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누가 가고 누가 서는가? 재가안거 1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16. 12:06

누가 가고 누가 서는가? 재가안거 17일차

 

 

소리에 민감한 것 같다. 좌선 중에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잠시 좌선을 중단하고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예상대로 냉장고에서 나는 소리였다.

 

사무실에 소형냉장고가 하나 있다. 두 세달 전에 당근마켓에서 5만원 주고 산 것이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을 때 김치 등을 보관할 냉장고가 필요했다. 사무실 16년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냉장고 전원을 차단하면 냉장고에서 돌아가는 모터소리가 차단된다. 멀티 콘센트에서 코드를 제거했다. 그러나 번거로웠다. 멀티콘센트에 있는 스위치를 활용하니 편리했다. 한시간 후에 켜 놓으면 된다.

 

소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번에는 저음의 기계음이 났다. 사무실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마치 호흡의 주기와 비슷하다. 저주파수의 미세한 기계음이다. 아마 건물에서 나는 소리 같다. 이것 마저 제거할 수는 없다.

 

명상을 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는 사람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산속이 적당할 것이다. 도시라도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매미 소리가 맴맴하며 요란하게 울릴 때 어찌할 것인가?

 

산업현장에서 명상하기는 곤란하다. 망치소리가 들리는 공사현장도 좋지 않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있는 곳도 좋지 않다. 장사하는 사람이 내는 소리도 방해가 된다. 그래서 명상센터는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오늘도 한시간 좌선을 했다. 지금은 결과를 바랄 때가 아니다. 명상을 잘하기 위해서 몸을 길들이기 해야 할 때이다. 마치 야구 선수가 백번이고 천번이고 배트를 휘두르는 것처럼, 마치 농구선수가 골대에 백번이고 천번이고 공을 던지는 것처럼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해야 한다.

 

좌선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행선을 하는 것이다. 행선도 명상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워킹메디테이션이라 하여 이를 보수행, 걷는 수행, 행선이라 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행선을 좌선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양곤에 가면 마하시센터가 있다. 그곳에 가면 마하시사야도의 숙소가 있는데 놀랍게도 행선대가 있다. 붉고 단단한 목재로 되어 있는 행선대는 20여미터 된다. 마하시사야도도 매일 행선을 했을 것이다. 일반 숙소에도 행선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무실에 행선대를 만들어 놓았다. 간격은 30센티로 14보가 된다. 길이는 4.2미터이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20여분 행선을 했다.

 

행선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미얀마에서는 행선을 하지 않는 센터도 있다. 술룬이나 모곡센터에서는 행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하시계통에서는 반드시 행선을 하게 되어 있다.

 

행선을 해서 얻는 이익은 많다. 좌선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것은 의도일 것이다.

 

행선은 의도가 있어야 할 수 있다. 발을 옮길 때 의도 없이는 옮겨 지지 않는다. 이때 발을 옮기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번 안거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위빠사나 제1단계 지혜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행선을 하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뿐만 아니라 위빠사나 제2단계 지혜에 해당되는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지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가능하면 눈을 반쯤 뜨고 한다. 발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런데 행선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는 것이다. 마치 악기 연주자가 매일 똑 같은 곡을 반복할 때 요령이 생기는 것과 같다. 가수가 매번 똑 같은 노래를 부를 때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가는 것과 같다.

 

행선을 할 때는 육단계 행선을 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동작을 말한다. 이때 잘 되지 않는 것은 발을 누를 때와 뗄 때이다. 동시에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행선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동작 하나하나를 새기기 위한 것이다. 마음을 동작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움짐임을 분절해서 보아야 한다. 여섯 단계로 분절해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 것은 발을 누를 때 발을 뗄 때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곤란하다. 동시에 알아차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선하면서 한가지 요령이 생겼다. 한쪽 발을 누를 때 다른 한쪽 발은 떼지 않는 것이다. 잠시 멈추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발을 누른 것을 확인하고 나서 옮겨야 할 발의 뒤꿈치를 떼는 것이다.

