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폭력이다
책을 백권 만들었다. 일생일대 큰 사건이다. 처음 글을 썼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사십대 실직자가 더이상 취업이 안되어서 작은 사무실을 직장처럼 다니던 시기에 끄적거린 것이 시초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매일 쓰다 보니 해가 갈수록 축적되었다. 블로그 생일날이 되면 자축 글을 썼다. 처음 누적조회수 10만명을 돌파했을 때도 자축했다. 100만명, 200만명에서 800만명에 이를 때까지도 자축했다. 이번에는 100권 만든 기념으로 썼다.
글이라고는 배워 본 적이 없다. 이전에 글이라고는 써본적이 없다. 개인사업, 일인사업, 자영업을 하다보니 시간이 무한정 남았다.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많은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니 시간이 잘 갔다.
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지 않다. 아마 출신이 미천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니 글에서 종종 "나는 비주류이고, 비급이고, 삼류이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나는 질투도 많다. 상대방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인정받고자 한다. 나는 관종, 관심종자인지 모른다.
글을 쓰는 사람은 관종이 될수밖에 없는 것 같다. 왜 그런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것은 관심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는 자랑질로 넘쳐나는 것 같다.
글이 자랑으로 비추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가족이야기는 쓰려 하지 않는다. 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세을 것이 없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만 있을 뿐이다. 써서 이익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자식이야기, 손주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진정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글을 쓰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허물이 되는 행위이다. 아무리 글을 잘 썼다고 해도 불만족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글을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견이 발생하면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그럴때 쓰는 말은 "그렇군요."라는 말이다. 긍정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부정인 것 같지만 또한 그렇지도 않다.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말이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의 말이다.
위빠사나 스승이 말한 것이 있다. 그 말은 "그렇네, 그렇군, 그랬구나."라는 말이다. 이 말은 업을 짓지 않는 말이다. 왜 그런가? 작용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잘 사용하면 적이 있을 수 없다. 상대방도 배려해 주면서 자신도 지켜 내는 말이다. 각자, 깨달은 자의 언어라고 볼 수 있다.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 들은 것이 있다. 전재성 선생은 "언어는 폭력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그런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호성의 말이 그렇다. 마치 담벼락에 써 놓듯이 짤막한 말이 그렇다. 페이스북에서는 큰 사이즈 글씨체에서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 투쟁하는 사람들 글에서 주로 발견된다.
글만 폭력일까? 사진도 폭력이다. 사진 역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심지어 커팅처리하고 포토샵 마사지까지 한다. 마스크가 되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주 보면 식상하게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도 심상만 못하다.
수행자의 허물은 크게 보인다. 머리카락같은 작은 허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인다. "저 스님은 왜 수행은 하지 않고 부업에만 몰두할까?"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저 스님은 바라밀행을 닦는 것일까? 수행은 다한 것일까?"라며 의문해 본다. 스님이니까 당연히 참선은 매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써 놓은 것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범부가 에스엔에스에서 글 쓰는 것 자체가 허물인데 수행자의 허물은 오죽할까?
스님중에는 본분사에 열중인 수행자들도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리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각묵스님을 들 수 있다. 디가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를 번역했다. 그리고 다수의 논서를 번역했다.
각묵스님이 유튜브 영상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이라는 말이다. 초기불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호가 틀릴 수 있다고 말해본다.
잘 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된다. 특히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진리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각묵스님의 행복론도 예외가 아니다.
행복을 말하는 스님들이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행복을 말한다. 행복투어라고 해서 전국을 돌아 다녔다. 안양에 왔었을 때 두 번 현장에 갔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사람들은 행복을 바란다. 지금 행복한 사람은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지금 불행한 사람은 이 불행이 끝나서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길 바란다. 수행자들도 그럴까?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감각적 행복도 있고 선정의 행복도 있고 궁극적 행복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궁극적 행복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고 했다.
