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담마와나선원 2024년 3월 초청탁발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25. 11:56

담마와나선원 2024년 3월 초청탁발법회
 
 
좋은 시절이 돌아왔다. 오늘 아침 온도는 13도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이다. 백권당 가는 길 1.3키로를 걸었더니 땀이 약간 났다. 공기는 맑고 깨끗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나 보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르다. 평소에는 쓴 맛이었으나 이번에는 단맛과 신맛이 강하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맛도 달라지는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절구질 해서 마시는 절구커피가 최상이다.
 
오늘 써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어제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에 다녀 온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이 되면 남쪽나라 갔던 스님이 돌아 온다. 태국에서 겨울 한철 머물다가 귀국한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이 있는 날이다. 이름 하여 담마와나선원에 열린 ‘2024년 3월 초청탁발법회’이다.
 
탁발법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날에만 열린다. 붓다데이나 까티나가사공양법요식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태국에서 안거를 보낸 스님이 온 날에도 탁발법회가 열린다.
 
빤냐와로스님 법문을 듣고자
 
3월 24일 일요일 담마와나선원에서 탁발법회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스님은 빤냐와로 대장로 스님을 비롯하여 빤냐완따, 담마위하리, 떼짓사라, 빤냐왐사, 케마짜라 스님, 이렇게 여섯 명의 상가 스님이 참석했다.
 

 
담마와나선원이 개원된지 6년되었다. 2018년 청파동에서 개원한 이래 주요 행사가 있는 날에는 꼭 참석하여 기록을 남겼다. 특히 삼장법사 빤냐와로스님이 오는 날은 빠지지 않는다. 듣다 보면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참석한다.
 
담마와나선원 몹시 좁다. 지하철 4호선과 전철 1호선이 교차해서 교통은 좋지만 주차할 공간도 없다. 3층 가정집을 개조하여 선원을 만들었기 때문에 법당도 몹시 비좁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알아서 스스로 찾아 온다.
 
법회일정은 밴드에 공지된다. 담마와나선원 카페에 실려 있는 글을 링크해 놓은 것이다. 두 번 들어가야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를 첫화면에 노출시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것이라 생각한다.
 
초청탁발법회는 특별한 날이다. 일년에 몇 번 없는 행사이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나온 사람들도 많다. 매주 일요일 법회가 있기는 하지만 탁발법회를 보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특히 빤냐와로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일부러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
 
아나타삔디까 장자와 같은 귀인이 나타나기를
 
담마와나선원은 작고 가난한 절이다. 주차공간도 없고 법당도 비좁다. 누군가 큰 보시를 해서 크고 주차장도 갖춘 공간이 되길 바란다. 마치 부처님당시 대재벌이라 볼 수 있는 아나타삔디까 장자와 같은 귀인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절이 커나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불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사는 기도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담마와나선원에서는 기도가 없다. 오로지 수행만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도도 없고 불사도 없다 보니 작고 가난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담마와나선원에서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 이는 선원장 떼자사미스님이 오후불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탁발은 못하지만 율장정신만은 잊지 않고 살겠다는 것을 말한다.
 
스님은 밥을 직접 해먹지 않는다. 재가불자들이 당번을 정해서 점심공양을 제공하는 것이다.
 
담마와나선원은 재가불자들에 의해서 운영된다. 선원은 한국테라와다불교 소속의 재산이지만 선원의 운영은 재가불자운영위원회에서 시행한다. 재가불자들의 보시로 운영되는 것이다.
 
탁발법회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보시를 받는다. 선원계좌로 능력껏 입금하면 된다. 선원운영위원회에서는 이를 모두 공개한다. 수입과 지출 내역을 빠짐 없이 알리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오계가 빠지지 않는 것은
 
법당에 사람들이 모였다. 불단 쪽에는 여섯 명의 상가스님들이 앉아 있다. 법당에는 남녀재가불자들이 약 서른 명 가량 모였다.
 
법회는 10시 20분부터 시작되었다. 탁발법회의식은 준비된 법요집에 따라 진행된다. 빠알리어와 우리말을 섞어서 진행된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로 시작되는 예경문, “붓당 사라낭 가차미~”로 시작되는 삼귀의, 그리고 “빠나띠빠따 웨라마니~”로 시작되는 오계는 필수항목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삼귀의와 오계는 빠지지 않는다. 한국사찰 법회에서는 오계는 낭송되지 않는다. 천수경에 오계항목이 있기는 하지만 별도로 낭송되지 않는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오계를 낭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오계를 수계 받는 것과 같다. 마치 선원에서 매일 새벽 구계를 받는 것과 같다.
 
