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케이(K) 부디즘은 어디로, ‘우리가 구산(九山)이다’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27. 11:18

케이(K) 부디즘은 어디로,  ‘우리가 구산(九山)이다’를 보고
 
 
스님에게 카톡이 왔다. 스님은 아무 설명 없이 하나의 링크를 올려 놓았다. 유튜브영상의 제목은‘우리가 구산(九山)이다(https://youtu.be/q3YVlkiNShY?si=cnjCuukyuHGRcqty )’라고 되어 있다. 혜월스님이 보내 온 것이다.
 
영상은 송광사TV에서 만든 것이다. 영상은 56분으로 꽤 긴 길이이다. 구산스님의 입적 4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외국인 제자들이 함께 하고 있다.
 
영상은 외국인 제자들의 구산스님에 대한 추억과 회고로 이루어져 있다. 버스웰이나 배철러와 같은 이름이 익은 외국인 제자들도 있다. 구산스님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구산스님이 떠난 지 올해로 40년 되었다고 한다. 구산스님은 1909년에 태어나 1983년에 입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구산스님과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이렇게 영상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영상에서 어떤 외국인 제자는 영어로‘코리안 부디즘’이라는 말을 했다. 자막에서는 이를 ‘케이(K) 부디즘’이라고 처리했다.
 
오늘날 ‘케이(K) 팝’은 세계적인 말이 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케이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케이 팝이 뜨자 ‘케이(K) 푸드’도 덩달아 뜨게 되었다. 이제 한국식 음식이 세계적인 음식이 된 것이다.
 
한국의 문화는 이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거의 전분야에 있어서 케이(K)자가 붙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한국에 대한 것을 보면 ‘국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국적인 것이면 다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 같다. 그런데 “케이(K) 부디즘”이라니!
 
케이부디즘도 좋은 것일까? 이런 의문을 해 본다. 외국인들이 보았을 때 케이팝이나 케이푸드에 열광하는 것처럼 케이부디즘에 호감 갖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불교를 알고 있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마음에 다가 오지 않는 것 같다.
 
외국 청년들은 왜 케이부디즘에 매료 되었을까?
 
한국에 가면 한국불교가 있다. 일본에 가면 일본불교가 있다. 중국에 가면 중국불교가 있다. 당연히 미얀마에 가면 미얀마불교가 있고 태국에 가면 태국불교가 있고 스리랑카에 가면 스리랑카불교가 있다. 물론 티벳에 가면 티벳불교가 있다.
 
어떤 불교를 믿을 것인가? 이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사람에게 호불호가 있듯이 각각 불교전통에도 호불호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어쩌면 개인적 취향일지 모른다. 또한 호기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외국인 청년들은 어떻게 케이부디즘에 매료 되었을까?
 
구산스님의 외국인 제자들은 구산스님과의 인연 위주로 말했다. 그 중에 어느 외국인 제자는 자신이 케이부디즘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강력한 수행’을 들었다.
 
외국인 수행자의 눈에 한국불교는 신비하게 보였던 것 같다. 오늘날과 달리 문호가 개방되어 있지 않은 1980년을 전후한 시대에 있어서 한국불교는 신비한 불교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수행전통에 대한 것이다.
 

 
한국불교는 선종계통이다. 구체적으로 임제종 계통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대강백이라 추앙받고 있는 어느 스님은 “우리는 모두 임제스님의 자손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불교에 속해 있으면 자연스럽게 임제종을 따르는 것이 된다. 또한 임제종 선풍을 따르게 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화선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외국인 제자들은 한결같이 “이뭣고”수행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구산스님이 이 화두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수행에 있어서는 다른 교학적 바탕이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뭣고”하며 앉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옛날 40년도 넘은 오랜 옛날에 외국의 젊은 청년들은 이 땅에 왜 왔을까? 아마 진리에 대한 열정 때문에 꼭꼭 잠겨 있는 나라, 함부로 갈 수 없는 나라에 왔을 것이다.
 
이십대 초반 젊은 시절을 송광사에서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왔었을 것이다. 과연 젊은 수행자들은 케이부디즘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었을까?
 
강력한 수행전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외국인 제자들은 사찰투어를 했다. 송광사에서부터 시작하여 통도사, 해인사 등 구산스님과 인연 있는 절을 찾아 다닌 것이다. 남원 실상사에도 가게 되었다.
 
