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일터로 가는 길에 동쪽 하늘을 바라 보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5. 09:55

일터로 가는 길에 동쪽 하늘을 바라 보니
 
 
늘 아침이 되면 마음이 새롭다. 약간의 설레임도 있다. 새날을 맞이하는 마음은 동녘 하늘을 봄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이제 가장 짧은 날인 동지를 향해서 간다. 그러고 보니 동지가 불과 18일밖에 남지 않았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머지 않다고 말한다. 동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어둠은 깊어진다. 절정에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꺽여진다.
 
아침 7시 다 되어서 안양천에 이르렀다.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징검다리에서 본 동쪽하늘은 장엄했다.
 

 
날마다 보는 하늘이지만 볼 때 마다 느낌이 다르다. 하늘을 벌겋게 장엄한 날은 구름이 끼었을 때이다. 구름이 새벽노을에 반사 되었을 때 장엄하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불과 이삼십분이면 사라지고 만다.
 
새벽노을이 있으면 저녁노을도 있다. 새벽노을은 태어남의 징조이고 저녁노을은 죽음의 징조이다. 그런데 둘 다 모두 장엄하다는 것이다.
 
새벽과 저녁은 어둑어둑하다. 그러나 같은 어둠이라도 어둠의 질이 다르다. 하나는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고 또 하나는 지는 해와 같다.
 
새벽의 어둠은 부지런함과 근면함의 상징이다. 저녁의 어두움은 두려움과 죄악의 상징이다. 왜 그런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경전에서 새벽은 불방일의 상징과도 같다. 이는 경전에서“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S45.54)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새벽과 태양은 인과관계라고 볼 수 있다. 새벽이 있어서 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은 태양의 전조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부처님은 새벽과 태양의 비유를 들어서 불방일과 깨달음을 설명했다. 이는“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S45.5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징조가 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새벽은 태양의 전조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이와 같은 전조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빛이다.
 
신들은 빛나는 존재이다. 그래서일까 신들이 출현할 때는 먼저 빛을 던진다는 것이다. 큰 신이라면 빛도 클 것이다.
 
가장 큰 신이 출현하면 어떤 징조가 있을까? 이는 경전에서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D18)”라는 말로도 확인된다.
 
신들에 따라 광명은 다르다. 지위가 높은 신은 빛이 더 날 것이다. 욕계천상의 신보다 색계천상의 신이 더 빛난다.
 
경전에서 하느님(梵天: Brahma)은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는 존재이다. 이런 하느님은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출현하기 전에 전조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대인이 출현할 때 먼저 큰 그림자를 먼저 던지듯이, 하느님이 출현 할 때는 먼저 커다란 빛을 먼저 보이는 것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 새벽이 빛의 상징이라면 저녁은 어둠의 상징이다. 새벽은 생명의 상징이라면 저녁은 죽음의 상징이다.
 
저녁은 죽음의 전조와도 같다. 이를 ‘석양의 산그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특히 죄를 많이 지은 자는 죽음에 이르러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렇다고 죽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지은 행위가 남아 있는 한 죽지 않고 싶어도 죽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는 받게 되어 있다.
 
여기 살인한 자가 있다. 그는 완전범죄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드리워진다.”(M129)라고 했다.
 
완전범죄를 꿈꾸는 자는 세상을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큼은 결코 속일 수 없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악업에 대하여 ‘그에게 걸리고 드리워진다’라고 했다.
 
죄를 지은 자는 문득문득 죄 지은 것이 생각날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임박한 자에 대하여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고 했다. 이는 원초적 죄의식이다. 커다란 어두움의 그림자가 그를 덮칠 때 그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것이다.
 

 
매일매일 똑 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일터로 향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반복되는 일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이다. 그럼에도 똑 같은 날은 없다. 마치 흐르는 물에 똑같은 물은 없는 것과 같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담마(Dhamma: 法)이다.
 
어제도 오늘도 경전을 열어 본다. 경전을 보면 몰랐던 것으로 가득하다. 세상에 이런 가르침도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지평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오늘도 내일도 일터로 간다. 2007년 이래 16년동안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것도 한 사무실이다. 한 사무실에 내리 16년 있는 것이다.
 
매일 새벽노을을 보며 일터로 향한다. 해뜨기 전에 일터로 향한다. 해가 뜨면 날 샌다. 해가 떠 버리면 게으른 것으로 본다.
 

 
해뜨기 전의 전조는 새벽노을이다. 동쪽 하늘을 벌겋게 달군 노을을 보면 장엄하다. 이처럼 해 뜨기 전에 일터에 가는 것에 대하여 ‘얼리버드(Early bird)’ 라고 말할 수 있다.
 
새는 먹이를 찾는다. 새벽에 지저귀는 새가 먹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늦으면 다른 새가 먹고 말 것이다.
 
