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대한민국을 집어삼켰는가?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왜 이렇게 역사가 반복될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과거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다. 미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체 어떤 요인이 역사를 반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흔히 역사는 진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보면 그다지 크게 진보한 것 같지 않다. 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했다고 하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바뀐 것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권력욕’ 때문일 것이다.
어제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요즘 유튜브와 에스엔에스에서 회자되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공통적로 말한 것이 있다. 거의 대부분‘분노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혐오로 인하여‘속이 니글거렸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억울해서‘눈물을 흘렸다’라고 말한다.
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그 날 이후 영화에 푹 빠졌다. 대선 이후 뉴스 대신에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
뉴스를 보면 분노가 일어난다.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마치 전두환 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
뉴스를 보면 속이 뒤틀린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M2)라고 했다.
여기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만 보면 불선심이 일어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이 나오지 않을 때 가는 것이다. 그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에 해당될 것이다.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피함으로 불선심을 방지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뉴스는 보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영화를 보고 유튜브를 보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은 TV마저 보지 않는다. 명상하는 삶에 방해되는 것이 큰 이유이다. 그럼에도 어제 영화를 본 것은 표를 끊어 놓았기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사실상 영화관과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에 관한 한 나는 ‘촌놈’이다.
영화는 안양 범계역에 있는 롯데시네마에서 보았다. 8관까지 있다. 1관에서 보았다. 객석은 251석이다. 저녁 7시부터 보았는데 2시간 10분 정도 된다. 그런데 몰입해서 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보는 맛이 난다. 먼저 좌석이 편안하다. 마치 우등고속버스를 타는 것 같다. 화면은 넓직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압도한다. 사방에서 들려 오는 사운드는 현장감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을 유발했다. 또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업치락뒤치락한 것이다. 고함소리가 나고 총소리가 났다. 시종일관 우당탕퉁탕한 갓 같았다.
영화는 지나간 역사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쯤은 다 알고 보는 것이다. 과거 드라마 등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때 이런 영화를 만든 목적은 무엇일까?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영화 ‘서울의 봄’에는 서울의 봄이 없다. 그럼에도 ‘서울의 봄’이라고 했다. 대체 십이십이와 서울의 봄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영화 ‘서울의 봄’은 영화제목과는 거리가 멀다. 끝까지 보아도 서울의 봄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십이십이(12.12)’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979년 12월 12일 밤과 13일 새벽 사이에 일어났던 하루밤 사건에 대한 것이다.
영화를 만든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검찰권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검찰권력을 생각했다.
그때와 오늘이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군부에서 검찰로 권력이 바뀌었을 뿐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이런 마음이 들게 했다면 영화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 없다. 영화를 제작한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영화는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를 막장드라마라고 말한다. 영화 ‘서울의 봄’도 욕하면서 보았다.
영화 속의 전두광은 분노유발자이자 혐오유발자이다. 사투리를 써가면서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을 보면 권력형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들게 만든 것은 아무래도 배우 황정민이 연기를 잘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하면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 보면서 내내 혐오했다. 영화의 결말은 뻔한 것이다. 마치 악이 이기고 선이 지는 것 같았다. 똑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아마도 영화에 깊이 몰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을 하면 승리자가 있고 패배자가 있다. 영화에서 반란군들은 승리하자 양주를 마시며 디스코를 추었다. 그러나 패배자들은 얻어 터진 채로 감방에 널부러져 있었다.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한 자는 고통 속에 잠든다.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Dhp.201, S3.14)
꼬살라국왕 빠세나디는 그의 조카 마가다국왕 아자따삿뚜와 세 번 싸워서 모두 패했다. 애송이 같은 조카에게 패한 빠세나디 왕은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승리를 얻음으로써 증오를 낳는다. 패배한 자는 고통으로 괴로워한다.”(DhpA.III.260)라고 말했다.
승리는 원한을 부른다고 했다. 다른 자를 정복한 자는 정복된 자로부터 원한을 사는 것이다. 패배한 자는 “나는 언젠가 적을 패배시킬 것인가?”라며 고통스러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신군부에 대하여 ‘반란군’이라고 자막을 내 보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났음을 말한다. 성공한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십이십이(12.12)는 지금으로부터 44년전인 1979년에 일어났다. 그때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 학교는 학교는 평온했다. 대학은 본래 평온한 곳인 줄 알았다. 그것은 아마도 엄호한 유신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유신시대였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유신시대였다. 긴급조치 9호로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세상은 조용했다. 개헌의 ‘개’자만 말해도 잡아 가던 시절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대학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자 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과정 중에 ‘국민윤리’가 있었다. 주로 서양철학에 대하여배운 것으로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포이에르 바하’라는 인물이 기억 남는다. 유물론적 변증법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담당교수의 태도는 10.26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철학과 교수는 10.26 이전에는 오로지 철학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10.26이 나고 3주간 휴교가 끝난 다음 다시 강의가 시작 되었을 때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수의 말에 깜짝 놀랐다. 긴급조치 9호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살다가 이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 동안 얼마나 답답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신말기 대학교 1학년 학생은 세상물정을 잘 몰랐다. 세상은 평온했다. 원래 세상은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10.26과 12.12가 일어나자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해 1980년이 되자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자 “대학은 본래 이런 곳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1980년 서울에 봄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 그토록 혐오하던 자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그토록 외쳤건만 거꾸로 간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자 절망했다.
