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성찰하는 삶 반조하는 삶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2. 09:30

성찰하는 삶 반조하는 삶
 
 
한마디 말에 꼽힐 때가 있다. 어제가 그랬다. 유튜브를 보다가 “부자들은 따로 모여서 산다.”라는 말에 꼽혔다. 문헌학자 김시덕 선생의 유튜브 영상에서 본 것이다.
 
요즘 유튜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같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유사한 콘텐츠를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튜브알고리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안양이라는 지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더니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 대한 것을 보았다.
 
고교시절 학교는 성벽 위에 있었다. 서울성벽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성벽 축대 위에 학교건물을 지어 놓은 것이다. 아마도 문화재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에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교 2학년 때이다. 교실 유리창 너머에 성북동이 보였다. 그때 당시에도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학교가 있는 혜화동 역시 부자동네였다.
 
산동네달동네에서 살던 아이는 마이 성채 같은 집을 보았다. 그때 당시 “나는 언제나 저런 집에 살 수 있을까?”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이다.
 
고교시절 그때 당시 집들은 그대로 있다. 세월이 흘렀어도 나는 여전히 성채 같은 집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김시덕 선생의 유튜브 영상에 따르면, 부자들은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또한 부자들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강남과 같은 부자동네 보다도 성북동이나 한남동 같은 뚝 떨어진 곳에서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산다고 말한다.
 
부자동네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잡상인이나 외부인도 출입금지가 된다. 마치 작은 분지 형태로 되어 있어서 입구는 하나라고 한다. 입구에서 출입을 첵크하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동네라고 말한다.
 
영상에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프라이버시라는 말이다. 부자들은 프라이버시가 침해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말과 같다. 이런 성향은 부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 태생을 중시하는 사람들 역시 노출을 자제하고 프라이버시를 지키고자 할 것이다.
 
부자들은 프라이버시가 침해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이런 말을 접하자 떠오른 말이 있다. 그것은 자만이다. 이를 부자의 자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부자의 자만뿐만 아니라 자만이 두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배운 자의 자만과 태생의 자만을 말한다.
 
자만은 타인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누가 나 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랴?”라는 우월적 자만을 가진다. 이와 같은 우월적 자만으로 가득 찬 자들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고 노출되는 것을 꺼려 한다.
 
흔히 이런 말이 있다. 끼리끼리 모여 산다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라고 했다. 그래서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는다.”(S14.14)라고 했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들은 어떤 자들일까? 경에 따르면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26)라고 했다. 불망어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그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 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자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S14.26)라는 가르침에 해당된다. 그런데 오늘날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불법, 편법, 탈법으로 투기를 하여 부자가 된 사람도 도둑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자가 사는 동네를 ‘도둑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똥은 똥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S14.16)라고 했다. 불법, 편법, 탈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투기로 불로소득의 성을 쌓은 사람이다. 지위나 명예, 권력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부자가 부자들끼리 어울리는 것은 당연하다. 많이 배운 자는 많이 배운 자들끼리 교류하려는 것 역시 당연하다. 가문이 좋은 자는 가문이 좋은 자들끼리 어울리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수행자들끼리 어울리려 할 것이다.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성향에 따라 비슷한 부류와 어울린다. 공부하는 분위기가 있는 동네에 살면 공부하는 학생들과 어울릴 것이다. 왜 사람들이 좋은 학군으로 이사 가려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말한다.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종교에서나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말라.”라고 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수타니파타 ‘축복경’을 보면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님을 섬기고”(Stn.259)라는 구절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최상의 축복이라고 했다.
 
부자들은 왜 모여서 살까? 부자들은 왜 프라이버시를 중시할까? 부자들은 왜 노출을 꺼릴까? 아마 그것은 자신의 부와 지위와 명예를 지키고자 함일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나 지위가 낮은 자와 사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실익이 없는 것이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끼리 같은 동네에 모여 살고, 같은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혼사도 같은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자들은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다. 이는 마치 “내가 돈을 이만큼 가졌다.”라고 알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 길거리에 “내가 지금 현금 1억원을 가지고 있다.”라고 떠벌리고 돌아다닌다면 그 사람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부자들은 자신이 부자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프리이버시를 지키기 때문에 누가 부자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거리에서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차는 움직이는 신분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많이 가진 것이 불편할 수 있다. 재산이 많으면 타겟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나 노출에 있어서 자유롭다.
 
