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왜 정신과 물질을 새기라고 했을까? 재가안거 18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17. 11:04

왜 정신과 물질을 새기라고 했을까? 재가안거 18일차

 

 

지금 이 마음은 지극히 평온하다. 아침 햇살이 창의 블라인드에 빛난다. 사무실 초목은 싱싱해서 위로 솟구쳐 있다. 수행기를 작성하는 자판에 탄력이 붙는다. 지금 시각은 오전 846분이다.

 

재가안거 18일째이다. 매일 신기록을 새우고 있다. 일생일대에 있어서 이런 날은 없었다. 매일 한시간 좌선을 하며 후기를 작성하던 날은 없었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테라와다 안거가 끝날때까지 가는 거다.

 

 

오늘 아침 한시간 좌선을 마쳤다. 대체로 만족한다. 어느 정도 집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선을 했기 때문이다. 막바로 앉기 보다 행선을 하면 좌선에 도움을 준다.

 

육단계 행선을 했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육단계 행선이다. 발을 뗄 때가 중요하다. 발을 떼기 전에 다른 쪽 발이 누른 것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동시에 발을 누르고, 동시에 발을 떼게 된다. 새김이 약해진다.

 

행선을 하다 보니 나만의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왼쪽 발을 누를 때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인다. 중심을 잡은 상태에서 누른 것을 확인한 다음에 오른쪽 발 뒤꿈치를 든다. 발을 떼는 것이다. 다음에는 발 위꿈치를 들면 드는 것이 된다.

 

발을 내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발을 뗄 때는 뒤꿈치부터 들고 이어서 앞꿈치를 든다. 그러나 발을 내릴 때는 발을 수평으로 해서 내린다. 발이 수평이 된 상태에서 바닥에 골구루 닫게 한다. 발을 디디는 것이다. 다음에는 누르기인데 이때 앞꿈치를 누른다. 앞꿈치 누르기를 확인 한 상태에서 오른쪽 발 뒤꿈치를 들어서 뗀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발을 뗄 때는 발의 뒤꿈치를 들어서 떼고 이어서 앞꿈치를 든다. 이것이 떼기와 들기이다. 그러나 발을 디딜 때는 발을 수평으로 해서 바닥이 고루 닫게 한다. 이어서 발을 누른다. 누를 때는 앞꿈치에 힘을 준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행선방식이다.

 

행선을 할 때 육단계행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다 보면 설 때가 있다.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 서는 것이다. 서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훝어야 한다. 이를 스캔한다고 말한다.

 

몸을 어떻게 스캔하는가? 마음을 먼저 머리에 둔다. 그러나 머리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눈으로 내려 온다. 마음을 눈에 두기는 쉽다. 눈을 껌벅거리면 촉촉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코에 마음을 둔다. 코를 벌렁거리면 느낄 수 있다. 다음에는 입으로 내려온다. 입술이 닿는 부위의 촉촉함을 느낀다.

 

가슴에서는 벌렁거림을 알 수 있다. 배에서는 부품과 꺼짐을 알 수 있다. 허벅지는 한번 힘주면 근육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무릎도 장딴지도 힘을 주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발바닥으로 간다. 발다박에 닿는 감촉으로 알 수 있다.

 

서 있을 때 세 번 훝는다.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역순으로 훝는다. 그리고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한번 더 훝는다. 이렇게 세 번 훝고 난다음 방향전환을 한다.

 

방향전환 할 때는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의도가 먼저 있고 나서 움직임이 있다. 의도 없는 움직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의도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새기고자 노력한다.

 

이번에 행선하는 방법을 새로 계발했다. 발을 뗄 때와 발을 누를 때를 분리해서 새기는 방식이다. 이렇게 했다니 육단계 행선 전과정을 빠짐 없이 새길 수 있다. 그 결과 행선에 재미를 붙였다.

 

행선하는 방법을 모르면 행선은 재미가 없다. 아무런 의미 없이 왕래하기 쉽다. 그러나 움직이는 전과정을 새기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마하시방식에서 행선을 한시간 하라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한시간 좌선을 하고 있다. 이번 안거기간 중에 한시간 좌선은 의무사항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가거나 행사에 참여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한시간 앉아 있을 여유가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는 10분만이라도 앉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후기를 써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된다.

