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가 행복해야 자애의 마음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14. 10:37

내가 행복해야 자애의 마음을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왕자가 세존이시요, 잠을 잘 주무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한 것이다.

 

어떤 한국사람이 달라이라마 존자를 친견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존자에게 대뜸 존자님은 깨달은 사람입니까?”라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존자는 저는 잠을 잘 자는 사람입니다.”라며 동문서답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 마자 잠든다고 말한다. 복 받은 사람이라고 본다. 잠을 이루기가 힘든 세상에서 세상 모르고 잠을 잘 잔다면 얼마나 축복일까?

 

부처님은 왜 잠을 잘 잔다고 했을까? 이는 경에서 탐, , 치로 설명되어 있다. 탐욕이 없는 사람, 성냄이 없는 사람,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은 잠을 잘 잔다고 했다. 한마디로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잘 잔다는 것이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잠을 자도 깊게 자지 못한다. 자다가 깨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 밤은 잠을 잘 잤다. 온 몸이 나른할 정도로 잤다. 몇 년에 한번 있는 일이다.

 

잠을 잘 자고 나면 몸이 가볍다. 마음도 평안해진다. 몸과 마음이 경안하게 되었을 때 최상의 행복을 맛 본다.

 

 

백권당 가는 길에 발걸음이 가볍다. 하늘은 잔뜩 찌뿌려 있지만 마음은 경쾌하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하루빨리 병고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민의 마음이 생겨난다.

 

 

흔히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그러나 자애의 마음을 내는 데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내가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행복한 상태가 되어야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해외여행가면 천상의 대접을 받는 것 같다. 물론 패키지 여행을 말한다. 사성급 호텔에서 자며 황제와 같은 식사를 한다. 맛 있는 음식을 보았을 때 가족생각이 난다는 말을 들었다.

 

자애의 마음과 연민의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나 자신이 불행해 처해 있다면 자애의 마음이 나오기 힘들다.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면 연민의 마음을 낼 여유가 없을 것이다.

 

글은 아무리 잘 써도 허물

 

하루하루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티끌이 없어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나는 과연 얼마나 티끌이 없고 얼마나 부끄러움이 없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허물이 많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도 많다. 이런 허물을 어떻게 씻어 낼 수 있을까?

 

글을 쓸 때는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 같다. 마음이 더러우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쓸 이유도 없고 쓸 필요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시간낭비, 정력낭비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글 쓰는 행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행위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글도 글 나름이다. 가장 잘 쓴 글은 성찰이 있는 글이다. 자신의 자랑으로 도배 되어 있는 글은 보기기 역겹다. 마치 매번 자신의 얼굴사진을 올려 놓는 것과 같다.

 

자랑하는 것은 한두 번으로 족하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은 자랑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 써도 허물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럴 때 성찰의 글을 발견하면 새롭다.

 

성찰의 글을 보면 반갑다.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말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글을 보면 신선하다. 그러나 그런 글은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대부분 자랑하는 글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실시간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에스엔에스에서 볼 수 있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아니 매일 글을 생산하고 있다. 하루에 하나의 글을 의무적으로 쓴다. 그것도 장문의 긴 글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읽어 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글이 잘 쓴 글일까? 그것은 솔직하게 쓴 글이다. 자화자찬하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불리한 것도 쓸 줄 알아야 한다. 성찰하기 위한 글을 쓰는 것이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글이다.

 

성찰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왜 그런가? 발전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단점이나 허물, 부끄러운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개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매일 아침 하얀 여백을 접한다. 흰 여백에 문자가 탁탁 박힌다. 자판을 두들기는 대로 여백을 메꾸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강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글은 논리이다. 글에 논리가 없으면 횡설수설하기 쉽다. 하나의 주제를 잡고 자판을 칠 때 머리 속에서는 다음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생각하는 것이 자판을 통하여 여백에 꼽히는 것이다. 고도의 집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에서 집중이 형성된다. 이런 집중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요즘에는 글쓰기가 끝나면 곧바로 좌선에 들어간다. 글쓰기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그대로 가져 가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몰입하면 삼매의 상태가 된다. 글쓰기에 몰입하면 글쓰기삼매가 된다. 이때 탐, , 치의 마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런 집중을 그대로 좌선에 가져 가면 최상의 평화와 고요를 맛본다. 그것은 좌선 중에 나른함으로 나타난다.

 

이제 깨달음을 내려 놓자고 하는데

 

잠을 잘 자고 나면 나른하다. 마찬가지로 좌선에서 집중이 잘 되면 나른한 상태가 된다. 몸이 이완 되었을 때 최상의 컨디션 상태가 된다. 몸이 나른하면 마음도 평안해진다.

 

몸과 마음의 나른함에 그쳐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고요와 평안함에 머물러 있다면 행복, 즉 즐거운 느낌을 즐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깨달음이라는 궁극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불교에 대하여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갖는다. 심지어 출가수행자도 불교학자도 깨달음이 무엇인지 묻는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할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될까? 아마도 그것은 한국적 불교현실에 기반한 것인지 모른다.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신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 밤 잠자기 전에 유튜브를 하나 보았다. 임승택 선생이 도봉산 광륜사에서 법문한 것을 올려 놓은 동영상을 말한다.

