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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권 담마와나선원, 법의 거울로 자신을 액면 그대로 비추어 보았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5. 17:32

103권 담마와나선원, 법의 거울로 자신을 액면 그대로 비추어 보았을 때
 
 
나의 선택은 옳았는가? 지나고 나면 드러난다. 그러나 현재 나의 선택은 최상의 선택이 된다.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이다. 설령 미래에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나의 선택에는 확신이 있다. 테라와다불교도 그렇다.
 
불교를 종교로 하고 있다. 이는 선택에 따른 것이다. 전에 타종교를 겪어 본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불교보다 더 나은 종교가 있다면 그쪽으로 갈 것이다.
 
불교도 불교 나름이다. 수많은 종파의 불교가 있다. 수많은 전통의 불교가 있다. 그 중에서도 테라와다불교를 선택했다. 나에게 잘 맞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그것은 디지털불교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직장생활 할 때는 전자상품 개발을 했었다. 회로설계를 하는 등 하드웨어 엔지니어로서 20년 일했다.
 
직장에서는 셋톱박스를 개발했다. 수출용 위성방송수신기를 말한다. 지금도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인쇄회로기판(PCB) 설계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전자기기는 대부분 디지털로 이루어져 있다. 2000년을 기점으로 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갈린다. 2000년 이전에는 아날로그 셋톱박스를 개발했었다. 2000년 이후에는 디지털이 대세가 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속적인 것인지 불연속적인 것인지로 알 수 있다. 아날로그가 연속적이라면 디지털은 불연속적이다. 끊어지면 불연속적인 것이다. 이는 TV화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날로그 TV의 경우 신호가 약할 때 선명하지 않다. 신호가 약해도 나오긴 나온다. 그러나 디지털의 경우 화면에 모자이크 현상이 나오면서 블랙아웃 처리가 된다. 이는 디지털이 1과 0이라는 2진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테라와다불교에 대하여 디지털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1과 0으로 똑똑 떨어지는 2진법을 보는 것 같다. 또한 디지털 논리를 보는 것 같다.
 
두 가지가 있을 때 이를 조합하면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 이는 사구분별에서 알 수 있다. 니까야라 불리우는 초기경전을 보면 경우의 수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경우 저런 경우 모두 고려해서 설명하는 식이다. 바로 이런 것이 디지털 논리와도 같은 것이다.
 
테라와다불교가 디지털 같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조건발생이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법으로 알 수 있다. 디지털에서도 조건이 중요한 요소이다.
 
다이오드나 트랜지스터는 도통이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 전압을 0.7볼트 이상 가해 주어야만 도통이 된다. 이는 로우(Low)에서 하이(High)로 되는 것과 같다. 제로에서 일이 되는 것이다. 없는 것(無)에서 있는 것(有)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디지털 논리에 의해서 집적회로(IC)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열반이다.
 
아날로그는 연결되어 있다. 중간에 끊어지는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디지털은 조건에 따라 제로가 되기고 하고 일이 되기도 한다. 이는 조건에 따른다.
 
십이연기는 대표적인 조건법이다. 십이연기의 연결고리는 조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건을 끊어 내면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조건법이 아닌 경우에는 열반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것 같다.
 
어떤 불교에서는 열반을 말하지 않는다. 해탈은 말하지만 열반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가 전체가 된다고 말한다. 이는 아날로그적 사고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끊어진 것이 없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공학도 출신에게는 초기불교가 딱 들어 맞는다. 초기불교를 계승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 역시 공학도 출신에게 딱 들어 맞는다. 부처님 가르침이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논리에 기반한다. 그래서일까 8만4천법문이나 되는 것 같다. 정확하게는 8만2천법문이다. 나머지 2천은 제자들이 설한 것이다.
 
초기불교는 2009년에 본격적으로 알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불교도 있었던 것이다. 청정도론을 보고 아비담마를 보았다. 사부니까야를 보고 쿳다까니까야 일부를 보았다. 지금도 초기경전과 논서를 보고 있다.
 