2019년 1월 미얀마 선원에서 보름동안 있었다. 그때 선원에서 매일 새벽 구계를 받았다. 포살계라 부르는 팔계에다 자비계를 하나 더 추가하여 구계를 받은 것이다.
 
선원에서 팔계를 받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선원에서 출가수행자처럼 살아 보겠다는 것을 말한다. 팔계는 사미나 사미니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재가불자가 포살일에 팔계를 받는 것은 출가하기 전의 행자라고 볼 수 있는 사미나 사미니계를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포살계는 하루낮하루밤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선원에서는 매일 새벽 팔계를 받아 지녀야 한다.
 
불자가 되는 조건이 있다. 삼귀의하면 불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오계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삼귀의는 충분조건이고 오계를 필요조건에 해당된다.
 
테라와다법회에서 법회할 때마다 오계를 받아 지닌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계를 새로 받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마치 선원에서 매일 새벽 팔계를 새로 받아 지니는 것과 같다. 또 하나 이유는 파계한 것을 복원하는 것이다.
 
재가불자로 살다 보면 피치 못하게 계를 어길 수 있다. 특히 불음주계를 어기는 경우가 많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실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때 법회에 참석해서 복구해 놓아야 한다. 파계 상태로 살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불자와 태국불자의 차이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법문 했다. 사람들은 귀 기울여 조용히 경청한다. 이번에는 어떤 메시지를 줄까?
 
빤냐와로스님이 말을 떼었다. 스님은 “공부 좀 많이 했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이 말은 “그 동안 수행 열심히 했습니까?”라며 묻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테라와다 불자들에 대하여 수행자로 보기 때문이다.
 
빤냐와로스님은 지난 겨울 태국에서 살았다. 한국에서 우안거가 끝나면 태국에 가서 한철 보내는 것이다.
 
스님이 태국에 가는 것은 태국에서 출가한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 계율 때문이라고 했다. 태국 상가스님들과 함께 살면서 계행에 대하여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빤냐와로스님은 태국불자와 한국불자의 차이점에 대하여 말했다. 이는 수행에 대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한국불자들은 마치 뿌리를 뽑아 버리려는 듯이 마음 먹어야 수행하지만 태국불자들은 크게 힘들지 않게 수행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태국불자들은 수행이 일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를 알려 주면 그대로 흡수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 전통은 매우 짧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공식으로 출범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이제 15년 되었다. 이에 반하여 태국의 테라와다불교는 수백년 전통이 있다.
 
태국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한다. 태국에서는 불교가 생활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바탕이 있기 때문일까 한마디 가르쳐 주면 그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것
 
부처님당시 부처님 제자들은 게송 하나만 들어도 깨달았다. 빤냐와로스님은 사리뿟따가 앗자지 존자로부터 들은 ‘연기법송’을 예로 들었다.
 
연기법송은 어떤 것인가? 이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사리뿟따는 앗사지의 연기법송을 듣고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 이는 그때 당시 사회적 분위기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영원주의와 같은 브라만교에 반발하여 갖가지 사조가 유행한 것을 두고 말한다.
 
사리뿟따가 게송 하나만 듣고 깨달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와 같은 깨달음에 대하여 빤냐와로스님은 “대부분 연기로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한국불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깨달음논쟁이 있었다. 지금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너무나 간단하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것이다.
 
수행이 잘 안될 때는 여섯 감각영역을 보아야
 
빤냐와로스님은 짧게 법문 했다. 삼십분도 안되는 법문이다. 그럼에도 새겨야 할 것이 많다. 한마디한마디가 새롭다. 조용하고 나직이 말하는 것에 사람들은 귀 기울인다. 지나고 나서 얼마나 기억해 낼까?
 
빤나와로스님의 법문은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유튜브법문을 듣고 찾아 왔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듣고 또 듣는다고 했다.
 
빤냐와로스님 법문은 들을 때마다 새롭다. 그것은 아직 내 것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체험해 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법회에 참석하면 반드시 기록을 한다. 손바닥 정도 되는 작은 노트를 준비해서 받아 적는다. 밴드에 음성파일이 올려져 있지만 듣지 않는다. 그대신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면서 정리한다.
 