 

임승택 선생은 안면이 있다. 아마 2018년이었을 것이다. 그때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총무원 청사가 있는 2층 공간에서 불교학술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정평불 회원이기도 한 임승택 선생은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쓴 글을 종종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승택 선생에 따르면 깨달음이 신비화 된 것은 중국불교 전통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이는 간화선 수행방식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임승택 선생은 하나의 예를 들었다. 어떤 스님이 깨달음이 온 것 같아서 스승에게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스승은 다짜고짜 몽둥이질부터 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달음에 대하여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몽둥이로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음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깨달음에 대하여 말하면 안되는 것일까? 이는 다름아닌 깨달음을 신비화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학자는 이제 깨달음을 내려 놓고 행복을 말하자.”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요즘 행복을 말하는 스님들이 많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행복을 말한다. 어느 학자는 깨달음 추구에서 탈피하여 행복을 말하는 불교를 만들자고 한다.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빼면 무엇이 될까? 불교로서 정체성이 상실될 것이다. 마치 불교에서 윤회를 빼는 것과 같다. 깨달음 대신에 행복의 불교로 전환했을 때 이를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불교가 불교가 아니라 행복교가 될 것이다.

 

깨달음 대신에 행복을 말하자는 교수는 누구일까? 짚이는 데가 있어서 이름과 키워드를 넣으니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교수는 교계신문 칼럼 말미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이제 사찰이나 선방과 같은 특별한 공간에서 깨달음을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가치일 수는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적 가치는많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깨달음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로 살아야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07 / 2021 113일자 / 법보신문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교수의 글을 보면 깨닫기 위해서 수행할 필요가 없다. 선방에서 안거에 드는 것도 헛된 일이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깨달음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행복불교를 추구한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감각적 행복이기 쉽다. 이는 감각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물론 선정을 즐기는 것도 행복이다. 더 나아가 열반도 행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불교학자가 말하는 행복은 어떤 행복일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그래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열반의 행복은 세간적 행복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간적 행복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즐거움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그것이 감각적 행복이든 선정의 행복이든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은 감각의 행복이나 선정의 행복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행복한 느낌을 갖지 않는 행복을 말한다.

 

최상의 행복은 행복한 느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되었을 때 어떤 느낌도 없다. 행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 열반이라고 했다.

 

어느 불교학자는 이제는 깨달음을 내려놓고 행복의 불교를 만들자고 했다. 이는 불교가 불교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마치 불교에서 윤회를 빼 버린 불교와 같은 것이다. 행복을 말하는 스님이나 학자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을 보면 마치 행복전도사처럼 보인다.

 

 

한국불교가 어쩌다가 행복교가 되었을까? 그것은 깨달음을 신비화한 중국불교의 영향이 크다. 간화선 수행을 해서 한방에 몰록 깨닫는 것을 깨달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화두를 들어 몰록 깨닫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점검하기 위해서 물어 보면 몽둥이질한다고 하는데 이런 일화는 깨달음에 대한 신비화를 부채질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저 높은데 있는 것일까? 도저히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이럴 때 포기의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스님이나 학자는 깨달음 대신에 행복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행복교가 된 것이다.

 

왜 사성제를 알아야 하는가?

 

깨달음이란 무엇이가? 묻고 또 묻는다. 그런데 동아시아불교에서 말하는 몰록 깨달음에는 사실상 답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몽둥이가 답인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명확하게 답한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단번에 몰록 깨닫는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또한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은 사성제로 설명된다.

 

깨달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 좋아하는 중도도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이것 하나만 말하면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다. 십이연기도 깨달음이고 팔정도를 완성하는 것도 깨달음이다. , , 치를 소멸한 것도 깨달음 상태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사성제이다.

 

불교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님도 있고 학자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교학적 지식이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사부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아비담마나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임성택 선생도 법문에서 말했다. 그것은 사성제로 요약된다고 했다. 마치 코끼리발자국이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섭하듯이, 마찬가지로 사성제는 깨달음에 대한 모든 것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부처님 가르침에 깨달음은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가장 핵심이고 근본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와 십이연기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팔정도는 사성제에서 도성제에 대한 것이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팔정도와 사성제는 맞물려 돌아간다. 이뿐만 아니다. 사성제에서 고와 고의 소멸은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른바 이지(二枝)연기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 하나로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한국의 불자들은 법회의식할 때 반야심경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된다. 물론 공의 논리로 부정된다. 거기에는 무고집멸도라고 하여 사성제도 들어가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사성제가 부정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사성제이다. 마치 코끼리 발자국처럼 모든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된다. 따라서 사성제를 아는 것이 불교의 깨달음이 된다.

 

부처님은 사성제에서 괴로움의 진리를 설했다. 부처님이 지금 여기서 행복을 말했다면 즐거움의 진리를 설했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행복교가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행복을 설했다면 불교는 당대로 끝났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이는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이다.”라 하여 사고와 팔고를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이 한시바삐 끝나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램뿐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변한다.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족이 된다. 결국 괴로운 것이 된다.

