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끊어짐을 볼 수 있어야 열반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8. 09:03

끊어짐을 볼 수 있어야 열반에

 

 

이불에서 나오기 싫다. 따뜻한 이불속에 그대로 있고 싶다. 차가운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죽기보다 더 싫은 것 같다. 이런 때 오늘 새벽에 읽었던 경전 문구가 떠오른다.

 

머리맡에 쌍윳따니까야가 있다. 틈만 나면 수시로 열어 본다. 오늘 새벽에 본 것은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버리면 유익하고 안락할 것이다.”(S35.138)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 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진리로 알고 있다.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진리의 말씀은 늘 새기고 있어야 한다.

 

이불에서 나오기 싫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안락한 촉각은 무상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경전적 지식에 따른 것이다. 경전에서 읽은 것이 마침 생각난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자 자리를 과감하게 박찼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가 지은 것이다. 논서에 따르면 매순간 싸띠하라고 했다.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이다. 좋고 싫음에 머문다면 수행자가 아닌 것이다.

 

스마트폰 첫 화면을 보았다. 영하 9도로 찍혀 있다. 영하 10도에 가까이 되면 입는 옷이 따로 있다. 마치 굴러다니는 이불 같은 옷이다. 아들 옷이다. 아들 옷이 무척 많은데 입지 않아서 내가 입고 있다. 아까워서 입는 것이다. 처도 입으라고 한다.

 

 

날씨에 따라 입는 옷이 다르다. 날씨가 영도 전후에서는 좀더 얇은 외투를 입는다. 모든 외투에는 모자가 달려 있다. 1.3키로 20여분 걸어 가려면 모자가 달린 외투는 필수이다.

 

외투를 입고 일단 밖에 나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따뜻한 이불 속은 오래 전의 기억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때 매순간 싸띠하려 한다. 의도적으로라도 새기고자 한다. 한발한발 걸을 때 마다 찰나생찰나멸을 보고자 한다.

 

경전과 논서를 읽으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접한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사람들은 오래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 듣는 등의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것도 그렇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항상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순간 변한다. 보는 눈도 변하고 보는 대상도 변한다. 무상한 것이다.

 

무상은 거듭관찰해야 한다. 하나의 덩어리로 보면 영원주의적 견해가 생겨난다. 이는 다름아닌 즐거운 느낌에 대한 집착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이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고 새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의 생멸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존재상속에 지속되고 있는 형색물질을 거듭거듭 볼 때, 그 이전에 보았던 여러 형색과 나중에 보았던 여러 형색을 하나이다라고만 여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555)라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끊임 없이 생겨나고 있는 정신-물질의 흐름을 상속덩어리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바위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이 있는 자는 제대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는가? 오온에서 정신과 물질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새기면 그 물질과 정신들이 앞뒤로 서로 이어지지 않고 계속 끊어져서만 생겨나고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이다라고 여기는 상속덩어리가 사라져 버린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556)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끊어짐을 관찰하는 수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끊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끊어져 있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해탈과 열반은 다른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해탈을 말하지만 열반은 좀처럼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사마타 수행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에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다.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은 있지만 열반은 없는 것이다.

 

끊어짐을 볼 수 있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대상을 무상, , 무아로 거듭 관찰했을 때 어느 순간 정신과 물질이 툭 끊어져 버리는데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수행은 끊어짐을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하여 생멸을 보아야 한다. 그것도 찰나멸을 보아야 한다. 객관적으로 제3자적 위치에서 지켜 보는 것이다.

 

 

2024-01-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