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오늘 하루는 출가수행자처럼, 담마와나선원 2024년 붓다의 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19. 19:37

오늘 하루는 출가수행자처럼, 담마와나선원 2024년 붓다의 날

 

 

올해 부처님오신날은 삼중과세가 될 것 같다. 한국불교의 부처님오신날’,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붓다의 날’, 그리고 스리랑카 불교의 웨삭뽀야데이를 말한다.

 

한국불교의 부처님오신날은 515일 금산사에서 치루었다. 남도여행에서 귀가길에 들은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붓다데이는 519일 일요일에 서울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에서 열렸다. 마지막으로 스리랑카 웨삭풀문뽀야데이(Vesak Full Moon Poya Day)523일 목요일 아산에 위치한 마하위하라 사원에서 열린다.

 

 

오늘 오전 한국테라와다불교 붓다의 날 법회에 참석했다. 본래 음력 사월보름날은 522()이지만 사흘 당겨서 진행한 것이다. 한국불교의 부처님오신날처럼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일요일에 법회가 열렸다.

 

담마와나선원 밴드에 붓다의 날 공지가 떴다. 519일 일요일 상가 스님 열한 분을 모시고 행사를 치룬다고 했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야외탁발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테라와다불교 행사 특징이 있다. 그것은 탁발이다. 붓다의 날이나 까티나가사공양법요식과 같은 최대 명절 날에는 탁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에 따라 실내에서 행하는 경우도 있다.

 

깝삐야 역할을 했는데

 

붓다의 날 행사는 오전 열 시에 열린다. 야외 탁발행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홉 시 반까지는 가야 한다.

 

오전 아홉 시 반 이전에 도착했다. 선원 봉사자들은 탁발할 물품을 준비 했다. 열한 분의 상가 스님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열한 명의 깝삐야도 필요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이삼십대 젊은 사람들이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전반적으로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추세에 있어서 젊은 사람들을 보니 반갑다.

 

깝삐야의 역할이 있다. 스님의 시주물을 받아 주는 사람을 말한다. 한자어로는 정인(淨人)’이라고 한다.

 

빠알리어 깝삐야(kappiya)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부사로서 ‘appropriate; lawful; proper’의 뜻이다. 깝삐야와 관련하여 율장 대품에서는 기근이 들자 물건을 받아서 바치는 시봉자가 더 많이 가져가고 수행승들에게는 적게 주었다.”(Vin.I.211)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시봉자라는 말은 깝삐야까라까(kappiyakāraka)를 번역한 말이다.

 

깝삐야까라까는 한자어로 정인(淨人)이라고 한다. 깨끗한 사람을 뜻하지만 수행승을 시봉하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율장 대품 각주에 따르면 수행승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바쳐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자를 말한다.”(율장대품 833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오늘 붓다의 날에 깝삐야 역할을 했다. 열한 분의 상가 스님 모두에게 열한 명의 깝삐야가 배정되었다. 참고로 오늘 붓다의 날 행사에는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를 비롯하여, 빤냐완따스님, 담마위하리스님, 떼짓사라스님, 빤냐왐사스님, 케마짜라스님, 냐눗따라스님, 냐냐시리스님, 웃따마시리스님, 디라왐사스님 그리고 떼자사미선원장스님, 이렇게 열한 분의 상가 스님이 참석 했다.

 

 

오전 열한 시에 야외탁발이 열렸다. 사람들은 준비한 공양물을 스님들이 지나갈 때마다 하나하나 넣었다. 물품은 다양하다. 양말도 보이고 심지어 운동화도 있다. 수많은 물품을 발우에 다 담을 수 없다. 옆에 있는 깝삐야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서 보조해야 한다.

 

 

 

 

 

처음으로 깝삐야를 해 보았다. 냐냐시리 스님의 깝삐야 역할을 한 것이다. 보시자가 발우에 넣으며 이를 쇼핑백에 담는 역할을 한 것이다.

 

쇼핑백에 물품이 가득 찼다. 스님이 행사를 마치고 돌아 갈 때 가져 갈 것이다.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면 어떨까?

 

야외탁발이 끝났다. 행사 참석자들은 전부 법당에 모였다. 오늘 붓다의 날 행사를 맞이하여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아마 오십 명 가까이 되는 것 같다.