스님은 주로 수행과 관련하여 법문 한다. 그것도 초보수행이 아니다. 위빠사나 16단계에서 4단계인 생멸단계에 대한 것이 많다. 이번 법회에서는 십이처에 대해서 말했다.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에 따르면 수행이 잘 될 때는 색, 수, 상, 행, 식오온의 동시생멸을 보라고 했다. 수행이 잘 안될 때는 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감각영역 보는 것을 대안으로 하라고 말했다.
 
빤냐와로스님 설명에 따르면 오온생멸을 보는 것은 상근기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다. 초보자는 여섯 감역에서 생멸을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 그런가? 잘 보면 보이기 때문이다.
 
착시현상에 대하여
 
수행은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는 빠라맛타담마, 구경법을 보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빠라맛타담마는 실재를 말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성품법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성품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생멸이 있음을 말한다.
 
눈으로 생멸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으로 생멸을 보기는 쉽지 않다. 왜 그런가? 계속 보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새로운 것을 계속보고 있음에도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빤냐와로스님은 ‘거울’을 예로 들었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거울을 치워버린다.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생멸현상은 이렇게 설명된다. 그러나 눈을 제외한 귀나 코, 혀, 몸 등은 착시현상이 덜하다.
 

 
여기 소리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아”라고 소리쳤을 때 그 소리는 금방 사라진다. 눈이 있어서 보는 것과 다르다. 눈으로 보는 것은 계속 보이기 때문에 생멸을 보기 힘들지만 귀로 듣는 것은 한번으로 그친다.
 
소리로 생멸을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말했다. 시각에 대한 것보다 청각을 예로 들어 생멸을 설명한 것이다. 이는 시각이 사람을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속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감각하고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단지 정신과 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고도의 집중을 통해서 분석적으로 관찰해야 볼 수 있다. 그래서 빤냐와로스님은 “느낌이 오래도록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찰나의 계속입니다.”라고 말했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았을 때
 
잘 보고 잘 들어야 한다. 잘 보지 못하면 영원한 그 무엇이 있는 줄 착각할 수 있다. 잘 듣지 못하면 내가 듣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taṃ kiṃ maññasi, mālukyaputta, ye te cakkhuviññeyyā rūpā adiṭṭhā adiṭṭhapubbā, na ca passasi, na ca te hoti passeyyanti?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말루짜뿟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색 중에 아직 보지도 못했고, 전에도 본 적이 없었고, 지금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조차 생겨나지 않는, 그러한 형색에 대하여 바람이나 애착이나 애정이 그대에게 있겠는가? (=생겨나겠는가?)”(S35.95,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2쪽)
 
 
위 한글번역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놓았다. 일창스님이 미얀마어로 된 것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룽끼야뿟따에 대하여 말루짜뿟따라 하여 미얀마식으로 번역해 놓았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위빠사사 수행지침서이다. 경전과 논서와 주석을 근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말룽끼야뿟따의 경’(S35.95)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을 알려주는 질문과 문답’이라고 했다.
 
쌍윳따니까야는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라 볼 수 있는 연기, 오온, 육처 등의 가르침이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쌍윳따니까야를 읽다 보면 마치 수행지침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중에서 ‘말룽끼야뿟따의 경’에서 육처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 그런데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 보지도 못했고, 전에도 본 적이 없었고, 지금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조차 생겨나지 않는, 그러한 형색에 대하여 바람이나 애착이나 애정이 그대에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S35.95)라고 묻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도 할 수 없고 사유도 할 수 없다. 당연히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상이 분명하면 다르다.
 
분명한 대상을 가질 때 애착이
 
대상이 분명하면 생각과 사유와 번뇌가 일어난다. 이는 대상에 대하여 좋아함과 싫어함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위빠사나로 막을 수 있다. 어떻게 막는가? 이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은 형색들처럼 되도록, 분명한 형색들만 위빳사나로 관찰하여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1권, 383쪽)라고 했다.
 
말룽끼야뿟따의 경에서는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게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위빠사나 수행방법의 핵심을 알려 준다.
 
