리를 교체하는 것이다.
오늘 좌선에서는 오로지 부품과 꺼짐, 닿음에만 전념하고자 했다. 망념이 일어나 집을 지으면 다시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달렸다. 그 결과 다리저림 현상이 있긴 있었지만 무시하고 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다리저림은 어쩌면 심리적인 것인지 모른다.
한시간 좌선이 끝났다. 재가안거 8일차 되는 날 오늘은 자세를 바꾸는 일 없이 한시간을 주행했다. 도중에 망념이 치고 들어와 덜컹거리긴 했으나 ‘생각함’ ‘망상함’ ‘상상함’하며 새겨서 집을 부수었다. 그 결과 처음으로 한시간 완주한 것이다.
2023-08-07
담마다사 이병욱
'수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선(行禪)에서 얻는 이익은? 재가안거 10일차 (0) | 2023.08.09 |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스캔 하는 방법, 재가안거 9일차 (0) | 2023.08.08 |
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가안거 7일차 (0) | 2023.08.06 |
이 통증은 나의 것인가? 재가안거 6일차 (0) | 2023.08.05 |
불타는 세상, 재가안거 5일차 (0) | 2023.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