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신을 속이지 않는 부끄러움 없는 한해가 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1. 10:17

자신을 속이지 않는 부끄러움 없는 한해가 되고자

 

 

해가 떴다. 올 한해가 시작되는 태양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오늘부터 새출발이다.

 

오늘 아침 해돋이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스마트폰 첫화면 날씨정보를 보니 일출시간은 747분이다. 장소는 망해암 옆산으로 정했다. 차가 그곳까지 올라간다. 군부대 철조망 바로 옆에 너른 바위가 있다. 그곳에서 보면 안양 평촌 방향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대림대학을 지나 만장사 근처에 이르렀을 때 차가 줄을 이었다. 경찰들은 차를 회차시켰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간다. 아마 해를 보러 하는 인파일 것이다.

 

망해암은 낙조로 유명하다. 안양 9경 중의 하나이다. 예전에는 안양 8경이라 했는데 세월이 지나서일까 하나 늘었다. 망해암에서 서쪽을 보면 은빛 서해바다에 해가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해마다 끝자락이 되면 사람들은 망해암 절벽 위에 선다. 절벽 위에 너럭바위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한해 마지막 날 지는 해를 보면 한해를 보내는 것이다.

 

지는 해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치 여행자가 돌아갈 집이 있기에 마음 놓고 여행하는 것과 같다. 해를 놓아 주지만 다시 떠오를 것을 알기에 안심하고 보내 준다.

 

망해암 옆산에서 일출 보는 것은 실패했다. 차를 백권당으로 돌렸다. 사무실이 있는 빌딩의 꼭대기층에서 일출을 보기 위한 것이다.

 

오늘은 11일 공휴일이라 사람들은 없다. 해를 보기 위하여 빌딩에 오는 사람은 없다. 나홀로 일출을 보는 것이다.

 

737분 오피스텔 18층 꼭대기층에 섰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동남쪽 하늘은 새벽노을로 벌겋게 달구어져 있다. 사진으로만 본다면 일몰인지 일출인지 알 수 없다.

 

 

안양에서 일출 시간은 747분이다. 해가 뜨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백권당으로 후퇴했다. 준비해온 아침을 먹었다. 계란 두 개에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 한쪽이다. 원두커피를 만들어서 마셨다.

 

다시 18층으로 올라 갔다. 해 뜨는 시각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해는 뜨지 않았다. 모락산이 가려서일 것이다. 다시 백권당으로 후퇴했다.

 

 

꼭대기층과 백권당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때 마다 사진 촬영을 했다. 동쪽 평촌 너머 모락산에 붉은 기운이 있는데 그곳이 포인트이다. 거의 십분 간격으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네 번째로 18층에 갔다. 해가 떠 있었다. 한발 늦었다. 해가 고개를 내미는 장면을 고대했었다. 그러나 해는 약간 떠 있었다. 마치 아기가 탯줄을 막 끊은 것처럼 해가 둥실 떠 올랐다.

 

 

올해 처음 보는 태양이다. 나는 오늘부터 얼마나 많은 태양을 보아야 할까? 일년이 365일이므로 365번 태양을 보아야 한다.

 

올 한해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질까?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일어날까? 얼마나 많은 기쁨과 슬픔이 있을까?

 

해는 찬란하게 떠올랐다. 아침 햇살에 도시가 환해졌다. 도시의 불빛은 강렬한 태양의 불빛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불빛이다.

 

태양은 생명 있는 존재에게는 어버이와 같다. 대지에 뿌리 박고 사는 존재는 태양은 절대적 지존(至尊)이다.

 

핸해가 시작되면 다짐을 한다. 자신의 잘못된 점, 문제점을 고쳐 보고자 한다. 담배를 끊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술을 멀리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양 앞에서 맹세를 한다. 설령 그것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일지라도 그 순간의 마음만큼은 청정한 것이다.

 

자신의 약점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남들에게 말 못할 것, 숨기고 싶은 것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한해가 시작 되는 날,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마음속으로 다짐할 것이다.

 

부끄러움 없는 한해가 되고자 한다. 작년 한해를 돌아 보면 부끄러웠던 때가 있다. 그것은 번뇌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번뇌에 가려서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이다. 누구에게 말 못할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부끄러움을 안다. 축생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창피함도 모른다.

 

부끄러움은 내적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창피함은 외적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부끄러운 행위를 했을 때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창피한 행위를 했을 때 타인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축생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고세상은 염소돼지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It.36)

 

 

 

이띠붓따까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이를 밝은 원리의 경(Sukkadhammasutta)’이라고 한다.

 

경에 따르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동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자행할 것이다. 마치 를 보는 것과 같다.