 
“ettha ca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yato kho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tato tvaṃ, mālukyaputta, na tena. yato tvaṃ, mālukyaputta, na tena; tato tvaṃ, mālukyaputta, na tattha. yato tvaṃ, mālukyaputta, na tattha; tato tvaṃ, mālukyaputta,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malukyaputta말루짜뿟따 비구여, ettha ca diṭṭha-suta-muta-viññātesu dhammesu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알게 된 이러한 법들 중에서도 te그대에게 diṭṭhe 보이는 형색에 대해서는 iṭṭhamattaṃ보는 것만 bhavissati생겨날 것이다. sute들리는 소리에 대해서는 sutamattaṃ듣는 것만 bhavissati생겨날 것이다. mute감각된 것에는, 즉 맡아진 냄새에는, 맛보아진 맛에는, 닿은 감촉에는, mutamattaṃ감각하는 것만 bhavissati생겨날 것이다. viññāte알아지는 성품에 대해서는 viññātamattaṃ아는 것만 bhavissati생겨날 것이다.

malukyaputta말루짜뿟따 비구여, yato kho어느 때 te그대에게 diṭṭha- suta-muta-viññātesu dhammesu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알게 된 이 러한 법들 중에서 ditthe ditthamattam bhavissat... viññāte viññata- mattah bhavissati보이는 형색에 대해서는 보는 것만 생겨난다면, 들 리는 소리에 대해서는 듣는 것만 생겨난다면, 감각된 것에는, 즉 맡아진 냄새에는, 맛보아진 맛에는, 닿은 감촉에는 감각하는 것만 생겨난다면, 알아지는 성품에 대해서는 아는 것만 생겨난다면, malukyaputta말루짜뿟따 비구여, tato그때 tvam그대는 tena그 보이는 형색, 들리는 소리, 감각된 냄새·맛·감촉, 알아지는 성품들과 관련 하여 번뇌와 함께 na (bhavissati)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Yato tvam malukyaputta na tena말루짜뿟따 비구여, 그때 그대가 그 보이는 대상 등과 관련하여 번뇌와 함께 생겨나지 않는다면 tato tvaṃ, mälukyaputta, na tattha말루짜뿟따 비구여, 그렇게 관계하지 않을 때에 그대는 그 보이는 형색 등에 번뇌로(= 번뇌에 따라서) 머물지 않을 것이다.

Yato tvam, mälukyaputta, na tattha말루짜빳따 비구여, 그때 그대가 그 것(보이는 형색) 등에 번뇌로(= 번뇌에 따라서) 머물지 않는다면, malukyaputta말루짜뿟따 비구여, tato그렇게 번뇌에 따라서 머물지 않을 때, tvam그대는 neva idha이곳(이 세상)에도 없고, na huram저 곳(저 세상)에도 없고, na ubhayamantarena이 세상, 저 세상, 양쪽(세상) 모두에도 없다. eso eva바로 이것, 즉 물질과 정신의 연속이 없는 것만이, 또는 이 두 세상 모두에 번뇌로 집착하는 그대가 없는 것만이, dukkhassa번뇌의 고통, 윤회윤전 고통의 anto끝인 열반이다.”(S35.95,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6-388쪽)
 
 
위 번역은 일창스님이 미얀마어로 되어 있는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대역’한 것이다. 일대일로 빠알리어와 미얀마어로 대역된 것을 다시 빠알리어와 한글로 대역한 것이다. 이렇게 번역한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경에서는 네 가지 감각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시각, 청각, 감각, 그리고 인식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감각에 대하여 “맡아진 냄새에는, 맛보아진 맛에는, 닿은 감촉”이라고 했다. 감각은 몸에 직접적으로 접촉 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은 직접 접촉이 아니다. 대상을 식별하는 간접적 접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코, 혀, 몸은 감촉으로 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경에서는 감각 되어진 것이라고 했다.
 
시각, 청각, 감각, 인식은 분명한 대상을 가질 때 애착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의 성품을 알게 된다면 애착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아닛짜(無常), 둑카(苦), 아낫따(無我), 닙비다(厭惡), 위라가(離慾), 니로다(消滅)
 
대상에 대하여 애착이 생겨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형색을 보게 될 때 단지 보는 것에만 멈추게 해야 한다. 보이는 형색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번뇌들을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번뇌가 생겨날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보이는 형색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관찰하면 형색 물질을 바른 성품대로 알 수 있다.
 
어떻게 아는가? ‘보이는 성품일 뿐이다’라고, ‘생겨나서는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새기는 동안에 사라지고 소멸해 버린다’라고 안다. 그래서 ‘항상하지 않다. 괴로움이다. 나가 아니다’라고 구분하여 결정할 수 있다. 그러한 형색이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마치 보이지 않는 형색과 같이 되어 버린다.
 
