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태국에서도 난리가 나고 한국에서도 난리가 난 한국고승들의 태국비구계 수계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27. 12:30

태국에서도 난리가 나고 한국에서도 난리가 난 한국고승들의 태국비구계 수계
 
 
나는 대승불자인가 테라와다불자인가 티벳불자인가? 당연히 테라와다불자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 계를 받은 것도 이유가 된다. 담마다사라는 법명이 이를 말한다. 그렇다고 타불교 전통을 배척하지 않는다.
 

(2018 담마와나 선원 수계식)

 
 
타불교 전통을 존중한다. 천장사에 도반이 있어서 종종 가기도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성원정사에서는 천도재도 지냈다. 능인선원 불교교양대학 도반들이 있어서 지금도 모임이 유지되고 있다. 또한 국내 사찰순례를 가기도 한다.
 
테라와다불교는 초기불교전통을 계승했다. 가능하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교단이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오후에 먹지 않는 오후불식을 지키는 것도 부처님 율장정신을 잊지 않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빤냐완따 스님의 글 ‘스승과 제자의 대화’에서
 
며칠전 밴드에서 아름다운 글을 보았다.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빤냐완따 스님(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의 ‘스승과 제자의 대화’라는 제목의 글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종정 뿐냐산또(도성) 스님을 만난 것에 대하여 잔잔하게 표현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스승과 제자의 대화 》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셨던 신새벽. 동천샛별 반짝이는 아루나(Aru
a)의 시간. 창문을 열어젖히자 손바닥의 손금이 희미하게 보였고, 머얼리 남한산성 넘어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달력을 쳐다보니 11월 17일. 날짜엔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있고, 그 밑에는 파란색 글씨로 <부산 태종사>. 간밤에 챙겨놓은 발우와 가사, 큰스님께 올릴 쑥차가 든 가방을 둘러메고 문을 나섰습니다.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 아직 11월 중순인데 차가운 공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06:25분, 수서SRT역 출발 부산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5호차 6B 창가 좌석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습니다.

                            

큰스님 : 요즘 테라와다 시님들은 자주 모이나?
제   자 :  네, 때마다 모입니다.

큰스님 :  몇 명이나 모이노?
제    자 : 네, 최소한 열 명은 모입니다.

큰스님 : 열 명이라. 그래 열 명이면 구족계를 줄 수 있지. 나도 예전(1972년)에 태국시님들 열 분 모시고 통도사 금강계단서 테라와다 구족계를 받았지. 그때 함께 구족계 받았던 시님들 다 떠나고, 지금은 나 혼자만 남아 있지.
제   자 : 유수같은 세월 누가 거스를 수 있겠어요.

큰스님 : 그렇지. 그러나 돌아보면 쏜살보다 빠른 게 세월이지. 눈 깜박할 새 참 멀리도 왔지. 꿈만 같애.
제   자 :  그렇죠. 쏜살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으니까요. 그 뉘라서 쏜살을 붙잡을 수 있겠어요.

큰스님 : 앞으로 누가 날 오라거든 도성이는 못간다고 해. 떠날 때가 다 되어 준비하고 있다고.
제   자 : 저희들 곁에 좀더 오래 계셔야지요. 일찌기 큰스님께서 길 열어놓으신 덕분에
저희들이 이 가사 입고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 그렇기는 하지. 내가 아는 건 별로 없어도 한국테라와다 바람막이 역할은 했지. 도성이가 이 가사 입고 있으면 타종단의 그 누구도 한국테라와다를 뭐라 하지 못했거든.
제   자 : 예전(1989년)에 거해스님과 함께 미얀마 큰스님 모시고, 삼각산 승가사에서 위빳사나 수행했던 거 기억나세요?

큰스님 : 그럼. 그때 거해스님이 미얀마의 우 빤디따 시님과 자띨라 시님을 초청해 위빳사나 수행법을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했지. 수행법을 배우기 위해 시님네들이 전국 각지에서 올라왔지. 집중수행이 한달 넘게 이어졌던 거 같애. 대단했지. 삼각산 승가사 법회. 위빳사나 수행법회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당시 내가 주지로 있던 해남 대흥사로 이어졌지. 거기서는 거해시님이 상주하면서 수행을 지도했는데 그때는 재가자들도 많이 와서 수행했지.
제   자 : 그랬었군요. 위빳사나 수행법이 그렇게 알려지고, 테라와다불교의 씨앗이 그때 뿌려졌다고 보면 되겠네요.

큰스님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어떤 조직이든 규모가 커지고 물질이 풍부해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거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느냐 아니냐가 문제인 게지. 경전을 아무리 많이 보았다해도 행이 바르지 못하면 그게 무슨 이익이 되겠어. 모름지기 수행자는 행이 발라야 해.
제    자  : (문득, 예전에 외국의 한 수행처를 방문했을 때 그 곳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대는 경전을 읽었는가?"
  "네, 읽었습니다."
  "몇 번 읽었는가?
  "한 번 읽은 것도 있고, 여러번 읽은 것도 있습니다."
  "그럼 그대는 지금 경전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
  
순간, 뒷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것만 같았습니다. 고개를 떨군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역만리에서 온 한 젊은 수행자에게 자애로운 미소로서 다독여 주셨습니다.)