 

 

어제 귀가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빤냐와로 대장로가 안거법회 입재 때 말한 것이 크게 다가 온 것이다. 대장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안거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했다. 한국 스님들 법문에서는 이런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대장로는 왜 정신과 물질을 새기라고 했을까? 뜬금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안거를 하는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깨달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어제 귀가길에 불현듯 생각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안거를 하면 화두를 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두를 하나 받아서 안거기간 동안 천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정신물질을 보라고 말한다. 법문중에서도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어제 오후에 유튜브를 보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 스님들과 불자들이 미얀마 순례를 갔는데 순례지에서 어느 미얀마 스님이 법문 중에 정신물질을 ㅂ십시오.”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미얀마 스님은 왜 한국의 스님들과 불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한국스님들과 불자들은 미얀마 스님이 말한 정신과 물질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아마 대부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중요성을 실감할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새삼 이렇게 물어 본다.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본래불일 것이다. 이는 한국스님들이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한국선불교에서는 내가 본래 부처라고 말한다. 그래서 본래 부처인 나를 찾자는 수행을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라와다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본래 나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서부터 시작된다.

 

담마마마까를 창건한 혜송스님이 있다. 언젠가 혜송스님의 밴드에서 정신물질을 관찰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스님이지만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수행했기 때문에 정신물질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미얀마 스님들은 거의 대부분 정신물질을 관찰하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정신물질을 새기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자아관념을 타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두를 들어서도 자아관념을 타파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선어록을 보면 갖가지 기행이 있다. 때로 몽둥이도 등장하고 고함소리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를 부수기 위한 것이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알려 주기 위해서 주장자로 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 스승들은 자아개념을 부수기 위해서 정신과 물질을 새기라고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새기면 왜 자아개념이 부수어질까? 이는 행선이나 좌선 중에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새기면 알 수 있다. 어떤 것인가? 행선을 예로 들 수 있다.

 

행선할 때 발을 든다. 그런데 발을 들 때는 의도가 있어야 든다는 것이다. 이런 의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내가 드는 것일까? 그런 나는 있는 것일까?

 

발은 의도가 없으면 들리지 않는다. 몸은 정신이 없으면 푸대자루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대념처경에서는 양쪽 입구로 육도, 적미, 강낭콩, 완두콩, 기장, 백미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곡식으로 가득 채운 푸대 자루”(D22.7)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 몸은 입구와 출구가 있는 푸대자루와 같은 것이다. 그 푸대자루 안에는 갖가지 장기가 들어 있다. 그래서 이 몸 속에는 머리카락, 몸털,… 심장, 간장,… 창자, 간장막,…, 뇌수,..가래, 고름, ,…관절액, 오줌이 있다.”(D22.7)라고 했다.

 

우리 몸은 갖가지 장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우리 몸은 음식이 공급되면 신진대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나의 의지와 관련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몸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몸을 나의 것이라고 한다. 입구와 출구가 있는 푸대자루 같은 몸에서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몸은 의도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다리를 옮기고자 할 때 의도가 없으면 통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의도를 자신의 것이라고 본다. 이는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느 것이 내 마음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

 

마음은 정말 내것일까? 마음이 내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 먹은 대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이는 수타니파타 화살의 경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Stn.58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세상사는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마음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마음은 생각처럼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마음은 내것이 아니다. 이런 마음은 어떤 것인가? 법구경에서는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고 했다. 또한 마음에 대하여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마음은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또한 마음은 경망한 것이라고 했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늘 대상에 가 있다. 이런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다스려야 함을 말한다.

 

이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다. 마음이 내것이라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보았다.

 

 

첫째, 마음은 길들이기 힘들다.

둘째,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셋째, 마음은 제멋대로 간다.

넷째, 마음은 원래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49-151)

 

 

이것이 마음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알 고 있다. 너구나 네 번째 항목을 보면 마음은 원래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런 말은 충격적이다.