마음 속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어떠한 모습이나 형체로 집착하여 머물지 않는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더라도 새길 때 드러나던 대로만 드러난다.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무상(anicca)한 것으로, 괴로움(dukkha)인 것으로, 무아(anatta)인 것으로만 드러난다. 따라서 ‘누구를 보았다. 아주 좋아할 만한 사람이다, 아주 싫은 사람이다.’라는 등으로 그 형색에 관련하여 생각하고 숙고하는 번뇌들이 생겨나지 못한다. 이렇게 번뇌들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볼 때마다 관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리를 들을 때, 냄새를 맡을 때, 맛을 먹어 보아 알 때, 여러 감촉들 과 닿을 때, 다가오는 여러 성품법들을 생각하여 알 때도, 그것에 연속 하여 망상하고 숙고하는 번뇌들이 생겨날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관찰하고 새겨, 단지 듣는 것 등에만 멈추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단지 보는 것 등에만 멈추도록 끊임없이 관찰하여 위빳사나와 관련된 계, 삼 매, 통찰지들이 단계적으로 향상되어 도의 계, 삼매, 통찰지들을 생겨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9-390쪽)
 
 
이 부분을 읽고 또 읽는다. 위빠사나 수행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비록 언어적 형태로 설명하고 있지만 읽다 보면 마치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초보수행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빤냣띠와 빠라맛타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개념과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에 대하여 빤냣띠라고 한다. 생멸하는 성품에 대해서 실재, 빠라맛타라고 말한다. 대상을 접할 때 개념적으로 보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개입된다. 그래서 ‘내가 본다’라고 말하고 ‘내가 듣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상을 실재하는 성품으로 본다면 나라는 개념은 빠진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대상이 생멸하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감각하거나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생멸할 때 “‘생겨나서는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새기는 동안에 사라지고 소멸해 버린다’라고 안다. 그래서 ‘항상하지 않다. 괴로움이다. 나가 아니다’라고 구분하여 결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렇게 알고 보았을 때 “형색이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마치 보이지 않는 형색과 같이 되어 버린다.”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빤냣띠(개념)가 생겨날 수 없다. 따라서 ‘나’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없다. 그래서 ‘나’라는 개념이 개입할 수 없어서 ‘내가 본다’든가 ‘내가 듣는다’등으로 말할 수 없다.
 
실재하는 성품을 보았을 때 번뇌가 일어날 수 없다. 실재하는 성품은 생멸하는 것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집착하지 않게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닙비다, 위라가, 니로다로 설명된다. 이는 싫어하여 사라져 떠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말로 염오, 이욕, 소멸이라고 말한다.
 
보면 보인다고 알아차려라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법의 성품을 알게 된다. 법의 성품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왜 그런가?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토한 음식을 다시 먹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재하는 법의 성품을 알면 개념은 토한 음식과도 같은 것이다. 특히 ‘내가 있다’는 개념이 그렇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게 할 수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구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없구나”(1권, 379쪽)라며 무아의 특성을 바르게 안다고 했다.
 
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유신견이라고 한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이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신견이 있는 한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유신견이 있는 한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신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법의 성품을 관찰해야 한다. 빤냐와로스님에 따르면 오온의 생멸보다는 육근에서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 초보자에게는 더 낫다고 했다.
 
빤냐와로스님의 육근청정법문을 들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감각능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의 가르침을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보면 보인다고 알아차려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쌍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의 경’ (S35.95)에 실려 있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생멸 없는 빤냣띠는 진리가 아니다
 
테라와다스님들의 법문에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한 법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주석서와 논서를 중시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승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법문을 종종 듣는다. 대부분 법사들은 자신의 견해를 세운다.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들어 보면 대부분 빤냣띠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빤냣띠에는 생멸이 없다. 생멸이 없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본마음 또는 참나가 있을 때 이는 빤냣띠일 가능성이 높다.
 
개념은 진리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부분적으로는 진리이고 부분적으로는 진리가 아니라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금이라도 진리가 아닌 것이 섞여 있다면 진리로 볼 수 있다. 빤냣띠가 그렇다는 것이다.
 
