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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권 담마의 거울 2018, 수행자는 장님처럼 귀머거리처럼 바보처럼 살아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2. 14:28

106권 담마의 거울 2018, 수행자는 장님처럼 귀머거리처럼 바보처럼 살아야

 

 

카르페디엠,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말이다. 또한 이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라는 의미도 된다. 이렇게 본다면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이삼주전 양평 황화꽃 축제에 갔었다. 그때 안내판에 카르페디엠,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라는 말을 보았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지금 이 순간에 즐기는 일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느 페친이 글을 올렸다. 카르페디엠에 대하여 지금 여기서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성현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올린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 성현은 매우 현실적임을 알 수 있다.

 

페친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지금 여기에서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 여기에서는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페친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경전적 근거를 달라고 했다. 이에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물질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 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과거의 물질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물질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는 경전적 근거를 보내 주었다.

 

페친은 경전적 근거를 보았다. 그러나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문장을 지적했다. 어법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이다.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카르페디엠!”이라 하여 지금 여기서 즐거움(幸福)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런 행복에서 떠나라고 했다.

 

여기 도를 말하는 자가 있다. 도인이 도를 말하면 세상사람들은 귀 기울여 들어줄까? 사람들은 어떻게 도인을 어떻게 대할까?

 

노자 도덕경에 따르면 도를 대하는 세상사람들의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 번째는 상사문도 권이행지(上士聞道 勤而行之)이다. 이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라는 뜻이다.

 

두 번째는 중사문도 약존약망(中士聞道 若存若亡)이다. 이는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라는 뜻이다.

 

세 번째는 하사문도 대소지(下士聞道 大笑之)이다. 이는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 버린다.”라는 뜻이다.

 

자랑하면 안된다. 누군가에 자신이 수행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아런 말을 들으면 비난한다. 대개 도 닦는다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이는 세상에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을 말한다. 왜 그럴까? 도는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도인이 사는 방식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지만 도인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흐름을 거슬러 살아간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탐, , 치로 살아간다. 도인은 이와는 반대로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간다. 이렇게 정반대로 살아가다 보니 도를 말하면 크게 웃어버리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글 쓴지 17년 되었다. 일상에 대한 것도 있고 도에 대한 것도 있다. 도에 대한 것은 경전에 근거한 것이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일상에 대한 것도 쓰긴 쓰지만 가능하면 경전 문구라도 하나 집어 넣는다. 그러다 보니 글이 건조해지기 쉽다. 도에 대한 글이 되기 때문이다.

 

도에 대한 글을 모아 놓은 것이 있다. 블로그 담마의 거울이라는 폴더이다. 2018년 담마에 대한 글을 모았다. 모아 보니 모두 52개에 달한다. 이를 ‘106 담마의 거울 2018’이라고 이름 붙였다. 통산 106번째 책으로 20181월부터 12월까지 쓴 것이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초전법륜경에서 꼰당냐의 법안(法眼)에 대하여

2. 청정도론 교정을 보면서

3. 청정도론에서 본 아공법공(我空法空)

4. 윤회에서 시작점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

5. 삶을 좌절 시키는 방해업

6. 믿고 의지할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7. 이것’을 말하는 자들

8. 부서져 가는 몸을 보면서

9. 본래불(本來佛)사상과 무아(無我)의 가르침

10. ()으로 세상바라보기

11. 수행은 아무나 하나

12. “네죽음을 기억하라!” 사수념(死隨念) 공덕

13. 불교는 진보의 역사인가 퇴보의 역사인가

14. 사무량심과 십바라밀 관계

15.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

16.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으려면

17.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18.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하는 이유

19. 2018년 부처님오신날에

20. 감각적 욕망을 부추기는 악마의 속삭임

21. 사랑도 미움도 슬픔도

22. 연과내재론(緣果內在論)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유사성

23.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24. 책상을 탕탕치는 법문을 보고

25.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26. 퓨어담마(Pure Dhamma)에 대하여

