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왜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새겨야 하는가? 재가안거 11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10. 12:23

왜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구분하여 새겨야 하는가? 재가안거 11일차
 
 
태풍이 온다고 한다. 어제까지 뜨거웠으나 오늘은 선선하다. 태풍의 전조이어서일까 비도 내린다. 바람까지 분다면 올 여름은 끝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맑은 하늘은 며칠 가지 않는다. 하늘에 구름이 끼고 흐려지다가 비를 뿌리기도 한다. 하늘도 변화무쌍하다. 낮에는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지만 저녁이 되면 서쪽 하늘을 벌겋게 달군다.
 

 
사람의 마음도 변화무쌍하다. 대상에 따라 마음도 변한다. 욕망의 마음이 되기도 하고 분노의 마음이 되기도 하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은 다르다. 어제 일이 잘 풀렸다고 오늘도 잘 풀리라는 보장은 없다. 좌선도 그런 것 같다.
 
재가안거 11일차이다. 오늘 아침 좌선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세를 두 번 바꾸었기 때문이다. 준비과정은 거쳤다. 행선을 하고 암송도 했다.
 
오늘 좌선은 왜 실패 했을까? 한시간을 채웠기 때문에 몸만들기 측면에서 본다면 성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새김의 대상을 놓치고 망념과 망상에 지배받았기 때문에 실패로 보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이런 말이 있다.
 
 
관찰하는 이의 삼매가 매우 예리해지면, 그에게는 망상이나 생각 등의 장애들이 거의 생겨나지 않는다. 새김만 계속 해서 깨끗하게 생겨난다. 가끔 망상들이 생겨나더라도 즉시 새겨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망상들은 즉시 사라진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24-125쪽)
 
 
삼매가 예리해지면 망상이나 생각등의 장애가 거의 생겨나지 않는다고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끊어짐 없이 새겼을 때 알 수 있다. 설령 망상이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새김이 있기 때문에 즉시 사라진다고 했다. 이런 현상도 경험하면 알 수 있다.
 
좌선 내내 망념이 생겨났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망념은 쉽게 제압된다. 그러나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망념은 집을 짓게 된다. 이럴 때 한 여행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오토바이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도 대륙을 횡단 중에 있다. 언제가 글에서 “목적없이 계획없이” 다닌다고 했다. 그야말로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간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은 여행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생길이라고 한다. 인생길을 가는데 있어서 목적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될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 의미 없이 보내는 방황자가 될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좌선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힘들게 다리꼬고 마치 고행하듯이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를 살기 위한 것으로 본다. 이는 다름아닌 새김에 달려 있다.
 
새김은 사띠의 번역어이다. 사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을 따른 것이다.
 
새김이 있는 인생과 새김이 없는 인생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대부분 새김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새김이 있으면 마음이 늘 현재에 있기 때문에 얼굴 빛이 맑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새겨야 할까? 위빳사나 수행방방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사실대로 바른 성품에 따라서 알고 보는 이에게 물질과 정신들이 서로 따로따로 구별되어 드러난다. 새기지 않았을 때나 갓 새기기 시작했을 때처럼 이어진 것으로, 한 무더기로, 하나로, 한 덩어리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제일 낮은 단계로 말하자면 배가 부풀 때 부푸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 이렇게 구별되어 드러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배가 꺼질 때에는 배가 꺼지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 ‘앉음’하며 관찰할 때는 앉아 있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 굽힐 때와 펼 때에는 굽히려고 하는 것과 펴려고 하는 것이 따로 + 굽히는 것과 펴는 것이 따로 + 그것을 새기는 것이 따로, 볼 때에는 보이는 대상과 눈이 따로 + 보는 것과 새기는 것이 따로, 이러한 등으로 구별되어서만 드러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27쪽)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물질과 정신들이 서로 따로따로 구별되어 드러난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배가 부풀 때 부푸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배의 부품과 새김이 쌍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부품은 물질적 현상에 대한 것이고, 새김은 정신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따로 따로 새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기본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 정신 따로, 물질 따로 새긴다고 했다. 배의 부품에 적용하면 “배가 부풀 때 부푸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가 되고, 배의 꺼짐에 적용하면 “배가 꺼지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가 된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이 따로따로가 되는 것이다.
 
수행은 반드시 행선과 좌선만을 말하지 않는다. 일상에서도 수행을 해야 한다. 그것은 사띠의 확립에 달려 있다. 매사에 새김하는 것이다. 일거수일투족이 새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 ‘앉음’하며 관찰할 때는 앉아 있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라고 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모든 일상적 행위에 적용할 수 있다.
 
팔을 굽힐 때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생각없이 굽힌다. 그러나 “굽힐 때와 펼 때에는 굽히려고 하는 것과 펴려고 하는 것이 따로 + 굽히는 것과 펴는 것이 따로 + 그것을 새기는 것이 따로”라고 했다. 무려 세 가지가 복합되어 있다. 이는 의도가 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을 굽힐 때 의도가 있어야 굽혀진다. 의도가 없으면 나무토막과도 같다. 그래서 팔을 굽힐 때는 “팔을 굽히려는 의도, 팔을 굽힘, 새김”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새김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신-물질을 바로 새길 수 있을까?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접촉까지의 다섯은 시각으로부터도
형상으로부터도, 또한 그 양자 사이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
원인을 조건으로 유위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큰북을 두드려 소리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Vism.18.33)
 
 
여기서 접촉까지 다섯은 접촉오법이라 하여 접촉, 느낌, 지각, 의도, 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접촉오법에 따라 물질-정신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게송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해 놓았다.
 