경전을 보면 볼수록 부처님에 대한 신뢰감이 들어간다. 부처님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초월적인 이야기나 신화적인 이야기를 모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려니” 한다.
 
불교공부는 해도해도 끝이 없다. 방대한 니까야뿐만 아니라 율장도 있고 논장도 있다. 그러나 길을 알려 줄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와로 스님 같은 분이 대표적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에 서울선원이 있다. 담마와나 선원이라고 한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다. 청파동에 가면 빤냐와로 삼장법사를 만날 수 있다.
 

 
담마와나선원과 인연 맺은지 5년 되었다. 이전에 법회에 참석한 적은 있지만 청파동에서 개원법회를 한 이후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찾게 되었다. 이에 글을 남겼다.
 
담마와나선원 5년 동안에 붓다의 날, 까티나 행사 등 주요법회에 참석하여 글을 남겼다. 이전 것까지 모아 보니 44개의 글 모음이 되었다. 이를 ‘103 담마와나선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다. 여기서 103은 103번째 책을 의미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스승이 없는 시대에
2. 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3. 법사의 조건은 무엇인가?
4. 테라와다불교와 조사불교
5. 왜 탁발법회라 하는가?
6. 담마와나선원 개원법회를 보고
7. 칠각지는 극도로 냉정한 상태
8. 담마와나선원 까티나축제 법요식
9. 한국테라와다불교 수계법회
10. 일주일에 한번쯤은
11. 오후불식의 팔계를 실천해 보았는데
12. 과보심으로서의 느낌
13. 아미담마의 꽃 인식과정 17단계
14. 수행은 지혜를 갖춘 사람만이
15. 왜 무색계천이 팔난(八難)에 속할까?
16.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17. 다섯 가지 감각기능과 재생연결식
18. 예비수행 네 가지에 대하여
19. 부정관수행승의 자결과 파괴업에 대하여
20. 서로가 서로 씻어 주는 지혜와 계행
21. 지혜가 일을 한다, 사사나 스님 인터뷰 법문
22. 2019년 담마와나선원 붓다의 날 행사 예고
23. 왜 한날에 세 가지 행사를 갖는가? 담마와나선원 ‘붓다의 날’ 
24. 명칭붙이기를 권장하는 마하시전통
25. 오직 관찰할 뿐,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나마-루빠(名色)
26. 2019년 담마와나선원 까티나 가사공양법요식
27. 세상에서 가장 검소한 옷
28. 빠알리법명 담마다사
29. 진리를 설하는 자의 목소리는
30.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행복이라 말하지 말라, 2020 안거법회
31. 2020 한국테라와다불교 까티나 가사법요식
32. 아홉 명의 수계동기 액자
33. 떼자사미 스님 공양청(供養請)을 하고
34. 한국에서 테라와다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35. 담마와나공덕회의 공양보시를 보면
36. 보름달은 마음을 충만하게 한다
37. 2021년 2565주년 ‘붓다의 날’에
38. 빤냐와로 스님이 KTX타고 서울에 온 것은
39. “삶이 지겹지도 않으세요?” 빤냐와로 스님의 윤회법문
40. 2021년 담마와나선원 가사공양의 날에
41. 나도 오늘 하루만큼은 스님처럼, 포살법회의 날에
42. 2022년 담마와나 까티나 가사공양 법요식
43. 수다원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서

44. 2023년 테라와다안거 입재법회
 

103권 담마와나선원_231005.pdf
7.88MB

 

 
주로 빤냐와로 스님에 대한 것이 많다. 붓다의 날이나 까티나 행사 때 스님이 대부분 법문 했기 때문이다. 또한 탁발법회라고 하여 탁발형식을 취했다.
 
개원법회는 2018년 6월에 열렸다. 이에 ‘담마와나선원 개원법회를 보고’(2018-06-17)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목차에서 6번째 항목이다.
 
