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길따라 선원에 수행기 택배를 보내고
가만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것은 가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 있지만은 않는다. 감각을 즐긴다. 눈과 귀 등으로 감각을 즐기는 데는 바쁜 것이다.
가만 있지 않기로 했다. 가만 앉아서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에스엔에스만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일을 하기로 했다. 글을 쓰는 것, 경전을 읽는 것, 경을 외우는 것, 외운 것을 암송하는 것, 그리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수행기를 쓴다. 그렇다고 매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가우안거 때는 매일 썼다. 한시간 좌선하면 두 세 시간은 글쓰기로 보냈다. 그 결과 한권의 책이 만들어졌다. 책 이름을 ‘111 위빠사나수행기 VI 2023재가우안거’이다. 111번째 책이다. 위빠사나수행기로는 여섯 번째 책이다. 목차는 90개로 692페이지에 달한다.
책을 pdf파일로 만들었다. 블로그 ‘책만들기’ 카테고리에 올려 놓았다. 누구든지 다운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은 종이책으로 만들어야 책 같아 보인다. 인쇄와 제본을 하면 된다. 안양에 있는 ‘제일기획’에 책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103번째 책부터 111번째 책까지 여덟 종류의 책을 만들었다. 보관용으로 두 권씩 만든다. 111번 째 책은 다섯 권 만들었다. 발송할 곳이 여러 곳 있다.
이번에 새로 인쇄-제본한 책은 모두 19권이다. 비용은 17만원 들었다. 비용이 꽤 들긴 하지만 아깝지 않다. 왜 그런가? 책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고 노는데 돈을 쓰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책을 사 놓으면 책을 분실하지 않는 한, 책을 버리지 않는 한, 책이 닳아져 없어지지 않는 한 남아 있다.
새로 만든 책을 책장에 진열해 놓았다. 추가로 여덟 권을 꼽아 놓으니 책장에 책으로 가득하다. 그것도 내가 쓴 책이다. 마치 부자가 된 것 같다.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재가우안거 수행기를 5권 인쇄-제본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연 있는 사람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가장 먼저 빤냐와로 스님에게 보내기로 했다.
오늘 빤냐와로 스님에게 택배를 발송했다. 주소지는 울산이다. 울산 ‘붓다의길따라 선원’으로 보낸 것이다.
붓다의길따라 선원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유튜브 영상으로만 보았다. 아는 사람도 없다. 인터넷 검색해서 주소를 알아 냈다.
선원에 책을 보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힌달전에 ‘담마와나선원’ 책을 이미 발송한 바 있다. 그때 별도의 용지에 수행기가 나오면 보내겠다고 했다. 마침내 책이 인쇄-제본 되어서 보내게 되었다.
빤냐와로 스님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담마와나선원에서 법문할 때 보았다. 또한 유튜브 영상으로 접했다. 한번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스님은 나의 얼굴을 알고 있다. 선원 복도에서 지나칠 때 서로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책을 보낼 때 책만 보낼 수 없었다. 무언가 사연이라도 적어 보내고자 했다. 그래서 짤막하게 글을 썼다. 다음과 같은 글을 프린트 해서 첨부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선원 이병욱입니다. 이번 재가우안거에서 수행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수행기는 7월 31일부터 10월 28일까지 88일동안 기록한 것입니다.
수행초보자입니다. 생업이 있기 때문에 자리를 뜨기 어려워서 사무실 한켠에 경행대와 좌선공간을 만들어 놓고 안거에 임했습니다. 또한 유튜브에 올려진 스님의 과거 영상도 참고 했습니다.
우안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다시 안거하는 심정으로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이번 안거를 계기로 수행을 생활화 하고자 합니다. 더욱 더 정진하겠습니다.
2023-12-06
이병욱 배상”
빤냐와로 스님의 우안거 입제법문을 듣고 재가안거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본다면 우안거에 대한 기록을 발송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책을 발송하면서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했다. 아직까지 한번도 스님에게 질문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행문답에 있어서 질문을 말한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책을 보냈다.
