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는 오늘도 달린다, 재가안거 16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15. 12:01

나는 오늘도 달린다, 재가안거 16일차

 

 

오토바이로 인도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도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했다. 인도 동쪽 끝 아삼주까지 갔다. 미얀마로 넘어 가려 했으나 가지 못했다. 그는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이번에는 2천키로를 달려서 다람살라까지 가고자 한다.

 

오토바이 여행자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 목적지도 없고 계획도 없다.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내키는 대로 여행한다. 마치 방랑자처럼 이 대륙 저 대륙을 다닌다. 이런 삶이 한편으로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좌선하는 것에 대하여 달리는 것으로 보았다. 오토바이 여행자가 오토바이 하나에 의지해서 달리는 것처럼 좌선행자는 호흡에 의지하여 새김의 끈을 놓지 않고 달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어디인가?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한국테라외다불교 안거철을 맞이하여 재가안거를 하고 있다. 매일 한시간씩 좌손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다면 좌선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열반과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이번 안거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해당되고 견해청정에 해당된다.

 

이번 안거법회에서 대장로가 당부한 것이 있다. 안거에 임할 때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했다. 기초중의 기초이다. 생멸을 보라는 것도 아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기초부터 닦으라는 말과 같다.

 

목표와 목적은 정해졌다. 목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시간은 앉아 있는 것이다. 이는 몸을 길들이는 것도 되고 몸을 만드는 것도 된다. 마치 운동하는 사람이 근육을 만드는 것과 같다. 목적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것이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과 같다.

 

재가안거 16일차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특히 좌선은 한시간을 채우고 있다. 오늘 좌선은 어땠을까? 어제와 마찬가지로 극기훈련이 되었다. 한시간 앉아 있었다는데 큰 의미를 둔다.

 

 

수행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 그날 다르다. 같은 날이라도 아침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다. 다만 노력은 있어야 한다. 노력하다 보면 극적인 반전이 일어 날 수 있다. 마지막 10분을 남겨 놓고 성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리에 민감하다.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에 신경 쓰인다. 도심에서 차량소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귀마개가 도착하면 나을지 모른다. 전자제품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신경이 쓰인다. 저음 저주파수로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 호흡하는 것과 주기가 같다.

 

수행환경은 중요하다. 부처님도 숲이나 나무아래, 빈집, 묘지, 동굴에서 수행하라고 했다. 고요해서 좋은 것이다. 눈은 감으면 보이지 않지만 귀는 막을 수 없다. 도심에서 수행환경이 좋지 않은 것은 청각에 따른다.

 

좌선 중에는 호흡을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배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면 집중이 된다. 사띠가 확립되는 것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사띠)이라는 밧줄로 묶어 놓는 것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마음이 대상에 가 있으면 시끄러운 줄 모른다. 유튜브 보는 것에 집중해 있으면 전철지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이 가 있다면 소리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좌선 중에 집중이 되지 않으면 망상이 일어나기 쉽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망상이 생겨나서 스토리를 형성한다. 매우 짧은 순간이다. 일각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으면 설령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만리장성은 쌓지 않는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이곳저곳 아픈 곳이 생긴다. 다리 통증이 대표적이다. 이번 좌선에서는 무릎이 시큰거렸다. 이전에는 다리가 마비되어 끊어질 듯 아팠으나 이번에는 무릎시큰거림으로 인한 통증이 있었다.

 

무릎이 시큰거릴 때 이는 강력한 새김의 대상이 된다. 호흡보다 더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시큰거림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위빠사나이다.

 

시큰거리는 무릎을 관찰했다. 이럴 때는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나의 시큰거림이 아니라 타자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좌선에서 통증은 반가운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통증을 제3자적 입장에서 지켜 보면 된다. 그러면 통증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멸을 지속하는 것이다.

 

오늘 한시간 좌선하면서 집중이 되지 않아 망상속에서 보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생각이 일어나서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를 눈치 챘을 때는 스토리가 완성되어 있었다. 이럴 때 망상인줄 알고 다시 원래 대상으로 돌아 가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으로 돌아 오는 것이다.