 

부처님은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라고 했다. 결국 모든 느낌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행복한 느낌, 즐거운 느낌도 예외가 아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여덟 가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한 이유가 된다.

 

불교인들은 깨달음을 추구한다. 불교인이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한다면 진정한 불자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열반은 실재하는 성품법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 마음이 평화롭다. 마치 나른하게 잘 자고 난 것과 같다. 좌선 중에 나른한 행복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이런 행복은 탐, , 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가능하다.

 

불교의 궁국적 목적은 열반이다. , , 치로 대표 되는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깨달음은 완성된다. 그것은 열반상태로 설명될 수 있다.

 

매일 한시간씩 좌선을 한다. 깨달음의 길로 가는 여정이다. 그날이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다.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이 될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먼저 그 길을 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도 남겨 놓았다.

 

요즘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벌써 열반에 관한 항목에 이르렀다. 선사들이 말하는 몰록 깨닫는다는 돈오를 말하지 않는다. 매우 합리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먼저 열반에 대한 마하시사야도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도와 과의 대상인 열반(nibbana)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차 한다. 열반은 어떠한 궁전 같은 건물이 아니다. 어떠한 도시, 어떠한 나라도 아니다. 휘황찬란한 빛도 아니다. 깨끗한 요소, 차가운 요소도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그러한 건물, 도시, 나라, , 깨끗한 요소, 차가 운 요소 등은 형성되지 않은(asankhāta 조건지어지지 않은, 無爲의) 실재성품법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각각 개념법, 형성된(sankhata 조건 지어진, 有爲의) 실재성품법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형성되지 않은 실재성품법인 열반은 ‘santi-lakkhanā = 번뇌, 윤회의 고통이 사라 짐 = 소멸됨 = 적정함이라는 성품일 뿐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495)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열반에 대하여 실재하는 성품법이라고 했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에 대하여 설한 것은 형성들이 사라져 형성들과 반대인 상태이기 때문에 그 열반에 대해 형성들의 명칭과 반대되는 명칭으로 설하셨다.”라고 했다.

 

열반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도와 과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마하시사야도는 열반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를 근거를 들어 설명했다.

 

 

“Uppado sankhārā, anuppādo nibbāna, Pavattam sakhāra, appavatta nibbāna Nimitta sankhārā, animitta nibbāna, ayūhana sankhārā, anāyūhana nibbāna, paisandhi sankhārā, appaisandhi nibbāna”(Ps.58)

(
대역)
“uppado
일어남이 있는 법은 sa
khāra형성이다.
anuppado
일어남이 없는 법이 nibb
āna열반이다.
pavatta
끊임없이 생겨나는 물질·정신의 진행은 sakhāra형성이다.
appavatta
끊임없이 생겨나는 물질·정신의 진행이 소멸된 법이 nibbāna열반이다.

nimitta모습이나 형체 형태 등의 표상으로 드러나는 법은 sakhāra형성이다.
animitta
모습이나 형체 등의 표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nibbāna열반이다.
ay
ūhana행복하기 위해 애씀은 sakhāra형성이다.
an
āyūhana애씀이 사라진 법이 nibbāna열반이다.
pa
isandhi이전 생의 마음과 연결시키는 재생연결은 sakhāra형성이다.
appa
isandhi재생연결이 사라진 법이 nibbāna열반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496)

 

 

쿳다까니까야에 속해 있는 무애해도에 따르면 열반에 대하여 10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상카라(sakhāra)와 닙바나(nibbāna)에 대한 것이다. 서로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열 가지 중에서 행복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ayūhana행복하기 위해 애씀은 sakhāra형성이다.”(Ps.58)라고 했다. 누군가 불교에 대하여 행복의 종교라고 말한다면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열반의 행복을 말하지 않고 행복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물론 불교의 궁극적 행복은 열반이다. 이는 아상카따(asakhata). 즉 형성되지 않은 것에 대한 행복이다. 무위의 행복을 말한다. 세간적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깨달음은 신비로운 것일까? 깨달음은 범접할 수 없는 것일까?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몽둥이를 맞을 정도로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초기경전을 접하면 깨달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너무나 친절한 부처님이다.

 

내가 행복해야 자애의 마음을

 

오늘도 이 글이 끝나면 한시간 앉아 있을 것이다. 글쓰기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가져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세 시간 몰입해서 쓰다 보면 확실히 변화가 있다. 이런 집중을 활용하는 것이다.

 

아직 열반을 체험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평화로운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평화로운 상태도 열반이라는 것이다. 이는 열반을 광의로 해석한 것이다.

 

 

오늘 잠을 잘 잤다. 몇 년 만에 잘 잔 것 같다. 백권당으로 향하는 길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날씨는 비올 것처럼 잔뜩 찌뿌려져 있으나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날씨에 따라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행복해야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 내가 고통이 없어야 연민의 마음을 낼 수 있다. 항상 마음이 평온하고 몸이 가볍다면 그것이 바로 열반일 것이다.

 

 

2023-1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