오늘 우체국에 가서 책을 택배로 보냈다. 아마 내일 울주에 도착할 것이다. 과연 스님은 책을 볼까?
책은 누군가 받을 것이다. 아마 선원 봉사자가 먼저 받을지 모른다. 받아서 스님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스님들을 많이 알지 못한다. 아는 스님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빤냐완따 스님과는 에스엔스로 소통할 정도로 가깝다.
언젠가 도반으로 문자 받은 것이 있다. 며칠 글을 올리지 않았더니 스님이 궁금해 하더라는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스님이 글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에 글을 쓰면 모두 공개되는 것이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다. 검색만 하면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보는지는 알 수 없다.
글을 쓸 때 공인의 마음으로 쓰고자 한다. 누군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함부로 쓸 수 없다.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글을 쓰지 않는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글, 생동감 넘치는 글을 쓰고자 한다.
글 쓰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허물이 된다. 글쓰는 행위는 구업(口業)이 된다.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는 말이 있다. 말을 하면 구업이 되듯이 글을 쓰는 것도 구업이 된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그것은 솔직하게 쓰는 것이다. 불리한 것도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써야 생생하고 생동감 넘치는 글이 된다.
글을 쓸 때는 원칙이 있다. 첫째,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이다. 글에 사구게 하나라도 넣는 것이다. 하나라도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이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의미 있고 격식을 갖춘 글을 쓰는 것이다. 셋째, 동어반복과 비속어는 피하는 글이다. 이는 정찬주 작가로부터 충고 받은 것이다.
매일 의무적으로 글쓰기 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하나의 글은 써야 한다. 어떤 내용이든지 상관 없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만 쓰면 된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글쓰기 하는 것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렇게 책을 만들어 택배로 발송하는 것 역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을 즐기는데 있어서는 바쁘다는 것이다.
일생을 감각을 즐기는 것으로 보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악업만 증장될 것이다. 그렇다면 눈과 귀 등으로 감각을 즐기는 것이 왜 악업인가? 이는 욕망으로 즐기기 때문이다.
즐기는 삶은 악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모른다. 눈이 있어서 보고 귀가 있어서 듣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눈은 보는 것을 즐기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오욕락을 즐기는 것은 정당화 된다.
사람이 한평생 오욕락만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어떻게 될까? 원 없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이 들어 신체기관이 망가졌을 때 더 이상 오욕락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감각기관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감각기관은 수호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사띠 해야 한다. 매사에 새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항상 사띠하기 위해서는 담마를 배워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사띠가 있는 삶과 사띠가 없는 삶은 차이가 크다. 전자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이 되기 쉽고, 후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이 되기 쉽다.
사띠가 있는 삶은 선업이 된다. 사띠가 없는 삶은 불선업이 된다. 또한 보시 하고 지계 하고 수행하는 삶은 선업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각을 즐기기만 하는 삶은 불선업이 된다. 오래 살면 살수록 불선업만 증장된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사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감각을 즐기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에 출가이유가 있다. 랏타빨라는 네 가지 출가이유를 말했다. 그것은 “1)이 세계는 불안정하여 사라진다”라는 것과, “2)이 세계는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라는 것과, “3)세상에는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라는 것과, “4)이 세계는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는 것이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지금 당장 출가해야 한다. 왜 그런가? 오늘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시가 급하다. 어떻게 감각을 즐기고만 있을 것인가?
오늘밤까지만 살고자 한다. 오늘을 일생처럼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고자 한다면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지금 이순간이 지나면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를 뜨면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아무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계는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M82)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 이순간은 행복하게 보내고자 한다. 그러나 행복은 즐김과 동의어이다.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는 것으로만 보낸다면 불선업만 증장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자는 감각만 즐기는 삶을 산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순간을 즐겨서는 안된다. 그때 그때 사띠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M131)라고 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
오늘 택배를 보냈다. 이런 행위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글쓰기도 그렇고 수행하는 것도 그렇다.
2023-12-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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