 

담마와나선원은 작은 절이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법당은 서른 평형 대의 아파트 거실 넓이에 지나지 않는다. 오십 명 가량의 사람의 앉으려다 보니 다닥다닥 붙어 앉을 수 밖에 없다. 절 하기도 좁은 공간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더 넓은 곳으로 가면 어떤가에 대한 것이다. 주차장도 있는 넓은 곳을 말한다.

 

선원에는 주차장이 없다. 차를 가져 온 사람은 차 대기가 난감 하다. 오늘 점심 때 밖에 나와 보니 불법주차를 단속하는 공무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일요일임에도 단속하는 것은 아마도 주변 빌라 주민들의 민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꽃공양 게송을 보니

 

법회는 여법하게 진행되었다. 붓다의 날에는 이에 맞는 법요집이 있다. 먼저 붓다의 날 게송부터 시작된다. “저희들은 부처님을 스승과 의지처로 믿고 따릅니다.”로 시작되는 게송이다. 빠알리어와 우리말로 낭송된다.

 

 

붓다의 날 게송은 삼보예찬이나 다름 없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초와 향, , 그리고 청정수를 올리는 게송이다.

 

불단은 꽃으로 장엄되어 있다. 초와 향, , 청정수를 공양 해야 하나 꽃 하나만 올려져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에 대한 공양이다. 이를 붓다뿌자, 불공(佛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기도를 한다. 부처님오신날 절을 맞이 하여 절에 가면 갖가지 명목의 기도가 있다. 불공이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타력적인 기도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공 역시 빠알리어와 우리말로 낭송된다. 불공게송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꽃공양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Vaṇṇagandhaguopeta
eta
 kusumasantati
P
ūjayāmi munindassa
sirip
ādasaroruhe.

봔나 간다 구노뻬땀

에땅 꾸쑤마 싼따띰

뿌자야미 무닌닷싸

씨리 빠다 싸로루헤.

갖가지 색의 향기롭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이 꽃송이를

연꽃 같은 길상의 두 발을 지닌

해탈하신 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P
ūjemi buddhakusumenanena
puññena
metena ca hotu mokkha

Puppha
 milāyāti yathā ida me
k
āyo tathā yāti vināsabhāva.

뿌제미 붓당 꾸쑤메나 아네나

뿐녜나 메떼나 짜 호뚜 목캄

뿟팜 밀라야띠 야타 이담 메

까요 따타 야띠 뷔나싸 바봠.

부처님께 이 꽃들로 공양을 올리오니

그 공덕으로 해탈 이루어지고

이 꽃송이들이 마침내 시들 듯

이 몸도 사라지고 마는 것을 새기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게송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예경지송을 참고 했다. 예경지송의 꽃공양에 대한 게송이다.

 

예경지송에 따르면 불공에는 여섯 가지 공양이 있다. 이는 등불공양, 향공양, 꽃공양, 음식공양, 의약공양을 말한다.

 

등불공양은 왜 하는 것일까? 이는 어둠을 몰아내는 불을 공양하면서 삼계의 광명이신 부처님을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빛나며 밝게 불타오르고 암흑을 몰아내는 등불로 어둠을 물리치시는 삼계의 광명이신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공양 올립니다.”라며 불공 드리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도 등공양을 한다. 대개 법당에 연등 하나 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 치유에 대한 소원을 한다. 그러나 등공양의 본래 의미는 부처님 찬탄이다. 이는 암흑을 몰아내는 등불이라는 말이 잘 말해 준다. 그리고 게송의 말미에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공양 올립니다.”라며 끝맺는다. 이것이 등불로서 불공(佛供)드리는 것이다.

 

여섯 가지 공양 중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꽃공양이다. 테라와다불교 종갓집이자 또는 종주국이라 볼 수 있는 스리랑카 불자들은 꽃으로 불공드린다. 어느 사원을 가든지 꽃공양은 빠지지 않는다.

 

장미꽃 한송이씩 들고서

 

담마와나선원에서 꽃공양 했다. 꽃으로 장엄된 불단에 각자 장미꽃 한송이 올려 놓는 것이다. 장미꽃은 선원 봉사자들이 준비 했다.

