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테라와다불교 2024년 우안거 입재법회
평온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아침을 만들어 먹고 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행선과 좌선을 했다.
몸이 약간 피곤하다. 어제 그제 무리했었던 갔다. 일박이일 부여와 청양을 다녀 왔다. 부여의 궁남지, 낙화암, 고란사, 무량사 그리고 청양의 장곡사에 갔었다. 부여 만수산자연휴양림에서 일박 했다. 운전하느라 몸이 피곤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이 있다. 행선과 좌선하는 것이다. 각각 한시간씩 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합하여 고작 삼십분에 지나지 않는다.
수행을 왜 하는가?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한다고 볼 수 있다. 한발 한발 떼며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면서 앉아 있어도 마음은 편안해진다.
마음 편하기 위해서 수행한다면 수행의 목적은 될 수 없다. 불교수행은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
열반, 수도 없이 들어 보았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는 수도 없이 언급되어 있다. 아직까지 가보지 않은 길이다.
나도 열반에 들 수 있을까? 열반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있는 것일까? 이렇게 의심하면 법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다. 연기법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다고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열반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을 것이다.
담마와나선원 우안거 입재법회
그제 7월 14일 담마와나선원에서 우안거 입재법회가 있었다. 우안거를 6일 앞두고 미리 법회가 열린 것이다. 이날 법회에서는 빤냐와로 스님을 비롯하여 빤냐완따스님, 위무띠스님, 떼짓사라스님, 빤냐왐사스님, 케마짜라스님, 웃따마시리스님, 나타난다스님, 악카사또스님, 냐냐시리스님, 디라왐사스님, 떼자사미스님, 이렇게 열두 분의 상가스님을 모시고 열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안거를 나기로 했다. 올해 우안거를 하려면 먼저 입재법회에 참석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나지 않았다. 휴양림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법회에 참석해야 했다. 부여로 오전 일찍 떠나야 하나 점심 이후로 미루었다. 법회에 참석한 후에 떠나고자 한 것이다.
숙명여대 제2창학캠퍼스주차장
청파동에 있는 담마와나선원은 작은 사원이다.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주차공간이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선원이라 주차장은 없다. 차를 가져 간다면 알아서 대야 한다.
이삼주전 빤냐완따스님과 떼자사미스님 공양청에 참석한 바 있다. 빤냐완따스님이 캄보디아 큰스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 모임을 가진 것이다. 최광희 법우와 방명숙 법우가 자리를 마련했다. 마포 어느 식당에서 모였다.
떼자사미 스님은 담마와나 선원장이다. 떼자사미 스님에게 주차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스님은 하나의 방법을 알려 주었다. 숙명여대 주차장에 대라는 것이다.
숙명여대에 공영주차장이 있다. 제2캠퍼스 부지에 있는 지하 전체가 주차장인 것이다. 그것도 여러 층 된다. 수백대 주차할 수 있는 곳이다. 일요일에도 가능하다. 24시간 주차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효창공원이나 효창운동장에서 행사가 있을 때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숙명여대 주차장 명칭은 ‘제2창학캠퍼스주차장’이다. 주차료는 대체로 비싼 편이다. 30분에 3천원이고 한시간이면 6천원이다. 경차 할인도 되지 않는다. 민영이라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차공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것이다.
재가불자도 우안거를
이번 입재법회는 법회만 참석하고 가야 한다. 함께 점식식사도 하지 못한다.
빈손으로 갈 수 없다. 이미 왓사법회 비용으로 이체한 바 있다. 먹을 것을 준비해야 했다. 마침 밤호박이 있었다. 해남으로 귀촌한 친구부부가 지은 해남특산품이다. 주방에서 봉사하고 있는 봉사자에게 하나 전달했다.
법회가 시작되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스님들은 다 모인 것 같다. 열두 분의 스님이 2열로 앉아 있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스님들은 몇 분이나 될까? 그동안 법회에 참석하면서 본 바에 따르면 열다섯 분 정도 되는 것 같다.
대부분 스님들은 빠짐 없이 참석한다. 특히 우안거 입재법회가 있는 날은 참석률이 높다. 안거에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오다 나오지 않다 하는 스님도 있다.