 

행선을 자주 하다 보면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발을 뗄 떼는 먼저 뒤꿈치를 들어야 한다. 이를 발을 떼기로 본다. 그 다음에는 앞꿈치를 뗀다. 이를 발을 들기로 본다. 이렇게 발을 떼어서 들었을 때 여섯 단계에서 두 단계가 실행된다.

 

발을 미는 동작은 매우 스무스하다. 마치 미끄러지듯이 이동한다. 그러다 보니 마치 탈 것을 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건거를 타는 듯 하고 비행기를 타는 듯하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도 든다. 행선의 재미를 느끼게 해 준다.

 

발을 내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발을 내릴 때는 세 동작을 필요로 한다. 발을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말한다. 이때 딛는 동작은 발바닥을 평평하게 해서 바닥에 고루 닫게 한다. 그 다음은 누르는 것이다.

 

행선은 일없이 꾸준히 해야 한다. 때로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왕래해야 한다. 행선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일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108배라도 해야 수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행선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행선을 경시할 수 없다. 행선에서 오는 이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무엇일까?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이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초보자가 생각하는 수행은 습관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라기 보다는 수습(修習)이라는 말이 더 적당할 것 같다.

 

회사에서 수습사원이 있다. 정식직원으로 채용하기 전에 임시로 채용해서 일을 시키는 것이다. 인턴사원이라고도 한다. 수습기간을 거쳐서 정식사원으로 선발하기 위한 것이다.

 

수습이라는 말은 습관 들인다라는 말과 같다. 초심자에게 적합한 말이다,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 몸에 베개 하는 것이다. 초심자가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도 습관들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행선을 매일 하고 있다. 사무실에 행선대를 만들어 놓고 왕복한다. 여섯 단계 행선을 할 때는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 냈다. 여섯 단계를 분절하여 각 단계마다 새기는 방법을 찾아 낸 것이다. 발을 누를 때와 발을 뗄 때가 가장 문제가 되었는데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방법을 찾아 낸 것이다.

 

행선은 남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넓은 명상홀에서 행선한다면 남들이 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무실 행선대에서 행선한다. 이럴 때 여섯 단계를 알아차림하며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여섯 단계 행선에서 발을 누를 때와 발을 뗄 때 동시에 하면 안된다. 동시에 알아차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시차를 두어야 한다. 한쪽 발을 누를 때에 새기고 난 다음 다른 쪽 발 뒤꿈치를 들어야 한다. 이어서 앞꿈치를 든다. 뒤꿈치를 떼고 앞꿈치를 들면 여섯 단계에서 두 단계가 시행된다. 이어서 발을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이 따른다. 발을 내려서 디딜 때는 수평이 되어야 한다.

 

육단계 행선에서 발을 뗄 때는 뒤꿈치를 들어야 한다. 발을 디딜 때는 수평으로 해서 디뎌야 한다. 이번 행선에서 알게 된 방법이다. 이렇게 뗄 때와 누를 때 시차를 달리 해서 새기면 행선에서 재미를 느낀다.

 

행선은 여섯 단계 발의 이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방향전환할 때 서야 한다. 서서 있을 때도 행선하는 것에 해당된다. 서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에머부터 발까지 스캔해야 한다. 마음을 머리끝에서부터 시작하여 눈, , , 가슴, , 허벅지, 무릎, 장딴지, 발목, 발바박에 이르기까지 새기는 것이다. 세 번 새긴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서 있을 때도 마음은 대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 있을 때 새김이 없다면 잡념이 들어 올 것이다. 이럴 때 마음을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에 이르기까지 새기는 것이다. 마치 좌선할 때 마음을 호흡에 두는 것과 같다.

 

서서도 명상할 수 있다. 명상이라 하여 반드시 앉아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행동양식의 고찰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4)

 

 

 

네 가지 행동양식은 행, , , 와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하면 네 가지 중에서 행과 주를 고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네 가지 행동양식은 모두 몸관찰에 속한다는 것이다.