실상사에 도법스님이 있다. 도법스님은 외국인 제자들 중에 낯익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함께 수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간화선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것 같다. 이는 스님의 여러 글에서 확인된다.
 
도법스님은 스승의 중요성을 말했다. 간화선은 스승이 없으면 깨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는 아마 수행점검해 줄 수 있는 스승이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수행점검해 줄 수 없는 한국적 현실에 대하여 우회적으로 비판한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외국인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재가자들이다. 구산스님이 입적한 후에 송광사를 떠났는데 대부분 승복을 벗은 것이다. 그 중에는 로버트 버스웰, 스티븐 배철러도 있다.
 
로버트 버스웰은 불교학자가 되었다. 버스웰 교수가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을 때 원효사상에 대하여 강의를 했는데 이를 BTN 사이트에서 들었다. 영상을 보고 녹취를 해서 여러 편의 글도 썼다. 블로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년전의 일이다.
 
스티븐 배철러는 환속했다. 더구나 송광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여성도반 성일스님과 결혼 했다. 두 부부는 이제 불교를 알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부가 케이부디즘을 알리는 것은 아니다. 테라와다불교를 알리고 있다. 이는 배철러의 저서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구산스님의 외국인 제자들 대부분은 환속했다. 아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제자는 스리랑카사람 혜월스님일 것이다.
 
혜월스님과 인연이 있다. 작년 12월에 스님과 함께 스리랑카 순례를 했기 때문이다. 뉴욕에 사는 김형근 선생과 함께 셋이서 일주일동안 스리랑카 전역을 돌아다녔다.
 
혜월스님은 왜 한국에 왔을까? 영상을 보면, 자신의 스리랑카 도반스님이 한국에 왔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행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한번도 접해 보지 못한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외국인제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수행의 불교라는 것이다. 그것도 강력한 수행의 불교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때 당시 중국이나 일본 보다 더 강력한 수행전통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 제자들이 케이부디즘에 관심 갖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호기심이라고 볼 수 있다. 한번도 겪어 보지 않은 수행전통에 대하 호기심을 말한다. 이는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고 티벳불교전통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외국인 제자들이 한국에 왔었을 때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이다. 그때 당시는 한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더구나 케이부디즘에 대한 정보도 없던 시절이었다. 단지 강력한 수행전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 온 청년들이 많았던 것이다.
 
스티븐 배철러의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을 보면
 
영상에서는 백발이 된 외국인 제자들이 구산스님과의 인연, 그리고 케이부디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 외국인 눈으로 본 케이부디즘을 이해하려면 외국인이 경험한 책을 읽어야 한다. 스티븐 배철러의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이 가장 좋을 듯 하다.
 
스티븐 배철러가 송광스님의 제자가 된 것은 티벳불교에 대하여 염증이 났기 때문이다. 처음 히피시절에 달라이라마가 있는 달람살라로 출가했다. 그런데 책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에서 가르치는 명상 형태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른 곳에서 내 요구에 더 잘 맞을 수행법과 언젠가는 집중 수행을 할 수 있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스티븐 배철러의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 98-99쪽)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스티븐 배철러는 송광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에 대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79년 샤를 즈누가 동아시아 방문에서 돌아와 내게 송광사라고 하는 한국의 선 사원에 대해 말해줬다. 그곳에는 소수의 서양 비구와 비구니 들이 구산 스님이라는 선승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결혼한 성직자들을 수련시키는 학교인 일본의 선 ‘사원’과 달리 한국에서 승려들은 붓다가 부여한 독신의 승가 규칙 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었으며, 이는 티베트와 동남아시아에서 지키는 것과 거의 똑같았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일주일간의 집중적인 선 수련인 셋신(接心 혹은 攝心)에 초점을 두는 반면, 한국에서는 승려들 이 매년 여름과 겨울 각각 3개월씩 앉아서 중단 없이 명상 수행을 했다.”(스티븐 배철러의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 98-99쪽)
 

 
이 문장을 보면 그때 당시 외국인 수행자들의 눈에 비친 케이부디즘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국에는 강력한 수행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테라와다불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신비구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외국 수행자에게 비친 케이부디즘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안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여름과 겨울에 있는 두 번의 안거를 말한다. 이는 일본의 일주일 정도 되는 집중수행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강력한 수행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영상에서 외국인 제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구산스님의 책을 읽고서 발심했다는 것이다. 이는 영어로 옮긴 ‘Nine Mountains(구산)’을 말한다. 대부분 이 책을 읽고서 한국을 찾았다는 것이다.
 