큰스님 : 오는 무슨 일이 있나?
제   자 : 네, 내일 울주 붓다의 길따라 까티나 행사가 있습니다.

큰스님 : 진용시님(빤냐와로 장로스님)은 잘 있나?
제   자 : 네, 수행자들 지도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큰스님 : 한국에는 진용시님만큼 실력 갖춘 사람 없다. 거해시님 인연으로 일찍부터 남방으로 건너가 경과 율은 물론 빨리어 태국어까지 다 익혔으니.
제   자 : 그렇지요. 저희가 남방불교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위빳사나 수행밖에 몰랐을 때 당시의 위빳사나 불교를 테라와다불교로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스님이 진용스님이라고 봅니다.

큰스님 : 물론이지. 부처님 한 분의 출현으로 인해 세상이 밝아지 듯 수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 가르침 따라 바르게 살아가면 법은 끊어지지 않아.
제   자 : 고맙습니다. 강녕하십시오.
              일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큰스님 : 기름도 심지도 이젠 다 되었어.
              바람앞에 등불이 어느 때 꺼질 지.
              잘 살아~

( 큰스님께 삼배 올린 뒤 가사와 발우를 챙겨서 밖으로 나오니 여름 한철 그토록 화려했던 태종사의 상징 수국꽃송이들이 말라서 빛바랜 채 11월 중순의 첫눈을 맞고 있었습니다.)

                          


           
불멸 2567.11.22.한낮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_¡_

 
(빤냐완따 스님 글에서)
 

 

(빤냐완따 스님)

 
 
참으로 아름다운 글이다. 한폭의 수채화 같은 산뜻한 글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 같다. 이런 글을 보니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 있는 내용이 떠 오른다.
 
어느 수행승이 스승에게 수행보고를 했다. 제자는 스승에게 삼배를 했다.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를 한 것이다. 두 손을 이마에 대고 그대로 서서히 아래로 한다. 그리고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도 바닥에 댄다. 이 모든 과정을 새겨서 한다.
 
제자의 얼굴 표정은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제자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했다. 또한 예의 바르고 조용하게 수행결과를 보고 했다. 스승은 제자의 태도와 보고에 대하여 훌륭하게 보았다. 스승은 제자가 현상을 바르게 아는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 선 것을 알았다.
 
빤냐완따 스님과 도성스님과의 대화를 보면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역사와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왜 그런가? 도성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살아 있는 역사와도 같기 때문이다.
 
단절된 한국불교의 계맥
 
도성스님은 큰스님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종정스님이기 때문에 큰스님이기도 하고 나이가 백세가 넘기 때문에 큰스님이기도 하다.
 
큰스님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일을 기억했다. 큰스님은 “나도 예전(1972년)에 태국시님들 열 분 모시고 통도사 금강계단서 테라와다 구족계를 받았지.”라고 말했다.
 
큰스님이 태국불교 계를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51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도성스님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고승들도 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성스님이 불교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알 수 있다.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불교는 승단 정화 이후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비구라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는데 구족계의 계맥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국의 고승을 초청하여 구족계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태국의 고승들이 한국에 와서 남방 전통의 구족계를 수여했다. 이것은 한국불교 교단사에서 크나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 교단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한국의 승려들이 상좌불교 국가인 태국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상좌부 전통의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태국의 장로들은 한국불교의 승단에 태국의 계맥을 전해 준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세계불교에서의 태국불교(Thai Buddhism in the Buddhist World)》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 / 마성, 불교평론 2011-9-6)
 

(도성스님, 아산 2023 세계불교문화축전)

 

(도성스님, 아산 2023 세계불교문화축전)

 
 
마성스님 글에 따르면 한국불교의 계맥은 단절되었다. 이를 복원하고자 태국불교 스님들을 초대했다. 태국불교에서는 부처님 당시 때부터 전승되어 오던 계맥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한국불교에서는 대승불교가 아닌 테라와다불교 전통의 계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도성스님에 따르면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받았다고 한다. 여법하게 받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한국불교의 계맥은 태국불교의 계맥이 된다.
 
태국에서도 난리가 나고 한국에서도 난리가 나고
 
마성스님 글에 따르면 태국불교에서는 한국불교에 계를 준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마성스님의 글을 읽은 어느 스님은 교계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국의 비구계는 엄격하게 말한다면 1973년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1973년 고승들의 태국 비구계 수계를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고 있지만, 당시 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한다. 한국불교에 그동안 계맥이 끊겨서 비구가 없었는데 우리나라(태국) 스님 10분이 가서 수계를 주었다고 태국언론에 대서특필이 되었다고 한다.”(미디어붓다, 2011-11-25)
 
 
이 글은 종광스님이 ‘불교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말한 것이다. 한국에서 비구계 역사는 1973년부터라는 것이다. 태국 율사 스님들을 초청하여 비구계맥이 이어진 것이다. 율장에 근거하여 정식으로 수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진정한 비구계의 역사는 불과 50년 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된다.
 