 
접촉, 느낌, 인식, 의도, 마음이라고 하는 접촉 제5법들은 즉 눈 접촉을 다섯 번째로 하는 봄의 성품들은 눈 안에서 나와 생겨난 것도 아니고, 형색 안에서 나와 생겨난 것도 아니고 눈과 형색, 그 두 가지의 중간에서 나와 생겨난 것도 아니다. 관련된 여러 조건들이 모여 형성된 것들, 즉 봄의 성품들은 눈과 형색 등 여러 원인을 조건으로 하여 생겨난다. 마치 북을 두드리면 그 소리가 북과 북채 등의 여러 조건들을 의지해서 생겨나는 것처럼.”(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27-128쪽)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이때 새김이 없으면 대상에 끄달려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정신-물질로 구분하여 보면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하여 북소리 비유를 들었다.
 
진리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이럴 때 비유로 설명된다. 청정도론에서도 시각현상을 설명할 때 북소리 비유를 들었다. 왜 소리의 비유를 들었을까? 아마 그것은 소리가 정신-물질을 구분하는데 가장 설명하기 좋은 예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북소리는 아직 북을 치기 전에 그 북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북채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북과 북채의 사이에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북을 칠 때 나는 그 북소리는 북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북채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북이라는 물질, 북채 라는 물질들, 그 자체가 소리 물질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과 북채의 중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사실은 북과 북채, 북을 침이라고 하는 여러 조건들을 의지해서 북을 거듭 칠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 생겨 나는 소리만 존재한다. 따라서 북과 북채가 따로 + 북소리가 따로 구별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봄'이라는 현상도 아직 보기 전에 눈 안에 감추어 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형색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눈과 형색의 중간, 사이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따라서 형색이 거듭 드러날 때마다 생겨나는 그 ‘봄’은 눈 안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형색 안 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눈 감성물질, 형색 물질, 그 자체가 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눈과 형색의 사이, 중간에서 나와 생겨난 것도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눈, 형색, 빛, 마음기울임이라고 하는 조건들을 의지해서 형색이 거듭 드러날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 생겨나는 봄의 성품일 뿐이다. 따라서 눈과 형색이 따로 + 봄이 따로 이렇게 구별되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28-129쪽)
 
 
이 설명은 물질과 정신이 구분되어 있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봄이 드러나는데 이는 조건발생임을 말한다. 그런데 눈의 경우 껌벅이지 않는 한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매순간 새로운 영상이라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볼 때 매순간 새로운 영상이다. 그래서 “눈과 형색이 따로 + 봄이 따로”가 된다. 이는 물질과 정신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시각으로 정신-물질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런가? 형상을 볼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지 않는 한 형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각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소리를 예로 들었다.
 
청정도론에 정신-물질을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여섯 개의 게송이 있다. 공통적으로 후렴구에 “예를 들어 큰북을 두드려 소리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소리로 정신-물질이 구분되어 있음을 설명하기 쉬움을 말한다.
 
두 손바닥을 맞부딪치면 소리가 난다. 그런데 소리는 발생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만다. 북소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소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또한 소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북과 북채, 북을 침이라고 하는 여러 조건들을 의지해서 북을 거듭 칠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 생겨 나는 소리만 존재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소리는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조건발생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저절로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없다.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니다. 소리는 소리가 날 만해서 난 것이다. 그래서 “북과 북채가 따로 + 북소리가 따로 구별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과 소리가 따로라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눈과 형색이 따로 + 봄이 따로”가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는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에서 조건발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행선이나 좌선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렇게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별하여 아는 이는 다음과 같이 숙고하여 결정할 수 있다. 즉, “앉음, 섬, 굽힘, 폄, 봄, 들림 등의 여러 동작 하나하나를 정신만으로도 성취하게 할 수 없다. 물질만으로도 성취하게 할 수 없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 모두가 결합해야만 성취 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성취하게 할 수 있는 이 물질과 정신, 두 가지를 집착하여 ‘나는 앉는다. 나는 선다. 나는 간다. 나는 굽힌다. 나는 편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라는 등으로 부르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 하자면 앉음, 섬, 감 등을 행할 수 있는 ‘나’,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단지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라고 반조하여 결정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32쪽)
 
 
의도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발을 움직이려 할 때 의도가 있어야 한다. 모든 행위에는 의도가 실려 있다. 그런데 행위는 정신적 물질적 상호작용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는 앉는다. 나는 선다. 나는 간다. 나는 굽힌다. 나는 편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라며 착각한다는 것이다.
 
오온에서 정신과 물질 현상을 관찰하면 조건에 따라 생멸함을 알 수 있다. 오로지 정신적 물질적 상호작용만 있는 것이다. 배의 부품이라는 물질현상과 이를 알아차리는 새김이라는 정신현상만 있는 것이다. 이렇게 쌍으로 되어 있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소리는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소리라는 물질과 이를 새기는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과보가 따를 것이라고 했다.
 
손가락 튕기기 비유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은 자아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조건발생하여 생멸하는 것은 집착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눈은 우리를 속인다.
 
소리는 한번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생겨났다가 금방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눈은 우리를 속인다. 한번 볼 때마다 눈을 깜박이지 않는 한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원주의 개념이 생겨났을 것이다.
 
오늘 좌선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세 번 자세를 바꾸었고 새김도 확립되지 않았다. 망념과 망상속에서 집을 지었다. 그러나 방법은 알고 있다. 오늘만 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다.
 
사람들에게 행선과 좌선은 무의미해 보인다. 또한 무가치해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에 가장 의미가 있고 가장 가치가 있다. 그 첫 번째 출발점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2023-08-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