빤냣띠는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멸하지 않는다. 이는 실재성품이 생멸하는 것과 다르다. 생멸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빤냣띠는 생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혹시 진흙속의연꽃님 아니세요?”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이 끝났다. 다음 순서는 점심공양이다. 이번 점심공양은 어느 재가남자불자가 큰 보시를 했다. 김밥을 가져 온 것이다.
 
법당에 자리를 마련했다. 절에 가면 비빔밥이 제공되지만 작은 사원에서는 비빔밥을 제공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로 김밥과 떡이 제공된다.
 

 
점심공양을 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본 얼굴들이 많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청파동에 갈 때 매번 새로운 얼굴들을 본다. 그러나 자주 보는 얼굴들도 있다. 그럴 경우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고 정겹다.
 
처음 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깜짝 놀라는 때가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혹시 진흙속의연꽃님 아니세요?”라고 물어 본다.
 
매일 글을 쓴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글이 완성되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려 놓는다. 담마와나선원에서 물어 본 사람들은 대부분 블로그를 보았다고 말했다.
 
잠복된 번뇌로 인하여
 
점심공양후에 스님들과의 대화시간이 있었다. 일종의 수행점검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 시간이 재가수행자들에게는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분의 스님과 마주했다. 빤냐완따스님, 떼짓사라스님, 빤냐와로스님을 말한다. 먼저 빤냐완따스님이 말했다.
 

 
빤냐완따 스님은 애착에 대하여 말했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을 때 이제까지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 있었다고 말했다. 기나긴 방황을 마치고 공부가 다 된 줄 알았는데 어떤 경계에 이르렀을 때 깨졌음을 말했다.
 
이 공부의 끝은 어디일까?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오랜 세월 수행했다. 십년전에 번뇌가 사라졌음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잠복된 번뇌가 있었다고 한다. 조건이 되니 팍 튀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확실한 것은 없다고 했다.
 
아기를 데려와서 챈팅 축원해주는 것을 보고
 
떼짓사라스님은 태국에서 경험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태국의 선원에서 산 것이 아니라 일반 사원에서 산 것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태국에서는 장례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고 말한다. 마치 일본 절에서와 같이 사원에서 장례를 주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도 사원에 간다는 것이다. 이는 갓난 아기를 데려와서 챈팅 축원해주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는 수행위주의 신행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떼짓사라스님의 태국불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장례문화를 도입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또한 아기가 태어나면 축원해 주는 문화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개념입니다”
 
빤냐와로스님 시간이 되었다. 스님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 보라고 했다. KTX열차 시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모두 다섯 명이 질문했다.
 
어느 재가수행자는 경행에 대하여 물었다. 경행할 때 가벼움과 무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발을 들어 올릴 때 가볍고 내릴 때 무겁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스님은 즉각적으로 “그것은 개념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그런가? 가볍거나 무겁다고 느낀 것은 실재하는 생멸하는 성품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임을 말한다.
 

 
위빠사나수행 할 때 개념을 보자고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을 배제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생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빤나와로스님은 “변화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수행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 온 재가 여성수행자가 와선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와선할 때 법의 성품을 보기 쉽다고 말했다. 이에 빤냐와로 스님은 “배에 손을 대고 합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와선 할 때 대부분 편한 자세로 누워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방법은 배에 손을 올려 놓는 것이다. 그래서 빤냐와로스님은 “배에 손을 올려 놓고 느낌을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배위 손을 대라고 한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있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배의 부품과 꺼짐은 3.34초 걸린다고 했다.
 
스님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담마와나선원 초청탁발법회가 끝났다. 따듯한 봄날 일요일 선원에서 보냈다. 오전에는 법문을 듣고 점심 때는 도반들과 점심공양을 하고 오후에는 수행점검시간을 가졌다. 이런 순서는 개원법회 때부터 해 오던 것이다.
 
탁발법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이는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이다.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 말은 버릴 것이 없다. 그것은 진리의 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어떻게 될까?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창립된지 15년이 되었음에도 교세는 확장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빤냐와로스님도 우려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질의응답시간 말미에 “스님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스님들이 공부해야 한다. 스님들이 공부를 해서 알려 주어야 한다. 스님들이 공부하지 않으면 재가자도 공부하지 않을 것이다.
 
빤냐와로스님은 담마와나선원 재가수행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스님은 “여러분이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째찍질 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스님은 테라와다불교가 무너질까봐 염려하는 것 같다.
 
 
2024-03-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