27. 간답바(gandhabba)와 간땁바(gantabba)에 대하여

28. 식과 명색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29. 남녀차별하면 그는 악마

30. 법은 법을 지키는 자를 보호한다 

31. 눈 먼 사람처럼 귀 먼 사람처럼

32. 소유하는 것은 고통

33. 재물의 감옥에 갇혀

34. 목갈라나 존자의 최후

35. 소원이 이루어지는 보시의 조건 네 가지

36. 가죽 끈에 묶인 개()처럼

37. 성자(聖者)와 기녀(妓女), 목갈라나와 비말라

38. 찬나에 내려진 엄벌 브라흐마단다(梵罰)

39. 퇴전과 붙퇴전을 거듭하며

40. 불로소득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41.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42. 빠알리니까야를 알게 된 것은

43. 과학적 유물론과 허무주의

44. 니까야에서 보는 구마사(驅魔師)

45. 멸진청정(滅盡淸淨)에 이르는 길

46. 부처님이 말씀하신 단멸은

47.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살라는 것은

48. 여법(如法)한 죽음을 위하여

49. 인간으로 태어나야 하는 이유 

50. 한사람이 남아도 지도를

51. 사자, 코끼리, 황소로 묘사된 부처님

52. 여덟 가지 청법(請法)에 대하여

106권 담마의 거울 2018_231102.pdf
2.95MB

 

 

 

 

목차에서 16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으려면(2018-05-15)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글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행복감(幸福感)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행복한 느낌에 대한 것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으로 느끼는 오욕락을 행복이라 하는 것이다.

 

카르페디엠, 이 말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 즐겨라!”이다. 또 하나는 지금 여기를 헛되이 보내지 말라!”라는 뜻이다. 전자는 세속적이고 후자는 철학적이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카르페디엠은 세속적이다. 지금 여기서 즐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즐김은 행복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방송에서 행복을 말하는지 모른다.

 

스님도 행복을 말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은 행복투어를 했다. 전국을 돌아 다니면서 행복특강을 한 것이다. 안양에도 몇 번 와서 본 적이 있다.

 

어느 행복전도사는 자살했다. 방송에서 행복을 강연하던 강사가 자살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감각적인 것이기 쉽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조건이 바뀌면 금방 사라진다.

 

감각적인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각적 행복에 목숨을 건다.

 

행복은 엄밀히 말해서 행복감이다. 다른 말로 즐거운 느낌이다. 그런데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는 것이다. 왜 괴로운가?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가르침이다. 특히 느낌에 대한 가르침이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했다.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느낌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괴롭다고 보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즐거운 느낌은 조건발생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되기 마련이다. 즐거운 느낌 역시 조건이 다하면 소멸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이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이다. 이런 불만적은 다름 아닌 괴로움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괴로운 것이라면 모든 느낌은 괴로운 것이 된다. 괴로운 느낌은 괴로운 것 자체로 괴롭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즐거운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경전을 근거로 한다. 모든 느낌은 괴롭다는 것은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S36.11)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즐거움을 괴롭다고 보고

괴로움을 화살이라고 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으면

그것을 무상하다고 보는 자.

 

그 수행승은 바른 관찰자로서

느낌을 완전히 이해한다.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느낌을 완전히 알아

현세에 번뇌를 여의고 정통한 자는

몸이 파괴된 후에 헤아려질 수 없네.”(S36.5)

 

 

부처님 제자들은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보았다. 이는 지금 여기서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으로 보는 자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 사람들과 반대 되는 가르침을 폈다. 세상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을 괴롭다고 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을 행복이라 보지 않고 괴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크게 웃어 버릴 것이다.

 

카르페디엠, 지금 여기에서 즐겨라는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헛되이 살지 말자는 말도 된다. 대단히 현실적인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지금 여기는 즐겨야 할 시간이 아니라 새겨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131번 경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해라.”(M13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잘 관찰하라고 했다. 이는 수행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잘 관찰하다 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고 했다. 오온을 싫어하여 떠나라는 것이다.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는 테라가타에 어느 정도 힌트가 있다. 그것은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데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하기 때문이다.(Thag.501)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수행자는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 나서면 봉변 당할 수 있다. 지나치게 나대면 다친다. 누군가 카르페디엠하며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할 때 그것을 싫어하여 떠나라고 말하면 크게 웃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비난하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2023-11-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