스티븐 배철러는 자신의 책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에서 구산스님과 케이부디즘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책에서는 ‘큰 의심’이라는 제목을 가진 챕터로서 23페이지에 달한다.
 
스티븐 배철러는 송광사에서 출가했다. 머리를 깍고 한국승복을 입고 계를 받은 것이다. 책에 따르면 “나는 회색 승복에, 머리를 깍은 아홉 명의 다른 승려들과 함께 게슴츠레한 눈으로 법당 안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입승 스님이 오전 3시부터 5시까지인 그날의 첫 명상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죽비를 내려치기를 기다린다.”(98쪽)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 외국인 수행자들이 9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티븐 배철러는 케이부디즘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환상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선의 간결하지만 함축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말, 그 실질적인 단순함, 완전한 미학, 그 무자비함의 솔직함에 끌렸다.”(98쪽)라고 했다.
 
스티븐 배철러는 케이부디즘에서 알 수 없는 신비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것 같다. 이런 점에 끌려서 한국에 왔을 것이다.
 
스티븐 배철러는 티벳불교와 비교하여 케이부디즘을 설명했다. 이는 “티베트 불교의 확실함은 내 숨막힐 것 같은 영향을 미쳤고, 반면 한국의 선에서 기리는 불확실함은 불안하기는 해도 내게 생생하게 활기를 불어넣었다.”(104쪽)라고 써 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스티븐 배철러는 티벳불교에 실망해서 케이부디즘을 찾았다. 그렇다고 하여 송광사에서 4년의 세월이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스승에 대한 의심이 엿보이는 대목도 있다. 이는 “놀랍게도 구산스님은 게셰 랍텐과 다를 바가 없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종파의 스승들이었음에도 권위에 있어서는 비슷했다는 것이다.
 
스티븐 배철러는 케이부디즘에 대한 의심도 적어 놓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구산 스님 주장의 논리는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몸을 지배하는 ‘어떤 것’(즉 마음)이 있고, 그것은 개념과 언어의 영역 너머에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어떤 것’은 나의 진정한 원래의 본성, 내가 태어나기 전의 내 얼굴이었고, 그것은 어찌어찌해서 내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것은 붓다가 거부한 인도 전통의 아트만(자아/신)과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슷하게 들렸다.”(스티븐 배철러의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 108쪽)
 
 
케이부디즘에서는 본래면목을 말한다. 자신이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를 진아, 참나, 불성, 한물건 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티벳에서 이미 티벳불교를 체험하고 온 수행자에게는 이해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케이부디즘에서는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이는 자신의 몸을 마음을 지배하는 그 어떤 것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스티븐 배철러에 따르면 티벳불교에서는 부정된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견해에 대하여 “티베트 승들이 공의 중도 교리로 반박하려고 애썼던 것이었다.”(109쪽)라고 표현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여러 전통의 불교가 들어와 있다. 이제 한국불교는 임제선사의 자손들만의 불교가 아니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테라와다불교도 있고 티벳불교도 있다. 그런데 각 전통마다 교리는 다르다는 것이다. 당연히 케이부디즘과도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아트만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외국인 수행자의 눈에 비친 구산스님의 말에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부정했던 아트만 또는 진아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붓다가 거부한 인도 전통의 아트만(자아/신)과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슷하게 들렸다.”라고 써 놓았다. 이런 의문은 초기불교나 테라와다불교를 접한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의문할 것이다.
 
외국인 수행자들은 한국에서 보낸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강력한 수행전통이 살아 있는 케이부디즘에 대하여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스티븐 배철러는 자신의 책에서 “송광사에서 보낸 이 몇 년이 내가 승려로 보낸 시간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112쪽)라고 써 놓았다.
 
영상을 보면 성일스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송광사에서 비구니 계를 받고 살고 있던 외국인 스님을 말한다. 한국어를 잘 해서 외국인 스님들의 통역사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구산스님이 입적했을 때 외국인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성일스님은 스티븐 배철러와 결혼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도 책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혜월 스님 한 분만 한국 승복을 입고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거의 한시간에 달하는 긴 영상이다. 이제 머리가 백발이 된 외국인 제자들은 스승인 구산스님 나이 또래가 되었다. 그리고 40년 만에 다시 모였다. 마치 홈커밍데이를 보는 것 같다.
 