안거는 스님들만 하는 줄 알았다. 작년 이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작년 우안거 때 빤냐와로 스님의 입재법문을 들었을 때 재가불자도 안거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안거는 스님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재가불자도 안거를 한다. 우안거 입재법회 할 때 스님들은 물론 재가불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재가불자의 안거는 기정사실인 것 같다. 스님들을 대상으로 법문 하는 것도 되지만 재가불자들을 바라보고 법문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재가불자들은 얼마나 안거에 참여하고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밴드에 안거에 들어갔다는 견해를 밝힌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으로 알 수 있다. 재가불자들도 안거에 들어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법문 하는 것이다.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선사
빤냐와로스님은 재가불자들의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법문 중에 “수행을 많이 해봐서 알텐데”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매우 수준 높은 법문을 한다. 열반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열반은 불교의 최종목적지나 같다. 열반 없는 불교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불교 스님들은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한국불교 선사들은 삼매에 대해서 말한다. 선사들의 오도송을 보면 합일에 대한 것이 많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반에 대한 것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선사들은 왜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일까?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열반에 대하여 왜 침묵하는 것일까? 열반을 체험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
두 가지 게으름이 있는데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수행점검을 해준다. 이는 앞서 경험한 사람이 지도해 주는 것이다. 체험하지 못했다면 지도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아리야와사법문’을 읽고 있다. 한국마하시선원 일창스님이 준 것이다.
아리야와사법문에 따르면 두 가지 게으름이 있다. 하나는 스승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자에 대한 것이다.
스승이 수행지도를 하려면 경지에 올라 가야 한다. 스승이 경지에 올라가 있지 않으면 수행지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승이 게으르면 수행지도를 할 수 없다. 스승에게 열반의 증득이 없으면 열반을 체험하게 할 수 없다.
제자는 스승의 지도아래 수행을 한다. 그런데 제자가 게으름 피우면 경지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승은 이끌어 주고 제자는 따라 가야 한다. 앞서서 먼저 경험한 사람이 이끌어 주는 것이다. 나이와 무관하고 성별과 무관한 것이다. 삼장법사도 칠세 아라한에게 배우지 않았던가!
이제는 대상을 놓아 버려야
빤냐와로 스님은 열반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서 법문했다. 이제까지 이런 법문을 들어 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열반에 들 수 있을까? 놓아 버려야 된다고 말한다. 무엇을 놓아 버려야 하는가? 대상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이를 상카라의 소멸로 설명했다.
상카라는 52가지 마음부수에 대한 것이다. 느낌(웨다나)과 지각(산냐)은 52가지 상카라(형성) 가운데 하나이다.
빤냐와로스님은 상카라의 소멸에 대하여 열반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상카라를 소멸하게 할 수 있을까?
빤냐와로 스님은 하나의 예를 설명했다. 어느 날 수행처에서 등 뒤 햇볕의 따사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어느 순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따사로움이라는 상카라가 소멸된 것이다.
왜 열반을 최상의 행복이라 하는가?
상카라가 소멸되면 기쁨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를 빤냐와로스님은 ‘수행에서 체득한 수카와띠삐띠’라고 했다.
열반의 기쁨이 있다.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고 했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은 체험할 수 없다.
왜 열반의 행복을 느낄 수 없을까? 열반상태에서는 느낌도 지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열반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벗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는 부서집니다. 벗이여, 이러한 이유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
열반의 상태는 느낌과 지각이 소멸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눈과 귀 등으로 느끼는 오욕락이 대표적이다. 또한 선정에서의 즐거운 느낌 또는 평온함에 대해서도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 궁극적 행복은 어떤 느낌도 느낄 수 없는 것이 행복이다. 바로 그것이 열반의 행복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열반의 행복을 말했다. 이는 모든 상카라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어떤 느낌이나 그 어떤 지각도 없다. 이를 상카라의 소멸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열반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위로는 무색계 천상에서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색계 정거천은 제외이다. 그런데 열반의 길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교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해야만 가 볼 수 있는 길이다. 정법이 살아 있어야만 갈 수 있는 길이다.
먼저 길을 가본 사람이 있다. 부처가 출현하면 열반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런데 전혀 새로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에 부처가 출현했던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면, 그 때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왕이나 왕의 대신들에게 이와 같이 ‘왕이시여,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는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 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도시를 다시 세우십시오.’라 고 권유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들이 그 도시를 다시 세웠다면, 그 도시가 나중에 번영하고 부유해지고 사람들이 몰리고 인구가 많아져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S12.65)
부처님은 옛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옛 고대도시를 발견했다. 부처가 출현하면 가는 길이다. 새로 길을 개척한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간 길을 가야 한다. 이는 ‘붓다의 길따라’ 가는 것이 된다. 열반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열반의 길로 가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갈래 길에서
열반의 길은 윤회가 끝나는 길이다. 당연히 괴로움도 끝난다. 이 길을 놓아 두고 다른 길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방향이 다르면 목적지도 다르다. 두 갈래 길에서 바른 길로 가야 한다. 부처님은 두 갈래 길에서 누군가 길을 묻는 다면 “여보시오,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S22.83)라고 했다. 바른길은 팔정도의 길이다. 바르지 않은 길은 팔사도의 길이다. 두 갈래 길이 있다면 바른 길, 팔정도의 길로 가야 한다.