 

소음으로 인하여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 흘러 갔다. 그러나 더디게 갔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듯이 기합받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지나갔다. 이럴 때 빨리 끝났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여기서 끝내 버릴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간사한 마음으로 보았다.

 

간사한 마음에 속지 않아야 한다. 다시 대상에 집중했다. 끝나기 10분이 남았을 때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마지막을 잘 장식하고 싶었다. 마지막 10분동안 집중하면 이전 것 못한 것에 대하여 보상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무릎시큰거림을 볼 수 있다. 마치 손님처럼 통증이 온 것이다.

 

무릎통증은 물질적인 것이다. 이를 아는 마음은 정신적인 것이다. 통증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런 통증을 내것이라고 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다리를 풀어서 통증이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통증은 조건발생한 것이다.

 

통증은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통증은 내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타인이 보는 것처럼 통증을 지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켜 보고 있는 마음도 생멸한다. 통증과 새김이 쌍을 이루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내 것은 없다. 조건발생의 연속이다.

 

어느 것이든지 조건발생하지 않는 것이 없다. 걸어가는 것도 그렇다. 걸을 때 내가 걷고 있다고 본다면 범부가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 걷는다고 보아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있다면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이 있다. 대상은 물질이기 쉽다. 그런데 물질은 반드시 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질은 매우 광대하다. , , , 풍 사대도 물질에 해당된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도 물질로 본다. 이는 풍대의 작용으로 본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가려고 하는 것이 정신+ 가는 것이 물질”(2133)이라고 한다. 가려고 하는 것은 의도를 말한다. 가는 것은 행위로서 물질을 말한다.

 

행선할 때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의도 없이 다리를 들 수 없다. 이때 다리를 들려는 의도는 정신에 대한 것이다. 다리를 들어서 이동하는 행위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의도와 행위는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이다. 의도-새김, 행위-새김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의도해서 내가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수레바퀴의 비유를 들 수 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바지라 장로니가 읊은 게송이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굴대와 바퀴, 수레 차체, 수레 채 등의 여러 장치, 부품들이 하나의 일정한 형태로 각각의 위치에 알맞게 조립되었을 때 수레라는 명칭만 있다. 하나하나 부분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빠라맛타 실재성품으로서의 수레라고 하는 것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무, 대 나무 등 집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이 하나의 일정한 형태로 공간을 에워싸고 있을 때 집이라는 명칭만 있다. 하나하나 부분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빠라맛타 실재성품으로서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 둥치와 줄기, 가지, 잎 등 나무의 여러 부분들이 하나의 일정한 형태로 모여져 있을 때 나무라는 명칭만 있다. 하나하나 부 분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빠라맛타 실재성품으로서의 나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133-134)

 

 

수레라는 명칭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수레를 분해해 보면 수레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것도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와 같이 다섯 취착무더기(五取蘊)들이 있을 때, 즉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가 하나의 덩어리로 차례대로 생겨나고 있을 때 중생, 혹은 개인이라는 명칭만 있을 뿐, 하나하나 법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즉 물질과 정신, 다섯 취착무더기의 성품법들을 하나하나 세밀히 관찰하면라고 하는 자만으로 집착하는 것, 혹은자아라고 사견으로 집착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집착하는 것의 토대가 되는 (영혼, 혼령 등으로 부르며 집착하는중생이라고 하는)것은 빠라 맛타(직접 알 수 있는 성품= 본래 존재하는 대로 바른 성품)로는 없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135)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라는 말이다. 오취온으로 인간은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몸을 내몸이라 보고, 이 느낌을 내 느낌으로 보고, 이 마음을 내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색, , , , 식 다섯 가지로 분해해서 관찰하면 나라는 것은 사라진다. 마치 마차를 분해 했을 때 부속품만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바지라 장로니는 나라는 명칭에 대하여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라고 한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왜 의미 없이 왔다갔다 걷기도 하고, 한시간 버티며 앉아 있는가? 극기훈련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물질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 몸 또는 이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 내몸 또는 내마음이 아닌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아야 한다.