 

마음은 본래 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들은 정반대로 말한 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우 쿤달라 사야도는 마음은 여간해서는 선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선하지 않은 생각과 선하지 않은 대상에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수행자 개인의 성품이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한다.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 마음을 내버려두면, 마음은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51)라고 말했다.

 

마음은 본래 선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본래 선한 것이 아니라면 악한 것과 같다. 이런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악행을 지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제어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 딸라뿟따 장로는 다음과 같이 마음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했다.

 

 

“마음이여어떠한 경우이든 그대의 말을 들었다.

다생에 걸쳐 그대는 내게 항복하지 않았다.

내부에서 생겨난 것은 그대의 은혜를 입었고,

그대로 인한 고통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윤회했다. (Thag.1132)

 

마음이여그대가 우리를 사제로 만들고,

그대가 전사도왕도선인도 만드는 것이니,

언젠가 우리가 평민이 되고 노예가 되고

하늘사람이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 (Thag.1133)

 

“우리가 그대 때문에 아수라가 되고

그대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니,

언젠가 축생의 존재가 되고

아귀의 존재가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 (Thag.1134)

 

“시시각각 가면놀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대는 거듭해서 나를 해치려 하지 않겠는가?

광인을 희롱하듯나를 희롱하지 않겠는가?

마음이여어찌해야 그대가 내게 항복하겠는가? (Thag.1135)

 

“일찍이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이 마음은 즐거움을 쫓아 다녔다.

사나운 코끼리를 조련사가 갈고리로 제어하듯,

오늘 나는 그것을 철저히 제어하리라. (Thag.1136)

 

 

 

딸라뿟따 장로의 게송을 보면 마음이 내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음은 내것이아니기 때문에 제어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마음이 내것이 아님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왜 내것이 아닐까?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의식은 내가 아니다수행승들이여만약 이 의식이 나라면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수행승들이여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만약 이 의식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S22.5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내 것으로 본다. 특히 몸을 내것으로 본다. 얼굴은 세월에 따라 늙기는 하지만 본 바탕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럼에도 이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어 되지 않는 마음은 불선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을 내버려 두면 즐겁고 매혹적인 대상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스승들은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말한다. 테라와다 스님들 역시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말한다. 이렇게 테라와다불교에서 한결같이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나라고 하는 개념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행선할 때 발을 들어서 놓는다. 이럴 때 일반사람들은 내가 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위빠사나 수행자는 “‘내가 간다. 그가 간다라는 말은 단지 부르는 명칭일 뿐 이다. 갈 수 있는’, ‘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가려고 하는 마음 과 움직임들을 기본으로 하는 물질 무더기, 모임만 존재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451)라고 아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면 나라는 개념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도 내가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도와 행위와 새김에 따른 정신과 물질적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항상 나를 앞에 세운다. 그래서 내몸, 내마음이라고 말한다. 느낌도 내느낌이 된다. 이렇게 자아에 집착된 마음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우 쿤달라 사야도는 “ '일어남', '꺼짐', '앉음', '닿음'은 모두 의식이 없고, 알아차림이 없는 물질적 현상이다. 뒤이어 일어나는 알아차림은 모두 의식있는 마음으로, 정신적 현상이다. 이때 비로소 분명하고 꿰뚫어보듯 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04-305)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좌선을 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오로지 부품과 꺼짐이라는 물질적 현상과 이를 새기는 정신적 현상만 있게 됨을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새길 때 나라는 개념은 없다. 있다면 부품과 꺼짐, 그리고 새김이라는 빠라맛타만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라고 했다.

 

테라와다불교 재가안거 18일째이다. 오늘도 한시간 좌선을 했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다. 어제의 수행이 바탕이 되어 오늘을 향상시킨다. 때로 퇴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할수록 향상되게 되어 있다.

 

어제 귀가길에 문든 깨달음이 왔다. 작은 깨달음이다. 정신과 물질을 보라는 것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명상이라는 것이 단지 마음의 평화나 빛을 보는 등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보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됨을 알게 되었다.

 

 

2023-08-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