개원법회 때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탁발하는 장면이었다. 처음 본 것이다. 말로만 듣던 탁발을 한국에서도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들이 탁발하고 재가불자들이 공양하는 장면을 보면 한국에도 테라와다불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같습니다.”(2018-06-17)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적 현실에서 탁발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그것이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 모르지만 율장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마치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것 같다. 이에 “한국불교에 새로운 보리수가 자라고 있습니다.”(2018-06-17)라고 글을 맺었다.
 
담마와나선원에서 법명을 새로 받았다. 빠알리법명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목차 9번째 항목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 수계법회’(2018-11-18)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실명도 있고 필명도 있고 법명도 있다. 모두 나를 대표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법명과 실명을 사용한다. 글을 마칠 때 날자와 함께 서명하는데 이는 글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와 같다.
 
담마와나선원에서 받은 법명은 담마다사(Dhammadasa)이다. 이 말은 ‘법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법경(法鏡)이 될 것이다.
 
니까야 도처에서 담마다사라는 말을 볼 수 있다. 디가니까야에서는 가르침의 거울에 대하여“아난다여, 고귀한 제자가 그것을 성취하여 그가 원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이와같이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는 법문은 이러한 것이다."(D16.39)라고 했다.
 
부처님은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의 행위를 비추어 보라고 했다. 거울은 액면 그대로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가르침에 거울에 비추어 보면 악도에 떨어질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테라가타에도 법의 거울에 대한 게송이 있다. 이는 “앎과 봄을 얻기 위해 가르침의 거울을 붙잡고 이 몸이 안팍으로 공허한 것을 관찰했다.”(Thag.395)라는 게송을 말한다.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을 보면 “뭇삶들이 거울로 자신의 몸이나 얼굴에서 장점이나 결점을 보듯이, 이와 같이 수행자는 자신의 존재에서 오염과 정화를 그대로 보는데, 그 통찰에 의한 앎을 여기서 가르침의 거울이라고 한다.”(ThagA.II.168)라고 설명해 놓았다.
 
담마다사라는 법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법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을 때 액면 그대로 보일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행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수시로 법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했다.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 나는 자주 성내는가, 나는 자주 성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는가,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는가,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분노하는가, 자주 분노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는가,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는가,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게으른가, 자주 열심히 정진하는가? 나는 자주 집중에 들지 못하는가, 자주 집중에 드는가?”(A10.51)
 
 
담마다사라는 법명은 빤냐와로 스님이 지어 준 것이다. 그때 당시 9명의 수계 동기가 있었는데 각자 개성을 파악하여 그 사람에 맞는 법명을 준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법명을 주면서 의미를 설명했다. 담마다사에 대해서는 “법을 보는 자로서 내가 말하는 것이 거울에 비치듯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설하라는 뜻입니다.”(2018-11-18)라 말했다.
 
테라와다 법명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글을 마칠 때는 반드시 날자와 함께 ‘담마다사 이병욱’이라고 법명과 실명을 함께 사용한다.
 
법명을 받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다름아닌 새로 태어남이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 주는 것과 같다. 테라와다불교 교단에 들어 왔으니 테라와다불교 불자로서 여법하게 살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수계받은 날자에는 시는 물론 분, 놀랍게도 초 단위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새롭게 태어난 날은 2018년 11월 17일 11시 15분 40초가 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불교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로지 집과 직장을 왕래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어느 때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교는 내가 선택한 것이다. 테라와다불교도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나의 선택은 항상 옳았을까? 대체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날 때도 있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시간과 관련이 있다. 시간과 함께 문제가 풀린다면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진짜 문제인 것이다. 팔고 중에서 원증회고(怨憎會苦), 즉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 그것이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사고와 팔고 같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 현실적으로 가장 괴로운 것 같다. 그런데 불교는 이런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어 줄 해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를 좋아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진리가 있다고 확신한다. 언제나 나의 선택은 옳았다.
 
 
2023-10-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