 

스리랑카에서는 꽃 공양할 때 연꽃이 사용된다. 어느 성지를 가든지 꽃파는 가게를 볼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연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연꽃 구하기가 쉽지 않다. 장미꽃 공양 올리는 것으로 대신 했다.

 

꽃은 오래 가지 못한다. 물에 넣어 놓아도 일주일 후가 되면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이 꽃송이들이 마침내 시들 듯 이 몸도 사라지고 마는 것을 새기게 하소서.”라며 공양 올린다.

 

기도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테라와다불교

 

테라와다불교의 꽃공양을 보면 기도가 될 수 없다. 공양물을 올려 놓고 대가를 바라는 기도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오로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다.

 

등불공양 올릴 때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광명을 떠 올리며 공양한다. 꽃공양 올릴 때는 언젠가는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공양 올린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탈하신 부처님처럼 자신도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불공(佛供) 드린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기도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공양게송에서 불상을 조성한 것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이곳 담마와나 선원에 불상()을 조성하여 모신 것은 불상()을 봄으로 인해 그 존귀하신 분, 부처님을 기억하고 생로병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과 마음의 평안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합송한다.

 

청법게송을 보면

 

공양게송이 끝났다. 다음에는 청법이다. 장로스님에게 법문해 줄 것을 청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청법가를 합창한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청법게송을 낭송한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완전한 닙바나에 드신 지 오래되었을지라도, 이 법회에 동참한 대중 모두, 존경하는 스님들께 예경 드리고, 저희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청하옵니다. 제가 들어 알기로는 이 세상 중생들 가운데 욕망이 적고 번뇌가 적은 이들이 있사오니, 존경하는 스님, 저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청법게송을 보면 쌍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brahmāyācanasutta)’(S6.1)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법을 설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때 사함빠띠 범천이 나타내서 청원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법회 때마다 오계를 받아 지니는 이유는?

 

청법게송이 끝나면 예경문과 삼귀의와 팔계가 낭송된다. 여기서 팔계가 주목된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일반법회를 할 때는 오계가 낭송된다. 이는 오계를 새로 받아 지니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이렇게 오계를 법회 때마다 받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계가 학습계율(sikkhāpada)’이기 때문이다.

 

오계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어길 때마다 새로 받아 지녀야 한다. 그래서 오계는 평생 걸쳐서 완성된다. 그래서 오계를 학계라고 한다.

 

생업이 있는 불자는 불음주계를 지키기 힘들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이럴 때 다시 오계를 받아 지니지 않게 되면 파계 상태로 있게 된다. 이는 불선업이 된다.

 

오계보다 가혹한 팔계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법회 할 때마다 삼귀의와 오계는 기본이다. 그런데 붓다의 날과 같은 큰 행사에서는 팔계를 받아 지닌다는 사실이다.

 

팔계는 오계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재가불교인들에게 하루낮하루밤만큼은 출가수행자처럼 살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팔계는 오계플러스가 된다. 때아닌 때 식사하는 것을 삼가한다. ,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하거나 꽃다발, 향료, 크림으로 화장하고 치장하는 것을 삼가한다. 또한 높고 큰 침상에 눕는 것을 삼가한다.

 

선원에서 집중수행 할 때가 있다. 새벽예불 시간에 팔계를 받아 지닌다. 포살계라 불리우는 팔계는 하루 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매일 받아 지녀야 한다. 그런데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있다. 그것은 때아닌 때 먹지 않는 것이다.

 

때아닌 때 먹지 않는 것은 오후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오 이후에는 밥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과일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스나 꿀물은 허용된다. 다음날 아침 해 뜰 때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오늘 붓다의 날에 팔계를 받아 지녔다. 오늘 저녁은 먹을 수 없다. 계를 받았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 배가 고파도 오늘 하루만큼은 참아야 한다. 꿀물 등을 타 마시며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려야 한다.

 

가르침을 알면 두려움이 없다

 

장로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빤냐와로 스님은 네 가지 두려움 없음에 대하여 법문했다. 이는 사무외심에 대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12번 경에 사무외심이 있다. 이는 정등무각외, 누영진무외, 설장법무외, 설출도무외를 말한다.