 
외국인 제자들이 스승을 회고하고 추억하는 것은 아름답다. 수행자들은 한때 젊은 시절 낯선 먼 이국 땅에 와서 치열하게 정진했을 것이다. 스승과의 에피소드 하나 정도는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환속했다. 구산스님의 입적으로 인하여 외국인 수행자들도 사라진 것이다. 다만 한 사람, 스리랑카 혜월 스님 한 분만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한국승복이다.
 
작년 12월 혜월스님과 함께 스리랑카 순례 했다. 일주일 동안 순례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평소 가보고 싶은 스리랑카에서 그것도 스님과 함께 순례한 것은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한국의 어느 스님에게 순례를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들어 줄 스님이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재가자가 요청했을 때 흔쾌히 들어 줄 스님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혜월스님은 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뉴욕에 사는 김형근 선생이 있다. 작년에 혜월스님과 함께 셋이서 일주일동안 스리랑카 순례를 했다. 이는 김형근 선생이 혜월스님에게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혜월스님은 일년에 한두 차례 스리랑카에 들어가는데 그 일정에 맞추어 순례를 함께 해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혜월스님이 순례에 동행한 것은 자비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바쁜 세상에서 누가 일주일 동안 동행하며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자비의 마음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본다. 그 결과 행운을 잡았다.
 
혜월스님은 영상에서 구산스님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스님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엘에이(LA) 근교 사찰에서 석양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옛날을 회상했다. 스님은 “이곳에서 살았던 삶이 떠오르면서 구산스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라고 말했다.
 
구산스님의 외국인 제자 중의 한사람인 스리랑카 사람 혜월스님과 순례를 했다. 일주일 내내 행복했다. 혜월스님이 먼 산을 바라 보면서 구산스님과의 대화 했던 것을 떠 올렸듯이, 나도 승용차 한대로 스리랑카 순례 일주일 한 것을 떠 올려 본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뉴욕의 김형근 선생에 감사 드린다. 무엇보다 자비의 마음을 내어 주신 혜월스님에게 감사 드린다.
 
스리랑카 순례하면서 혜월스님과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해 놓았다가 글로 작성했다. 올해 십개월 동안 작성한 스리랑카성지순례기는 거의 6백페이지에 달한다.
 
혜월스님은 스리랑카에서 스리랑카 승복을 입었다. 그런데 스님은 한국에서는 한국 승복을 입었다는 것이다. 영상에서 본 한국 승복은 잘 어울린다.
 

 
혜월스님은 영상에서 영어로 이야기 했다. 스님은 한국어가 매우 유창해서 한국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 그럼에도 영어로 한 것은 아마 외국인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케이(K) 부디즘은 어디로
 
케이부디즘은 여전히 외국인 수행자들에게 매력 있는 것 같다. 이는 세종시에 있는 ‘무상사’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인 대봉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을 말한다.
 
무상사는 관음선종의 총본산과 같다. 숭산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매년 안거 때가 되면 전세계에서 수행자들이 오기 때문이다. 이는 무상사에 다니는 법우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 법우는 현재 관음선종의 본향인 프로비던스에서 공양주보살을 하면서 수행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불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아직 세계화 되지 않았다. 이는 미국에서 교세가 매우 약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국불교를 세계화 할 수 있을까?
 
전자제품 개발자 출신이다. 직장 다닐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어떤 상품이든지 미국에서 경쟁력을 갖추어야 세계적인 상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이는 미국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었을 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경쟁력 있는 종교가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다. 과연 케이부디즘은 미국에서 경쟁력 있는 불교라고 볼 수 있을까?


1980년대 초반 한때 외국 젊은이들이 한국에 수행하러 왔다. 그러나 구산스님이 입적하고 난 다음부터는 맥이 끊어졌다. 숭산스님의 제자들이 케이부디즘의 맥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세계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는 미국에서 경쟁력 있는 불교가 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날 케이팝은 세계적이다. 미국에서 경쟁력 있다. 케이푸드 역시 미국에서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전분야에 있어서 케이자가 붙으면 경쟁력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코리안부디즘, 즉 케이부디즘도 경쟁력을 갖추어 가지 않을까?
 
앞으로 케이(K) 부디즘은 어디로 갈 것인가? 미국에서 케이부디즘이 경쟁력을 갖추면 세계적인 불교전통이 될 수 있다. 한국불교 스님들과 승가에 노력에 달려 있다. 한국불교의 숙제라 아니할 수 없다.
 
 
2023-12-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