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행선(行禪)에서 얻는 이익은? 재가안거 10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9. 11:24

행선(行禪)에서 얻는 이익은? 재가안거 10일차

 

 

오늘 좌선은 성공적이었다. 왜 성공적이었는가? 그것은 한시간 앉아 있는 동안 자세를 한번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질적인 오른쪽 다리 저림, 마비, 통증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 혹시 스마트폰 밧데리가 방전된 것은 아닐까? 이전에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이런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었다.

 

궁금한 것도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그럴 경우 궁금함, 궁금함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밧데리 방전된 것 같은 의심도 들고 해서 스마트폰을 터치 했다. 방전은 없었다. 들어가 보니 38초 남았다. 어쨌든 한시간 좌선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재가안거 10일차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번 안거에서는 몸 만드는 기간으로 정했다. 한시간 앉아 있기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디를 가도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여행을 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행지에서 밤에 앉아 있어도 될 것이다. 아침부터 행사가 있어서 낮을 보냈다면 밤에 앉아 있으면 될 것이다. 글쓰기와 똑같다.

 

블로그에는 글이 7200개 가량 있다. 주로 아침에 썼다. 그날 일이 있어서 오전에 쓰지 못했을 경우 오후에 썼고, 오후에 쓰지 못했을 때는 밤에 썼다. 이렇게 해야 숙제하는 것 같았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무실에 720분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것은 새벽에 글을 하나 썼기 때문이다. 새벽 320분부터 5시 반까지 2시간동안 엄지치기 했다.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놓고 잠을 청했다.

 

새벽에 글을 쓰면 피곤하다. 스마트폰 작은 화면에 엄지치기 하다 보면 힘이 든다. 그러나 글이 완성되기까지 눈을 뗄 수 없다. 고도로 집중하여 글이 완성 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감을 느낀다.

 

글을 쓰고 난 다음 잠을 자야 한다. 누워 있다 보면 꿈을 꾸게 된다. 잠시라도 꿈을 꾸게 된다면 피로가 풀린다. 한시간 누워 있었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하루가 피곤하다.

 

일터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었다. 집에서 준비해 온 계란 하나에다 소시지를 사무실에 있는 샌드위치 한조각과 함께 먹었다. 꿀물도 타 먹었다.

 

아침을 먹었으니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좌선을 하는 것이다. 먼저 몸을 풀어야 한다. 명상공간 카페트 위를 돌았다. 빠른 속도로 그만 두고 싶을 때까지 돌았다. 다음으로 행선을 해야 한다.

 

사무실에 경행대가 있다. 길이가 4.2미터 되는 것으로 14보 표시를 해 놓았다. 1보에 30센티 간격이다. 행선도 이정도 했으면 됐다 싶을 정도로 해야 한다.

 

행선을 수없이 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아마 그것은 주기적으로 정기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요할 때 한 것이다. 마치 경전을 필요로 하는 부분만 읽는 것과 같다.

 

경전을 읽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 각주에 있는 주석까지 샅샅이 읽어 보어야 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새겨야 한다. 이렇게 읽어야 보물을 얻을 수 있다.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건성건성 읽는 것 같아서 놓치는 것이 많다.

 

육단계 행선을 했다. 매번 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발을 뗄 때 이전 발의 누름을 확인하고 떼는 것이다. 이전에는 발을 누름과 동시에 뗐었다.

 

 

발을 뗄 때는 발 뒷쿰치를 먼저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앞쿰치를 뗀다. 이렇게 발을 들고 난 다음 민다. 밀 때는 쓰윽미는 동작이다. 육단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해당된다. 느낌은 비행기타는 기분이다. 그 다음은 내리고, 딛고, 누른다. 이런 동작을 수없이 반복한다.

 

육단계는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동작은 각 단계마다 새겨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과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발을 떼는 동작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그런데 행선에서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행선과 좌선의 가장 큰 차이는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로 판가름 난다. 행선은 반드시 의도를 필요로 한다. 발을 뗄 때 의도가 있어서 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도 역시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세 번 알아차려야 한다. 의도와 움직임과 새김을 말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새긴다고 말한다. 새기는 것도 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새기가 쉽지 않다. 고도로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간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를 카니까사마디(khaika samādhi), 즉 순간삼매라고 한다.

 

행선 할 때는 똑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한다. 위빠사나를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쓸데 없는 짓, 부질 없는 짓으로 보인다. 발을 들어 천천히 움직이는 행위가 이해 되지 않을 것이다. 108배 정도는 해야 수행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행선에는 생각지도 못하는 지혜가 담겨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인 빤냐완따 스님이 있다. 스님이 쓴 글 중에서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스님은 이 글에서 행선의 이익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이는좌선만으로는 부동의 삼매를 계발할 수 없습니다좌선만으로만 얻어진 삼매는 온실의 화초 같아서 햇빛을 받으면(밖으로 나가면이내 시들어 버립니다여지없이 깨져 버립니다그러나 ‘걷는 수행(행선)’을 통해 얻은 삼매를 바탕으로 한 좌선삼매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좌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계속 강한 삼매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29)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빤냐완따 스님은 행선에서 얻은 삼매를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좌선에서 얻은 삼매를 행선으로 가져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좌선에서 얻은 빛과 같은 니밋따를 행선으로 가져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빤냐완따 스님이 말한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고 구절로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설명되어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도 행선을 했다. 니까야에서는 짱까마(cakama)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영어로는 ‘a terraced walk; walking up and down’라고 설명되어 있다. 관련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경을 보면 그때 세존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노천에서 경행하고 있었다.”(Vin.I.15)라고 되어 있다. 율장대품에서 야사를 만날 때 장면에 대한 것이다.