 

사념처에서 신념처가 있다. 몸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몸이라 하여 자신의 신체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몸관찰에 대한 항목을 보면 호흡새김,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관찰, 몸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서른두 가지 양상에 대한 혐오, 광대한 세계에 대한 정신활동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몸관찰 범주가 매우 넓다는 것을 말한다.

 

신념처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 즉 행, , , 와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움직이는 것도 몸관찰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선은 대표적인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하면 의도가 실리게 되어 있다. 움직일 때도, 서 있을 때도, 방향전환할 때도 의도가 실리게 된다. 몸은 의도에 따라 움직인다. 예를 들어서 서려고 할 때 서려고 하는 것은 정신이고, 서는 것은 물질이라는 것이다.

 

서는 것이 어떻게 물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의도가 실려서 행위가 있게 되는데 이때 행위를 물질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는 몸관찰의 대상이 된다.

 

행선은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물질적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몸이 움직인다. 몸의 암시가 있어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행과 주가 주관찰 대상이 된다. 이는 몸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가는 것이고 누가 서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위빠사나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우문이다. 이럴 때는 의도에 따른 몸의 암시에 의해서 가고 서고 방향을 전환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 중에는 암시의 물질도 있다. 이는 추상물질을 말한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게 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몸의 암시(kāyaviññatti)’라고 한다.

 

몸의 암시란 무엇인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몸의 암시에 대하여 마음에서 생겨난 바람의 세계가 나아감 등을 일으키는 것을 통해서 함께 생겨난 물질적인 신체를 지지하고 보존하고 활동시키는 조건으로서의 형태변화이다.”(vism.14.61)라고 설명해 놓았다.

 

몸의 암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적 물질이다. 의도 있을 때 몸의 암시로 인하여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굽힐 때와 펼 때에는 굽히려고 하는 것과 펴려고 하는 것이 따로 + 굽히는 것과 펴는 것이 따로 + 그것을 새기는 것이 따로”(2, 127)라고 설명했다.

 

행선을 할 때는 육단계로 한다. 이때 발을 뗄 때 의도가 있어야 한다. 의도가 없다면 발이 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따르면 의도가 있을 때 추상물질에 해당되는 몸의 암시가 있다는 것이다. 몸의 암시에 의해서 발이 떼지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세 가지가 작용이 있다. 이는 발을 떼려는 의도, 발을 떼는 것, 발을 떼는 것을 새기는 것,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이는 의도, 행위, 새김에 대한 것이다.

 

행선애서 의도는 정신적 작용이고, 행위는 물질적 작용이고, 새김은 정신적 작용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발을 떼는 행위가 정신적-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자아가 있어서 발을 떼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 행, , , 와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네 가지 행동양식(四威儀路: , , , )에 대한 관찰을 말한다. Smv.766에 따르면 개나 승냥이 등이 걷는 경우우리는 걷는다라고 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얇은 삶의 망상을 끊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는 지각을 제거하지 못하고 명상수행이나 새김의 확립에 대한 닦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승의 앎은 뭇삶의 망상을 끊고 자아가 있다는 지각을 제거하고 명상수행이나 새김의 확립에 대한 닦음이 된다.

 

여기서는누가 가는 것인가?’ ‘누구의 감인가?’ ‘어떠한 원인으로 가는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누가 가는가? 어떠한 삶도 가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사람도 가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감인가? 어떤 삶의 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감도 아니다.

 

어떠한 원인으로 가는가?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의 침투 (cittakiriya vāyodhātuvipphāra)에 의해서만 간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나는 가겠다라고 마음이 일어나고, 그것이 운동을 발현시킨다.’라고 분명히 안다.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의 침투에 의해서 전신이 앞으로 이끌어져서 감이라고 불린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디가니까야 1725번 각주)

 

 

누군가 내가 간다라고 알면 개나 승냥이의 앎과 같다고 했다. 왜 그런가? 그런 나는 없기 때문이다. 오온을 분석적으로 고찰하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간다라거나 내가 선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범부가 하는 말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내가 간다라거나 내가 선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정신과 물질 현상을 이해한 수행자는 풍대(風大), 즉 바람의 세계에 의해서 몸이 움직인다고 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된 의도와 몸의 암시와 행위와 새김에 의한 것이다.