오늘날은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이다. 특히 에스엔에스(SNS)시대이다. 그 중에서도 페이스북시대이다.
 
페이스북은 카톡과 블로그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은 실시간 소통하는데 있어서 카톡 못지 않다. 또한 페이스북은 블로그와 같은 전문영역의 글쓰기도 가능하다.
 
사람들은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 알린다. 특히 정치인들은 적극적이다. 이는 이미지 작업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유리한 것은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불리한 것은 절대로 알리지 않는다.
 
부자들도 페이스북을 할까? 프라이버시를 중시하고 노출을 꺼려 하는 부자들은 페이스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 가문이 좋은 사람들도 해당될 것이다.
 
오늘날 페이스북은 자신을 알리는 장이 되었다. 어떤 이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린다. 아는 친구보다는 불특정 다수가 더 많은 장에서 자신에 대하여 이것저젓 알린다. 부자들이 보았을 때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페이스북에서 신상에 관한 것이나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리는 것일까? 아마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모른다. 지킬 것이 많은 자들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부자들은 조용히 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미 많이 가졌고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가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 부와 지위가 “지금 이대로 영원히!”지속 되기를 바랄 것이다.
 
많이 가진 자들에게 철학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감각적 쾌락의 유혹에 빠질 것이다. 오늘날 재벌 2세나 3세들이 마약에 중독되는 것과 같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끼리 모여 살 때 즐기는 삶, 환락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쓰고 있다. 어제도 썼고 내일도 쓸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도 ‘허물’이 될 것이다. 프라이버시를 노출하고는 것과 같다. 부자들이라면,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깨닫지 못한 자가 말을 하면 모두 어긋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닫지 못한 자가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도 허물이다. 그러나 성찰이 있는 글이라면 다르다. 왜 그런가? 발전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은 자기과시의 장이나 다름 없다. 거의 대부분 자신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당연히 유리한 것은 드러내고 불리한 것은 숨긴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부자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페이스북에서 가장 읽을 말한 글은 어떤 글일까? 그것은 성찰이 있는 글이다. 성찰이 있다는 것은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자신의 단점이나 불리한 것도 올린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사는 사람이다.
 
부자들은 페이스북에서 놀지 않는 것 같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고 노출을 꺼려 하는 부자들은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살아 간다. 그런 삶이 어떤 삶인지 알 수 없다. 성찰이 없는 삶이라면 즐기는 삶을 살아 갈 것이다. 필연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 행복은 감각적 행복이기 쉽다. 특히 많이 가진 자들이 그렇다. 대개 맛을 탐하는 삶이기 쉽다.
 
평생 맛을 탐한다면 어떤 결과에 이를까? 초기경전에 명백히 실려 있다. 부처님은 “일찍이 맛을 탐하고 여기서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가운데 동료로서 태어난다.”(M129)라고 했다.
 
맛에 탐착하는 삶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다. 부자들은 많이 가졌기 때문에 감각적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들끼리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축생의 동료로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매일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다.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허물이 된다. 그러나 성찰이 있다면 허물을 넘어선다. 성찰 있는 삶은 부자가 부럽지 않다.
 
나는 일곱 가지 재산을 추구한다. 이는 믿음이라는 재산, 계행이라는 재산, 도덕적 부끄러움이라는 재산, 도덕적 두려움이라는 재산, 배움이라는 재산, 버림이라는 재산, 지혜라는 정신적 재산을 말한다.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일곱 가지 고귀한 재산이 있다. 이런 정신적 재산은 성찰하는 삶을 통해서 갖추어진다. 수행을 통해서 반조로 알 수 있다. 매일 한시간 좌선하는 것도 성찰하는 삶, 반조하는 삶이 된다. 칠성재를 가지고 있는 한 가난하지 않다. 부자가 부럽지 않다.
 
 
2023-12-02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터로 가는 길에 동쪽 하늘을 바라 보니  (38) 2023.12.05
글쓰기도 보국(報國)이다  (38) 2023.12.04
개정판 족보를 받고  (29) 2023.11.30
테이블 커튼을 달았더니  (28) 2023.11.28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2) 2023.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