 

 

빤냐와로 스님은 가르침을 알면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특히 가르침을 실천하여 수다원이 되었을 때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귀결된다. 누구든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많이 잡아 보았자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요즘 밀린다팡하를 읽고 있다. 최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밀린다팡하를 완역 했는데 교정본을 읽고 있는 것이다.

 

밀린다팡하에 죽음의 두려움 여부에 대한 질문이 있다. 밀린다왕은 부처님이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Dhp.129)라는 법구경 게송을 인용한다. 그리고서는 거룩한 님은 죽음을 초월해 있다.”라는 부처님 말을 인용한다. 이 두 말은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일컫는다. 아라한은 죽음을 초월해 있다. 그럼에도 법구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세존께서 거룩한 님에 관하여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라는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진술에는 거룩한 님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님에게는 두려움의 원인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대왕이여, 번뇌가 있고 극단적으로 자아의 견해에 사로잡혀 있고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뭇삶들이 있는데, 그들에 관하 여 세존께서는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Mil.146)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다.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자의식은 없다. 당연히 죽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의식이 있는 범부에게는 죽음이 있다. 이는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날

 

빤냐와로 스님은 법문에서 수행을 강조했다. 특히 고요함에 머물지 말라고 했다. 고요함에서 빨리 빠져 나와야 수행의 진전이 있다고 했다. 늘 변하는 현상을 싸띠해서 무상, , 무아로 파악해야 함을 강조했다.

 

장로스님의 법문이 끝났다. 스님은 오늘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날입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다. 다음은 점심시간이다. 오늘 무려 오십명 가량 왔다. 담마와나선원 창립이래 가장 많이 온 것 같다.

 

점심식사는 김밥으로

 

식사는 법당에서 했다. 삼층에서는 스님들이 식사를 하고 이층에서는 재가자들이 식사한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점심메뉴는 고정 되었다. 김밥을 먹는 것이다. 이는 식사제공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들에게만 식사 제공이 되고 재가자들은 김밥과 떡이 제공된다. 또한 과일과 기타 먹거리도 제공된다.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해야

 

붓다의 날에는 법문을 듣는 날이다. 그리고 수행점검 받는 날이다. 점심식사가 끝난 다음에 빤냐와로 스님의 수행점검 시간이 있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다. 이날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질문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수행과 관련 없는 것이 많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질문을 왜 이렇게 합니까?”라며 약간 아쉽게 말하기도 했다.

 

질문을 잘해야 한다. 그 사람 질문하는 것을 보면 수준을 알 수 있다. 수행과 관련해서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물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스승들은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스리랑카 웨삭은 523()

 

오늘 담마와나선원 붓다의 날 행사가 끝났다. 일년에 한번 있는 날이다. 본래 522()에 해야 하나 사흘 앞당겨 실시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붓다의 날은 음력으로 사월보름날이다. 달력으로 계산하면 522일이 된다. 그런데 아산에 있는 마하위하라에서는 523일이다. 음력으로 416일인 것이다. 왜 그럴까?

 

스리랑카 웨삭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스리랑카 붓다의 날은 웨삭풀문뽀야데이(Vesak Full Moon Poya Day)’라 하여 523()이 맞다. 아마 이날의 달이 가장 만월에 가깝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늘 하루는 출가수행자처럼

 

오늘 담마와나선원에 갈 때 책을 두 권 준비했다. 작년 우안거 때 작성한 수행기이다. 우안거 88일동안의 기록이다, 두께가 692페이지로 꽤 두껍다.

 

책 제목은 ‘111 위빠사나수행기 VI 2022 재가우안거이다. 111번째 책이고 수행기로는 여섯 번째 책이다. 담마와나선원 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에게 한권 드렸다. 그리고 담마와나선원 운영회 최광희 회장에게도 한권 주었다. 작년 빤냐와로 스님에게는 택배로 발송한 바 있다.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미우이 음악씨디이다. 오늘 붓다의 날 행사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여섯 장 밖에 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 열 장 이상 준비 했어야 했다.

 

 

행사에 참여하고 나면 후기를 작성한다. 이런 것도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 오늘 팔계를 받았기 때문에 저녁밥은 먹지 않는다. 계를 받고 어길 수 없다. 오늘 하루는 출가수행자처럼 살아 보는 것이다.

 

 

2024-05-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