서울의 봄은 짧게 끝났다. 그 때 5월 16일 서울역에서 수만명 모였을 때가 절정이었다. 다음날 부터 휴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두환은 승승장구했다. 결국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 날 이후 뉴스를 보지 않았다. 전두환 체제는 무려 8년동안 지속되었다.
혐오스러운 대상을 보는 것은 고역이다. 전두환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거나 채널을 돌렸다. 모든 것이 절망적 상황이었다. 공부도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필요했다. 1981년 2월 군대를 도피처로 삼았다.
군대에서 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국난극복기장’을 말한다. 마치 훈장처럼 생겨서 훈장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가지고 있지 않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그 때 받았던 것과 똑 같은 것이 사진으로 올려져 있다.
군대에서 기장을 준 것은 국난을 극복했기 때문에 준 것이다. 그때가 아마 1981년 5월쯤이었을 것이다. 서울의 봄이 있은지 딱 1년 되던 때에 기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열심히 데모한 사람들에게도 국난을 극복했다고 하여 기장을 준 것이다. 마치 넌센스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역사는 매번 반복된다. 두 번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1979년 이후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가 진보한 것일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권력욕이 있는 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군부쿠데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 쿠데타는 일어났다. 그것은 검찰권력의 권력찬탈을 말한다. 마치 검찰에도 신군부의 하나회와 유사한 특수부가 있어서 ‘연성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영화에서 전두광은 권력욕의 화신이다. 전두광은 하나회를 결성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형님, 동생”하면서 하나의 패밀리를 형성했다. 이런 행태는 조폭세계에서 “형님, 아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두광은 욕도 잘한다. 노태건이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자 쌍욕을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조폭 같은 폭력집단임을 말한다. 검찰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힘을 지니고 있으면 법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운 것이다.
거사가 성공하면 혁명이고 거사가 실패하면 반란이 된다. 그들은 권력찬탈에 목숨을 걸었다. 하루밤 사이에 쿠데타가 성공하면 오랫동안 호의호식할 수 있다는 것을 5.16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에는 신군부 하나회 멤버들은 총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최근 검찰은 법으로 권력을 잡았다. 검찰 특수부 사람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선택적으로 적용해서 합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것이다. 이에 조국이 희생양이 되었다. 특수부는 조국을 사냥했다.
조국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2022년 5월에 본 ‘조국의 시간’이라는 다큐영화를말한다. 진모영 감독이 초대해 주어서 특별시사회에서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제 조국의 시간이다’(2022-05-25)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검찰 특수부는 조국을 사냥하여 권력을 잡았다. 그 과정이 영화 ‘서울의 봄’에서 본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사조직을 만들어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이 너무나 똑같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의 권력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국영화 ‘조국의 시간’을 봤을 때 불편했다. 마치 사냥개와 같은 검찰권력에 당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눈을 감고 소리만 들었다. 이는 다름 아닌 패배의 기록이다.
어제 본 영화 ‘서울의 봄’은 패배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역사가 다시 평가했다. 신군부의 정권찬탈에 대하여 쿠데타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두 명의 대통령을 처벌했다. 또한 쿠데타세력을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두 건의 패배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고 하나는 진행 중에 있다. 그렇다면 역사는 검찰권력의 정권찬탈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릴까?
현재 검찰권력은 신군부의 길을 갈 가능성이 높다. 아마 검찰 특수부에 대한 영화가 나올지 모른다.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보로 왔다. 이삼십대가 가장 많은 것 같다.
이삼십대는 1979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권력을 찬탈하는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모두 분노하였을 것이다. 또한 혐오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영화를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고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끝난 사건에 대하여 영화로 만든 것은 아마도 분노하라고 혐오하라고 만든 것 같다. 이는 아마도 현 정권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권력은 검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권력자는 군인에서 검사로 바뀌었다. 이런 때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잘 만든 콘텐츠 하나는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영화가 끝날 때 마지막 자막이 떴다. 자막에는 “신군부가 대한민국을 집어삼켰다.”라고 했다. 엔딩 자막을 보자 자연스럽게 오늘날 검찰권력을 떠 올리게 되었다. “권찰권력이 대한민국을 집어삼켰다.”라고.
2023-12-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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