 

좌선하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배의 움직임과 이를 새기는 마음만 있다. 내가 배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내가 호흡하는 것은 아니다. 호흡은 물질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때 현상을 아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계속 생멸한다.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이다. 이런 생멸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재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행선을 할 때 누가 발을 움직이는가? 이런 질문은 타당하지 않다. 의도가 있어서 발을 움직이는 것이다. 누가 의도하는가? 이런 질문도 타당하지 않다. 연기법에 따르면 누구도 의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의도하는 자가 있다면 모든 것을 자신이 만드는 것이 된다. 자신이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행선을 할 때 발을 이동하는 것은 의도에 의한 것이다. 이런 의도는 정신적 작용에 따른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발을 움직인다. 이는 물질적 작용이다. 이와 같이 정신과 물질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S12.21)라고 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정신과 물질의 현상만 있게 되는데 이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에 따른다. 이런 연기법에서 나라고 할만한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 갈대 묶음의 비유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벗이여, 예를 들어 두 갈대묶음이 서로 의존하여 서 있는 것처럼 벗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의존하여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 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의존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의존하여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의존하여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의존하여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의존하여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의존하여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의존하여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 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납니다.”(S12.67)

 

 

사리뿟따존자가 말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은 두 갈대 묶음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은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송에 따른다. 또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난다.”(S12.67)라고 하는 명색과 의식의 상호 관계에 따른다.

 

행선에서 누가 발을 옮기는가? 이런 질문은 타당하지 않다. 범부는 내가 옮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는 오온이 옮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오온은 수레의 부품과도 같은 것이다. 수레를 분해해서 놓고 보면 수레라고 할만한 것이 없듯이, 나를 오온으로 분해해 놓고 보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이번 안거에서 대장로는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했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마치 제3자가 관찰하듯이 봐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는 오로지 물질적-정신적 현상만 있다. 여기에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행선에서 발을 이동할 때 의도와 행위와 이를 아는 마음만 있다. 여기에도 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이는 연기법에 따른다.

 

연기송 전송을 보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것이다. 또한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명색과 의식도 이것과 저것에 해당된다. 이는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서 해서 명색이 생겨난다.”(S12.6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명색과 식이 상호의존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색연식(名色緣識)’식연명색(識緣名色)’이 된다.

 

명색연식과 식연명색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이다. 우리 일상의 삶은 명색연식과 식연명색에 따른다. 그래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조건발생적 연기에 따른다. 이렇게 연기가 회전된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나라는 실체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라는 것이 있다면 명칭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그 순간에 새기는 것을 통해서만 사실대로 바르게 알 수 있다. 이렇게 고유특성을 그 법들이 생겨나는 순간에 새기는 것을 통해서, 즉 새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나라고 할 만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단지 성품법들일 뿐이다라고 알고 보고 이해하는 것을견해청정이 라고 한다. 자아사견이라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사라지게 하는 앎과 봄 이라는 뜻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138)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려는 목적이 잘 설명되어 있다. 결국 우리 몸과 마음에는 자아라는 것은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렇게 알고 이해하고 보는 이의 앎과 봄을사실대로 바르게, 여실하게 봄, 또는 보는 지혜, 즉 여실견(yathābhatadassana: 如實見)’이라고 한다.”(2, 135)라고 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어서 관찰하면 오로지 정신적 물질적 현상만 있는 것을 알게된다. 이를 여실견이라고 한다. 이러한 여실견에 대하여 견해청정 (diṭṭhi visuddhi)’ 또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paricchedañāa)’라고도 한다. 이번 안거에서 추구하는 목적이다.

 

오늘 좌선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목적은 정해져 있다. 목적없이 계획없이 내키는대로 달리는 것은 아니다. 방향은 정해져 있다. 이번 안거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방향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 길로 주욱 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달린다.

 

 

2023-08-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