 

행선을하고 좌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홀에서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한다면 남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 수행처에서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하는 것은 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행선으로 몸관찰 했을 때 가거나 선다. 이럴 때 누가 가는가? 누가 서는가?’라고 물으면 우문이다. 또한 내가 간다거나 내가 선다라고 말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자가 아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행, , , 와에 대하여 이 몸의 자세와 관련된 새김은 우리의 신체의 행동에 대한 일상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모든 동작에 대한 세밀하고 지속적이고 올바른 알아차림과 몸의 대리자로서의 분석적 검토-자아의 환상을 몰아내려는 의도를 가진- 를 포함하는 것이다.”(Mdb.1191)라고 설명해 놓았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이나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의 환상을 몰아내려는 것이다. 오온을 분석적으로 관찰했을 때 정신물질적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정형구처럼 나온다.

 

 

그렇게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별하여 아는 이는 다음과 같이 숙고하여 결정할 수 있다. , “앉음, , 굽힘, , , 들림 등의 여러 동작 하나하나를 정신만으로도 성취하게 할 수 없다. 물질만으로도 성취하게 할 수 없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 모두가 결합해야만 성취 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성취하게 할 수 있는 이 물질과 정신, 두 가지를 집착하여나는 앉는다. 나는 선다. 나는 간다. 나는 굽힌다. 나는 편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라는 등으로 부르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 하자면 앉음, , 감 등을 행할 수 있는’,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단지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라고 반조하여 결정한다.”(2, 133)

 

 

오늘 재가안거 17일차이다. 좌선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했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암송을 하고 행선 했다. 암송과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가져오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러나 길이 잘 들여지지 않았다. 몸만들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좌선이나 행선을 할 때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발을 누르고 뗄 때 시간차 두고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런 방식으로 육단계 행선을 하면 지루하지 않고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오늘 좌선할 때 방식을 달리 했다. 손을 달리 놓은 것이다. 이전에는 두 손을 겹쳐서 엄지를 마주 보게 했다. 선원 법요집 그림에서도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나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에 올려 놓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안정된 삼각대를 형성하는 것 같아서 몸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조치한 것 중에는 소음 차단도 있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를 차단한 것이다. 멀티콘센트 전원스위치를 한시간 차단하고 좌선에 임했다. 그러나 건물에서 나는 저주파의 미세한 기계음은 피할 수 없었다.

 

소리는 극복되어야 한다. 소리를 피하고자 심산유곡으로 갈 수 없다. 직장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최소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해야 한다. 전면에서 호흡을 보면 소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침에 일찍 집에서 나왔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수행준비를 했다.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는 등 예비수행을 한 것이다. 본 수행이라 볼 수 있는 좌선은 한시간 했다. 그러나 집중이 되지 않아 온갖 망상으로 보냈다.

 

일상에서 한시간은 매우 귀중한 시간이다. 좌선으로 한시간 할애 하는 것은 큰 결단이다. 이런 귀중한 시간을 망상으로 보낼 수 없다.

 

마감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해졌다. 십분이 남았을 때 보람 있게 보내고자 했다. 마치 생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가 시간을 효과 있게 보내고자 하듯이, 마치 마라톤에서 뛰는 자가 막판에 스퍼트 하듯이, 남아 있는 10분이라도 최대한 집중하고자 했다.

 

수행기를 쓰다 보면 오전이 다 간다. 수행한 시간보다 수행기 쓰는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럼에도 수행기를 길게 쓰는 것은 글로 표현하는 것도 수행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아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이다. 내가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서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의도와 행위와 새김에 따른 정신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안거에서 천착해야 할 것이다.

 

 

2023-08-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