 

경행할 때 아무 생각없이 걷지 않는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도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한 발 뗄 때마다 새겨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행선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 ‘들어올림에서 생겨난 세계들과 거기서 파생된 물질들이 있는데그 모든 것들은 ‘앞나아감에 도달하지 않고 바로 그곳에서 소멸한다그러므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Vism.20.65)라고 설명해 놓았다.

 

행선에서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빠사나 지혜를 얻는 것이다. 행선으로 위빠사나 제1단계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 제2단계 지혜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행선을 통하여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법의 공통적인 성품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 , 무아에 대한 것이다. 발을 들었을 때 이는 한동작에 대한 것이다. 이 동작을 아는 마음이 있다. ‘듦과 새김이 바로 그것이다.

 

발을 들었을 때 듦과 새김이 있다. 이는 다름아닌 물질과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물질과 정신이 쌍을 이룬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런데 이 쌍은 다음 동작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을 밀었을 때 새로운 밈과 새김이라는 새로운 물질과 정신이 발생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생겨난 물질과 정신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소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정신이 항상하지 않음을 말한다.

 

법은 항상하지 않다. 느낌이라는 법을 예로 들 수 있다. 즐거운 느낌은 오래가지 않는다. 오래가지 않아 불만족스럽다. 오래가지 않아 실체가 없다. 그런데 법은 면밀하게 관찰하면 찰나생찰나멸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법의 일반적 성품에 대하여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행선대에서 행선을 할 만큼 했다. 이제 자리에 앉아야 한다. 오늘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배의 움직임을 보기로 했다. 한번도 놓치지 않겠다고 결의 했다. 이렇게 결의해 놓으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처음에 자리에 앉았을 때는 익숙하지 않다. 아직 자리가 잡혀 지지 않은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선명하지 않다. 이럴 때는 배에 손을 댄다는 느낌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움직임이 보인다.

 

배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세렝게티 평원에서 치타가 먹이를 낚아 챘을 때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 끝까지 몰고 가야 한다. 처음에는 새김이 약하기 때문에 엉덩이 닿음까지 추가 한다. 부품과 꺼짐 사이에 망념이 들어 오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도 있다.

 

좌선할 때 호흡이나 배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면 번뇌망상이 되기 쉽다. 사념의 집을 짓기 쉽다. 이렇게 되면 좌선이 힘들어진다. 한시간을 버틸 수 없다. 일각에도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호흡이나 배의 부품과 꺼짐을 잡고 있으면 염려 없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계속 보고자 했다. 처음에는 새김이 좋지 않기 때문에 엉덩이 닿음을 추가하여 엑스(X)자 형으로 리드미컬하게 보고자 했다. 이는 부품(새김)-오른쪽 닿음(새김)-꺼짐(새김)-왼쪽 닿음(새김)”과 같은 순서를 말한다.

 

사무실 명상공간에서 좌선을 하다 보면 소음에 시달린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난다. 종종 전철 지나가는 소리도 난다. 주말에는 덜하다.

 

주말 어느 때 약 1초정도 아무 소리도 안나는 때가 있었다. 이럴 때 순간적으로 고요를 본다. 이럴 때깊은 산중이나 동굴에서 좌선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천안 호두마을에라도 가서 단기수행해 보고 싶다. 금요일 출발해서 23일 일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소음이 있어도 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앉고자 했다. 이렇게 배의 움직임을 잡고 있으니 잡념이 들어와도 힘을 쓰지 못한다. 곧바로 배의 움직임을 보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마음을 배의 움직임이라는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꽁꽁 묶어 둔다.”라는 문구를 만들어 보았다.

 

마하시센터 명상방법에 있어서 배는 기둥과도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켜 보는 것은 새김의 밧줄로 묶어 놓는 것과 같다. 소가 기둥에 끈이 묶여 있으면 그 끈 길이만큼 풀을 뜯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배라는 기둥에 묶어 두면 새김의 끈 만큼 반조가 일어날 것이다.

 

명상하면서 생각할 수 있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은 반조(返照)’라고 볼 수 있다. 경전의 가르침이 생각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나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생각은 망상이 된다. 왜 그런가? 새김의 끝이 너무 느슨하기 때문이다.

 

새김의 끈을 바싹 조여야 한다. 너무 조이면 대상과 붙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사마타하자고 명상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현상과 정신현상을 지켜 보자고 명상하는 것이다. 그것도 제3자적 입장에서 지켜 보는 것이다. 그래야 물질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게 된다.

 

한시간 좌선을 마쳤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거나 저림 현상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몸은 가벼웠다. 몸이 있는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좌선을 마쳤을 때 곧바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아홉 차례 좌선 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좌선이 끝나면 반드시 후기를 작성한다. 수행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좌선이 끝나자 마자 자판을 두드린다. 그런데 기록하다 보면 행선과 좌선한 시간 보다 더 많이 걸린다. 그럼에도 기록하면 남기 때문이다. 또한 공유할 수도 있다. 이렇게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2023-08-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