마성스님은 한국스님들이 계를 받은 해에 대하여 1973년이라고 했다. 그러나 도성스님은 1972년이라고 했다. 이는 빤냐완따 스님과의 대화에서도 확인되고 또한 도성스님이 불교방송 인터뷰에서 “1972년 태국 방콕 벤자마보핏 사원에서 프라담마 딧띠소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으로부터 51년전에 큰 사건이 있었다. 태국 율사 스님 열 분이 한국에 와서 한국 고승들에게 남방계를 준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고승들은 어떤 스님들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마성스님의 논문에서도 알 수 있다.
 
 
도성(道成) 스님(전 해인사·대흥사 주지, 현 부산 태종사 회주·한국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의 증언에 따르면, 1973년 3월 말경 양산 통도사에서 남방 구족계 수계식이 거행되었다. 이때의 수계는 계첩을 발부하지 않았으며, 수계식 기념사진도 촬영하지 않았다. 다만 수계의 증표로 남방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았다. 수계를 받은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도성 스님은 당시 수계를 받은 스님들의 명단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통도사의 홍법·상우, 부산 선암사의 석암, 쌍계사의 고산, 송광사의 보성·학산, 해인사의 혜암·도견·일타·종진·운산·현우·도성, 대구의 수산, 법주사의 혜정 스님 등이 받은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지만, 고암과 경산 스님은 계를 받았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이때 천축사의 천장 스님은 한 발은 계단 안에 한 발은 계단 밖에 두고 수계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 / 마성, 불교평론 2011-9-6)
 
 
수계 받은 스님은 모두 11명에 이른다. 도성스님 증언에 따르면, 홍법, 상우, 석암, 고산, 보성, 학산, 혜암, 도견, 일타, 종진, 운산, 현우, 도성, 수산, 혜정, 고암, 경산, 천장스님이 남방 테라와다불교 태국 비구계를 받았다는 것이다.
 
계를 받은 스님들의 면면을 보면 기라성 같다. 한국불교 종정을 지낸 스님도 있고 방장을 지낸 스님들도 있다. 그런데 마성스님 글에 따르면 스님들은 이런 사실을 숨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쉬쉬하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태국 율사스님들로부터 여법하게 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계를 받은 일은 사건이 된 것 같다. 태국에서도 난리가 나고 한국에서도 난리가 난 것이다. 태국에서는 한국불교에 계맥을 복원시켜 주었다고 난리가 나고, 한국불교에서는 숨기거나 쉬쉬하거나 부끄러워해서 난리가 난 것이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의 역사는 51년
 
빤냐완따 스님 글에 따르면 오로지 도성스님 혼자만 남았다고 한다. 큰스님은 “그때 함께 구족계 받았던 시님들 다 떠나고, 지금은 나 혼자만 남아 있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도성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산역사와도 같다. 한국테라와다불교가 공식적으로 창립된 것은 2009년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1972년에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의 역사는 51년이 된다.
 
한국불교의 역사를 1700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계맥의 역사는 불과 51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국 율사 스님 열 명이 와서 한국의 고승들에게 구족계를 준 것이 한국불교계맥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 계맥은 ‘태국종’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불교는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불국토였다. 지금도 방방곡곡에 사찰이 있어서 옛날에 불국토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단절 된 것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계맥의 단절이다.
 
해방후에 한국불교는 새롭게 도약하고자 했다. 왜색불교를 몰아내고 독신비구종단을 만들고자 했다. 그 불교개혁의 하나로서 태국의 율사들을 불러서 계맥을 복원한 것은 대단히 혁명적 발상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계를 받은 한국의 고승들은 숨기거나 쉬쉬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했다. 오로지 한분, 도성스님만이 계를 지켰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산역사가 되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가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는 뿌리 내릴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승불교전통에서 남방불교가 뿌리내리는데는 한계가 있다. 가장 먼저 탁발을 들 수 있다.
 
남방 테라와다불교는 가능하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 이는 탁발과 오후 불식으로 알 수 있다. 한국적 현실에서 탁발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오후불식은 가능하다. 가능하면 율장정신을 잃지 않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 역사는 매우 짧다. 그러나 도성스님에 따르면 태국계를 받은 1972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불교 고승들도 계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불교의 계맥은 태국불교의 계맥을 잇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빤냐와로(진용스님))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척박한 환경에서 뿌리 내릴 수 있을까? 백세가 넘은 도성스님은 기대하는 것이 있다. 진용스님, 즉 빤냐와로 스님 같은 스님이 많이 출현하는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스님들)

 
빤냐완따 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 현재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아마 우안거가 끝난 다음 종단의 최고 어른인 종정스님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가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산뜻했다.
 
 
2023-1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