 

개는 천한 이미지이다. 아무리 혈통이 좋은 개라고 해도 개는 개인 것이다. 이는 개의 본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는 먹는 것과 번식하는 것이 주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발정기가 되면 아무하고나 짝짓기를 한다. 설령 그것이 개의 부모이나가 개의 자식이거나 관계가 없다. 사람도 개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에 대한 예로서 “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It.36)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과도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It.36)라고 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없다면 세상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약한 것은 먹히고 강한 것은 잡아 먹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짐승의 세계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어떻게 될까? 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될 것이다. 오로지 힘 센 자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오늘날 권력을 잡은 자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과 같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약육강식의 짐승 같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디가니까야 26번 경에 따르면, 탐욕과 분노가 늘어날수록 수명이 짧아진다고 했다.

 

인간의 수명이 열 살로 짧아지는 시기가 있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짧아졌을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수명이 열 살이 될 때는 칠일 간의 무기의 중겁이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짐승의 지각을 얻게 되어, 날카로운 무기들이 그들의 손마다 생겨날 것이다. 그들은 날카로운 무기로 이 놈은 짐승이다. 이 놈은 짐승이다.”라고 하면서 서로 목숨을 빼앗는다.”(D26.29)라고 했다.

 

현시대는 야만의 시대인 것 같다.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를 보는 것 같다. 힘 있는 자들은 권력을 탈취하여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억압한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가둔다. 마치 검투사처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사회는 갈수록 보수화 되고 있다. 또한 한국사회는 갈수록 극우로 치닫고 있다. 노인의 인구가 많아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다 보니 긴장과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양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다. 칼만 들지 않았을 뿐 매일 치열한 전쟁을 치루고 있다. 유튜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유튜버들은 편을 나누어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른다. 이는 인간의 수명이 열 살이 된 때와 같다. 그래서 그 뭇삶들은 서로 날카로운 공격, 날카로운 분노, 날카로운 마음의 원한 날카로운 살의를 들어낼 것이다. ,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이 어머니에게, 남형제가 여형제에게, 여행제가 남형제에게, 날카로운 공격, 날카로운 분노, 날카로운 마음의 원한 날카로운 살의를 들어낼 것이다.”(D26.29)라고 했다.

 

이념투쟁에 몰두하다 보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 마치 인간수명이 열 살이 되는 말세의 시기를 보는 것 같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시대와 다름 아닌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가 되었다.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아무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탐욕과 분노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용모는 점점 험악해지고 수명은 점점 짧아진다. 마치 개나 승냥이처럼 사는 시대가 된 것 같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인간만이 알 수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기 때문에 자제할 수 있다. 이때 부끄러움은 내적동기에 대한 것이고, 창피함은 외적동기에 따른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을 동기로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세상을 동기로 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하고 창피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내적으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였어도 자신의 양심만큼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부끄러워하는가? 이는 믿음으로 출가하거나 많이 배우거나 고행을 감수하거나 하는 등의 동기로 보아 나와 같은 자에게 이러한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Dhs.31; Pug.24)라고 성찰하는 것이다. 성찰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안은 자이다.

 

올 한해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되고자 한다. 이는 자신을 속이지 말자는 말과 같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다짐을 해야 하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나는 물러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고 혼미하지 않고 몸을 평안히 하고 격정이 없고 마음을 집중하여 통일하겠다.”(A3.40)라고 아는 것이다.

 

마침내 오늘 올 한해를 알리는 해가 떴다. 저 평촌신도시 너머 남동쪽 모락산에서 아침 해가 떴다. 언제나 매일 보는 해이지만 오늘 보는 해는 색다르다. 그것은 한해를 다짐하는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올 한해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예년과 다르지 않은 일상이 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 세상 사람들을 다 속여도 자기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 자신의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가 문득문득 떠 오를 때 그것은 마치 석양에 산그늘 지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아닌 원초적 불안이다.

 

임종에 이른 자는 자신의 행위가 주마등처럼 떠오를 것이다. 숨기고 싶었던 것도 마치 산그늘 진 것처럼 근심이 되어서 떠오를 것이다. 자신을 속인 부끄러운 행위가 떠올랐을 때 정말 부끄러워할 것 같다. 올 한해는 부끄러움 없는 한해가 되고자 한다.

 

 

악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

세상에 비밀은 없다.

사람이여,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대 자신이 안다네.

 

그것이 훌륭한 증인이니

이것을 간과하고 마음에 악을 숨기네.

어리석은 자가 행하는 악은

신들이 알고 여래가 안다네.

 

그래서 자신을 동기로 하는 님은

새김을 행하고

세상을 동기로 하는 님은

슬기롭게 선정에 들고

가르침을 동기로 하는 님은

여법하게 실천하네.

진리에 의지하여 노력하는 성자는

퇴락하지 않네.

 

악마를 진압한 님, 죽음을 정복한 님,

태어남을 부순 님, 정근을 갖춘 님,

세상을 아는 님, 현명한 님은

모든 현상에 매이지 않는다네.”(A3.40)

 

 

2024-01-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