궁극적 행복은 열반의 행복을 말한다. 열반의 행복이 아닌 행복은 유사행복, 가짜행복이 된다. 그래서 현법열반론이 나왔을 것이다. 자아를 가진 자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고 한다.
행복은 느낌에 대한 것이다. 행복이라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행복감이다. 그런데 행복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조건이 바뀌면 금방 사라진다. 감각적 쾌락의 행복도 그렇고 선정의 행복도 그렇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떤 것일까?
사리뿟따 존자를 법의 장군이라 한다. 부처님이 붙여준 칭호이다. 수타니파타 '셀라의 경'에 근거한다. 하루는 법의 장군 사리뿟따가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며 말하고 돌아다녔다. 이 말은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중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열반의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범부들이 말하는 행복은 행복감이기 쉽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행복, 열반의 행복은 느낌이 "툭" 끊어진 행복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행복한 느낌이 없는 행복에 대하여 최상의 행복, 열반의 행복이라고 했다.
흔히 이고득락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니까야에는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불교 전도사 각묵스님은 유튜브 영상에서 이고득락을 말하면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궁극적 행복에 대한 것이다. 행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역설적으로 궁극적 행복인 것이다. 반대로 행복감이 있다면 느낌이 있기 때문에 궁극적 행복이 될 수 없다. 오욕락에 따른 감각적 쾌락의 행복이나 선정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스님들은 행복을 말한다.
최근 망갈라경 번역 논란이 있었다. 블로거가 허정스님의 행복경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망갈라경은 길상, 축복, 행운, 번영의 의미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즐거운 느낌, 즉 행복으로 번역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블로거의 외침은 영향력 있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수년전 미산스님의 행복경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 했었다. 그러나 한국불교 스님들은 행복이라는 말을 좋아 하는 것 같다. 그 뿌리는 아마 법정스님으로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본다.
법정스님은 70년대에 수타니파타와 법구경을 번역했다. 아마 일본 나까무라 하지메 역을 중역했을 것이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 미산스님, 허정스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행복경으로 번역했다.
행복,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각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열반의 행복에 대해서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씀하셨다. 열반의 행복을 제외한 행복에 대해서는 무상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요즘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다. 부처님은 범부의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라도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영원하다고 보았고 행복하다고 보았고 자기라고 보았고 건강하다고 보았고 안온하다고 보았다면 그들은 갈애를 키운 것이다. 갈애를 키운 사람은 집착을 키운 것이다. 집착을 키운 사람은 괴로움을 키운 것이다. 괴로움을 키운 사람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부터 해탈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S12.66)
상윳따니까야 '성찰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범부의 행복에 대해서 갈애를 키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갈애는 집착의 조건이 된다. 집착하게 되면 결국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귀결된다. 행복을 추구하면 괴로움으로 귀결됨을 말한다.
초기불교 전도사 각묵스님은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열반의 행복을 말했다. 법륜스님은 행복투어를 했다. 옥스포드 박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미산스님은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했다. 불교개혁의 기수 허정스님도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즐거운 느낌이기 쉽다. 즐거운 느낌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갈애하게 된다. 갈애는 집착이 되고 집착은 업이 된다. 업의 존재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되어서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한 이유가 된다.
언어는 폭력이라고 했다. 사진도 폭력이라고 했다. 이렇게 쓰고 싶은 말만 쓰는 것도 폭력일 것이다. 더구나 법명까지 거명하며 저격했다. 이 업보를 어찌할 것인가? 진리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위안 삼는다.
2023-08-09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인다까 사야도와 영상통화를 (0) | 2023.08.10 |
---|---|
북콘서트 준비를 하고 (0) | 2023.08.09 |
백권당 시안을 확정하고 (0) | 2023.08.07 |
나도 한때 저와 같던 때가 (0) | 2023.08.06 |
블로그는 내 삶의 전부, 블로그 개설 18주년에 (0) | 2023.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