얼리버드는 새벽형 인간을 상징한다. 그런데 새벽형 인간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남보다 시간을 더 많이 활용하기 때문이다.
 
새벽형 인간은 남보다 한 두 시간 더 활용한다. 아침에 한 두 시간 더 일찍 일터에 나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일년이년도 아니라는 것이다.
 
십년 동안 일터에 일찍 나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기간 동안 남보다 더 일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새벽형 인간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법구경에 마치 새벽형 인간을 찬탄하는 듯한 게송이 있다. 이를 ‘얼리버드게송’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
 
 
방일하지 않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방일하지 않는 자는 압빠마다 (appamāda)를 번역한 말이다.
 
압빠마다는 방일을 뜻하는 빠마다(pamāda)와 반대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압빠마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압빠마다에 대하여 ‘부지런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번역은 아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영어로는 ‘thoughtfulness, carefulness, conscientiousness, watchfulness, vigilance, earnestness’의 뜻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본다면 압빠마다는 ‘사띠’와 비슷한 뜻이 된다.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로 말씀 하셨다. 그때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appamādena sampādethā)”(D16)라고 했다. 이 말은 “불방일정진”을 말한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불방일정진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정진과 사띠가 결합된 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은 정진과 사띠를 강조했을까?
 
여기 37조도품이 있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37가지 원리를 말한다. 그런데 37개의 항목 중에서 정진과 사띠가 차지하는 항목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37조도품 중에 정진에 대한 항목은 9개 이다. 사띠에 대한 것은 8개이다. 세 번째로 많은 것은 지혜에 대한 것으로 5개이다. 이처럼 정진과 사띠에 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어느 정도일까? 37개 항목중에서 정진과 사띠가 17개를 차지 하므로 45%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왜“압빠마데나 삼빠데타(불방일정진)!”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불방일정진)”는 테라와다불교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사야도가 법문할 때도 이 말을 종종 듣는다.
 
2018년 미얀마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담마마마까 에인다까 사야도의 법문이 있었다. 사야도는 축원할 때 “압빠마다를 완성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압빠마데나를 완성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어지는 축원문에 따르면“아빠마데나란 걸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며, 서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며, 앉아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며, 누워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는 것입니다. 또 볼 때도 싸띠하고, 들을 때도 싸띠하고, 냄새에도, 먹을 때에도, 접촉할 때에도, 생각이 날 때에도, 잊지 않고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강조한 것은 압빠마다, 즉 사띠이다. 그래서 늘 새기고 알아차리라고 했다. 그런데 새벽형 인간은 압빠마다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들 보다 일찍 일어나서 남들 보다 한 두 시간 더 일했을 때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
 
법구경에 얼리버드게송이 있다. 이를 ‘새벽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불방일자는 죽지 않는 자라고 했다. 이에 반하여 방일자, 즉 게으른자는 이미 죽은 목숨과도 같다고 했다.
 
불방일자는 왜 죽지 않는 자이고 방일자는 왜 죽은 자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방일하지 않은 존재, 즉 알아차리는 존재, 새김을 확립한 존재는 죽지않는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늙음과 죽음을 여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늙음과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는 없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윤회의 수레바퀴가 부서지지 않지만, 알아차리면, 윤회의 수레바퀴는 부서진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 태어남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죽는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계발시켜 알아차리는 자는 단시간에 길과 경지를 깨닫고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삶에서 태어남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든지 죽든지 간에 결코 죽지 않는다.”(DhpA.I.229, 한국빠일리성전협회본 법구경 527번 각주)
 
 
불방일자는 죽든 죽지 않든 결코 죽지 않는 자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사(不死:amata)인 것이다. 그런데 불사는 열반과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압빠마다가 유지 되고 있다면 그는 불사이고 열반의 상태인 것이다.
 
불사가 된 것은 사띠가 있기 때문이다. 사띠가 늘 유지되고 있는 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사가 되면 윤회의 수레바퀴는 멈춘다. 그러나 방일자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방일자는 진짜 죽는 자이다. 목숨이 다하면 죽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존재로 재생된다. 삶과 죽음이 무한정 반복된다. 그러나 불방일자, 사띠가 유지 되는 자는 죽지 않는 자이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누가 읽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백권당에는 7시 전후로 도착한다. 일반사람들의 업무시간은 9시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한 두 시간 더 일찍 나온다.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쓴다. 2007년 이래 한결같다. 매일 아침 일찍 나와서 오전에는 글쓰기로 보냈다. 이런 세월을 16년 보냈다.
 
오늘도 일터로 가는 길에 동쪽 하늘을 바라 보았다. 구름이 약간 낀 하늘이 붉게장엄되었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고 나면 오전도 중반에 이른다.

글쓰기 하면 집중된다. 이 집중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좌선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제 한시간 명상을 하고 일감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한다.

 
 
2023-12-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