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마음이 폭주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18. 07:55

마음이 폭주할 때


새벽 세 시대이다.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일까 일찍 깼다.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 온다. 생각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이럴 때는 멈추어야 한다. 글쓰기보다 좋은 것은 없다.

새벽에 엄지치기 하는 것을 자제한다. 스마트폰을 치다보면 눈도 피로하고 기운도 빠진다. 글이 완성되었을 때 기진맥진한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글쓰기보다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생각을 전개해 나갈 때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글쓰기는 훌륭한 자아성찰의 수단이 된다.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은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그들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윤회의 바다에서 거친 물살에 휩쓸려 가는 사람을 의지처로 할 수 없다. 이럴 때는 법에 의지해야 한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가르침을 섬으로 삼아야 한다. 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경전을 읽으면 의지처가 된다. 마음이 심난했을 때 경전을 펼치면 평온해 진다. 거기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지금으로부터 이천오백년전이나 현재나 항상 그대로 있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로 본다. 하나는 진리는 진리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으로 본다. 또 하나는 진리는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으로 본다.

생명 있는 것들은 생멸한다. 나고 죽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물질이 한번 생겨날 때 마음은 열여섯 번 일어난다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은 요동친다. 어느 것이 내 마음인가?

마음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마음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된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파탄난다. 지금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마음의 폭주에 제동 걸어야 한다. 가르침을 새기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경전을 펼치면 늘 접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니까야경전에 무수히 등장한다.

 


경전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문구가 있다. 마치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는 식이다. 이처럼 니까야 도처에서 언급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새길 필요가 있다. 사띠(sati)라는 말이 반드시 수행용어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경전에 있는 가르침을 때때로 새기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오온이다. 지금 여기서 생겨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서 생겨난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새기라는 것이다.

새긴다는 말이 있다. 기억하는 것보다 강력한 말이다. 뼈에 새긴다는 말이 연상된다. 뼈에 사무치도록 새기고 또 새기는 것이다. 사띠하는 것이다. 새김은 사띠의 번역어이다.

수행과 교학이 함께 가야 한다. 새가 양날개로 나는 것과 같다. 수행만 있고 교학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그 역도 성립된다.

여기 수행자가 있다. 그는 오로지 수행만 한다. 그러나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쉽게 무너진다. 이른바 멘탈이 붕괴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교학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사상누각이다.

여기 교리에 통달한 사람이 있다. 그는 교학에 있어서 삼장법사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접했을 때 쉽게 무너진다. 진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론만 알고 실제는 모르는 것과 같다. 이론으로 수영하고 이론으로 자전거타는 것과 같다.

사람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스승에 의지해서도 안된다. 의지해야 할 대상은 법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이야말로 진정한 의지처이다. 진리는 날씨 변하듯이, 사람 마음 변하듯이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폭주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경전 문구를 떠 올려야 한다. 문구 몇 개 정도는 외워 두는 것이 좋다.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써 먹을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지금 나에게서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 아쉬웠던 일, 서운했던 일, 바라고 원하는 일 등 생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내버려 두면 큰 일 난다. 생각의 폭풍이 일어 날 때 외곬이 될 수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생각의 집을 짓는다. 더 나아가면 집착은 파괴적으로 작용된다. 관계가 파탄 날 수 있다. 이럴 때는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며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 한다.

마법의 주문 원리는 간단하다. 오온에서 나를 빼는 것이다. 나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지각, 나의 형성, 나의 의식이 될 수 없다. 오온 그대로가 되는 것이다.

현재 언짢은 느낌이 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여기서 나를 떼어 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언짢은 느낌, 불편한 느낌만 남게 된다. 나를 떼어 냈으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3자의 입장에서 본다. 마치 남 보듯 보는 것이다. 마음의 폭주가 멈추어지는 순간이다.

좌선했을 때 다리가 저릴 때가 있다. 통증이 발생하는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다. 이럴 때 통증을 나의 괴로움으로 보면 견딜 수 없다. 그러나 라는 개념을 떼어 내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남의 다리 보듯 하는 것이다.

수행따로 생활따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수행에서 체험한 것을 생활에서도 적용해야 한다. 마음이 심난할 때 나의 마음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며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된 것이다. 이전과 이후가 다른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다른 대상에 몰두 했기 때문이다. 글 쓰는 행위로 인하여 불안했던 마음은 이전마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음이 안심되었다.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다. 경전에서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새겼을 때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오온에서 나라는 개념을 떼어 냈을 때 안심이 된 것이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쇼펜하우어 말을 접한다.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혼자 살라는 것이다. 이런 말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것이다.

친구 없이 살수도 있다. 혼자서도 살 수 있다. 의지할 대상이 없어도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쇼펜하우어 말대로 자신에게 의지하는 삶은 가능할까?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잘 모른다. 유튜브에서 그의 철학을 약간 접했을 뿐이다. 철학자로서 훌륭한 사람으로 본다. 그가 남긴 어록은 유튜브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누구나 혼자 살 수 있다. 고독을 친구로 하여 혼자 살 수 있다. 반면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을 것이다. 늘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홀로 살려거든 아상을 내려 놓아야 한다. 오온에서 나라는 개념을 떼어 놓아야 홀로 살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다 필요없다, 혼자 살아라!”라고 말한 것은 오온에서 나를 떼어 내야 가능한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학인의 입장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빤냣띠, 즉 개념일 뿐이다.”라고. 나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개념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 속에만 있어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생멸이 없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은 죽지 않는다. 영원히 사는 것이다. 창조주도 언어적 개념이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이다. 마치 토끼의 뿔처럼, 거북의 털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있다고 본다. 오온을 내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수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통증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나라는 말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는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개념놀음에 속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오온에서 나를 떼어 냈을 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게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자신은 자신의 수호자 된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법귀의와 자귀의를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법에 의지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여기서 자신은 자아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개념을 버린 성자를 지칭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유신견(有身見)은 버려진다. 오온을 나의 것, , 나의 자아로 여기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버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사악처는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많이 잡아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진흙탕에 빠진 자가 진흙탕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외롭다고 하여 배우자, 자식, 부모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 친구에게 의지해서도 안되고 스승에게 의지해서도 안된다. 오로지 법과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다 필요 없다. 다 부질 없다, 홀로 살아라!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 홀로 사는 것이다. 앗따굿따(attagutta), 자신이 수호자가 되었을 때 홀로 갈 수 있다. 자신을 섬으로 삼는 것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아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엄지치기 하다 보니 5 12분이 되었다. 두 시간 동안 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정리 되었다.

부처님 가르침은 위대하다. 마음이 폭주할 때 가르침을 새기니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기적 같은 일이다. 오늘 하루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


2023-12-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