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26. 07:03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렇구나. 일이 있구나.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구나. 일이 있으면 좋은 거지." 오늘 새벽 속으로 말한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떳을 때 멍하다. 위빠사나 스승들은 눈 뜨자마자 사띠하라고 한다. 잠을 잘 때는 깰 것을 염두에 두고 잠을 자라고 한다. 잠 들기 전까지 새김(사띠)을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오늘 일요일 새벽이다. 잠에서 깼을 때 어제 일이 떠 올랐다. 모처럼 손맛을 느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맛을 느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후가 다 갔다. 큰 일감이 걸린 것이다.

다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잊을만 하면 찾아 준다.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그 일 계속 합니까?"라며 묻는다. 또 "요즘 바쁘세요?"라며 묻는다. 반갑게 "오랜 만 입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지금 시각 새벽 5시 32분,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스마트폰 첫화면 날씨를 보니 2도이다. 강수확률은 90프로이다. 우산을 준비해야 겠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어나서 고구마와 계란을 삶는다. 백권당에 가서 먹을 것이다. 가스 타이머를 20분으로 세팅해 놓았다. 그 동안 샤워를 한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면 새로운 기분이 된다.

일터까지는 1.3키로 거리이다. 매일 아침 걷는다. 20여분 걸린다. 배낭에는 먹을 것이 있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다. 머리를 감았으므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 마스크를 한다. 날씨가 찰 때 마스크를 하면 든든하다. 장갑을 낀다. 장갑을 끼면 활달해 보인다.

중무장한 듯한 느낌이다. 마치 전장을 향하는 용사와도 같다.  이럴 때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거뜬히 총을 매고 나서는 아침~"으로 시작되는 군가가 생각난다. 이는 '행군의 아침'이라는 군가의 가사이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없어도 간다. 달리 갈 데가 없다. 눈만 뜨면 가야 할 데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2007년 이래 16년 동안 반복되는 일상이다.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늘어나는 것은 글뿐이다. 쌓이는 것은 글 뿐이다. 매일 의무적으로 쓴다. 오늘도 어떤 것이든지 하나 써야 한다. 숙제를 하는 것이다. 하루라도 중단하면 큰 일 난다. 마치 모임에서 한번 빠지면 계속 빠지는 것과 같다. 매일 때 되면 밥 먹는 것처럼 매일 써야 한다.

요즘에는 매일 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그것은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하루만 중단해도 큰 일 난다. 하루 하지 않으면 계속하지 않게 된다. 생활화 하려면 빠지지 않고 해야 한다. 일단 하면 하길 잘 했다는 생각에 든다. 또한 성취감이 있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고행 한시간이 되지만 그래도 버텨야 한다. 한시간을 채워야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은 많다. 경전도 봐야 한다. 경전은 가장 가까이에 둔다. 머리맡에 두는 것이다. 수시로 열어 볼 수 있다. 진도는 많이 나가지 않는다. 경전을 소설읽듯이 볼 수 없다. 한구절한구절 새기며 보아야 한다. 매일 조금씩 보다 보면 어느 날 다 읽게 될 것이다. 현재 읽고 있는 상윳따니까야는 일년을 목표로 한다.

 


머리맡에 책이 하나 더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다. 현재 2권 중간쯤 읽고 있다. 이 논서 역시 조금씩 읽는다. 하루 한두 페이지가 고작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은지 일년이 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난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것 같다. 살제로 체험해 보지 않았지만 머리로는 이해 된다.

어떤 이는 1권만 읽으라고 말한다. 2권을 읽었을 때 수행에 영향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체험 하지도 않았는데 체험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읽는다.

방법론을 읽다보면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것 같다. 신기한 것을 보고 진기한 것을 발견한 것 같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었네!"라며 감탄사가 나오기도 한다. 마치 명상할 때 순간적으로 정지가 와서 충만한 듯한 느낌과 같은 것이다.

엄지치기 하다 보니 6시가 다 되어 간다.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야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일감이 있어서 든든하다.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매번 하는 일이다. 돈이 되는 일이다. 본업이다. 그러나 요즘은 본업보다 부업에 더 열중이다.

이제 부업이 본업이 되었고 본업이 부여 되었다. 글쓰기와 명상이 본업이 되었고 일감은 부업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역전된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할 일이 있어서 안심이다. 집에 있으면 자세가 나오기 때문에 무조건 나가야 한다.

열평 되는 작은 공간이다. 일을 하면 일터가 되고, 글을 쓰면 서재가 되고, 명상을 하면 수행처가 된다. 자영업자, 원맨컴퍼니, 일인사장에게는 소중한 아지트이다.

이 나이에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약간 설레인다.

 


2023-1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