팔정도의 길은 열반의 길이다. 모든 부처가 출현했을 때 가는 길이다. 부처님도 그 길로 가라고 했다. 정법이 살아 있다면 붓다의 길따라 가야 한다.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열반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이는 열반은 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만약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한번이라도 열반을 체험해 보았다면 많이 잡아서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날 것이다.
빤냐와로스님은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법문했다. 이제까지 대상에 대하여 싸띠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 대상을 놓아 버리자고 말한다.
마음은 늘 대상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늘 불선한 대상에 가 있다. 이는 감각적 대상에 가 있음을 말한다.
마음은 제어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김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새김은 싸띠 번역어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싸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도 싸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서 발생되는 물질과 정신현상을 새김하는 것이다.
열반의 길로 가려면 대상을 놓아 버려야 한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대상을 놓아 버리면 마음은 어디로 향하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열반으로 향한다고 했다.
마하시사야도의 논서를 읽고 있다.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싸띠를 해서 ‘형성평온의지혜’에 이르면 다음부터는 지혜가 이끌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열반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위빳사나 도를 수순의 지혜지 구족하게 닦으면 출세간의 도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1권, 563쪽)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좌선과 행선을 해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는 법부터 해야 한다. 이후 생멸의 지혜 등 16단계로 진행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지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 대하여 ‘수순의 지혜(nuloma ñāna)’라고 했다.
인상적인 말 몇 가지
마하시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을 읽으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다. 특히 윤회에 대한 것이 그렇다. 이제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자고 한다. 빤냐와로스님도 “많은 세월 대상을 관찰해 왔습니다. 이제는 뛰어 넘어 봅시다.” 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고 말한다. 빤냐와로 스님도 건너가자고 말한다. 이 언덕에서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는 것이다. 이번 안거는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안거가 되자고 말하는 것 같다.
스님의 법문을 받아 적었다. 작은 노트를 준비해서 마치 기자가 노트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록 쓴 것이다.
스님의 녹음 파일은 밴드에 올려져 있다. 유튜브에도 공개될 것이다. 스님의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이 몇 가지 있다.
1) 삭발자는 머리를 만져 보라고 했다. 내가 잘 살았는지, 계가 청정한지 알라는 것이다. 잘 살고 계가 청정하면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2) 수행 할 때 잘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자신의 바라밀을 되돌아 보라고 했다. 어떤 바라밀행이 부족한지 파악하라는 것이다.
3) 수행은 자기재산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재가자가 재산이 있으면 기쁨을 느끼듯이, 수행에서 형성된 지혜가 있으면 재산과도 같다고 했다. 누군가 빼앗아 갈 수 없는 재산이다.
4) 스승이 있을 때 수행하라고 했다. 이 많은 상가스님들이 있는데 이때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느냐는 것이다.
5) 잠을 자기 전에 반성하라고 했다. 어떻게 반성하는가? “오늘 잘 살았는가?”라며 자문하라는 것이다.
6) 죽음이 닥쳤을 때 호흡을 보라고 했다. 호흡을 볼 수 있다면 적어도 사악처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7) 지금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한 채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8) 후회 없는 삶 미련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지은 과보는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받는 것이기 때문에 후회하거나 미련 갖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올해 우안거 잘 보낼 수 있을까?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이 끝났다.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에 법문한 것이다. 부여 일박이일 일정 때문에 점심식사를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 했다.
빤냐와로스님의 우안거 입재법회를 보면 단지 재가불자를 향해서 말한 것은 아니다. 옆과 뒤에 2열로 앉아 있는 열한 분의 스님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테라와다우안거는 스님들만 지내는 것은 아니다. 재가불자들도 지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날 입재법회의 날에 열두 분의 스님들이 모였다. 그리고 삼십명 이상 재가불자들이 모였다. 나는 올해 우안거 잘 보낼 수 있을까?
2024-07-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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