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공부

하루 일과를 보석경 (寶石經) 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2. 11:58

하루 일과를 보석경 (寶石經) 으로
 
 
새해에서 하루가 지났다. 새해 두 번째 날을 맞이 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간다. 연말 끝자락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다. 월초인가 싶으면 월말이다. 연초인가 싶으면 연말이다. 소년인가 싶었는데 노년이 되었다. 이제 공식적인 노년을 일년 남겨 두고 있다.
 

 
세월은 유수같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세월 이야기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형님도 세월 이야기를 했다. 세월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고 말했다.
 
세월은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변한 것이다. 매일매일 사건을 경험하다 보니 세월이 흘러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죽은 자에게는 세월은 흘러가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등 떼밀리 듯이 오게 되었다. 언제까지 떼밀려 갈 것인가?
 
불교를 만남으로 인하여
 
요즘 유튜브에서 강아지 영상을 본다. 강아지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 같다.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다. 이럴 때 “어쩌다가 개로 태어났을까?”라며 측은한 마음이 든다.
 
불쌍한 것은 개만 아닐 것이다. 사람도 불쌍한 존재이다. 어쩌다가 생겨나온 것에 대한 측은함을 말한다. 그러나 개로 태어난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다.
 
인간도 인간의 등급이 있다. 그것은 정신적인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 범부와 깨달은 자는 인식의 지평이 다르다.
 
생을 살면서 불교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태어나 보니 불교라는 종교가 있었던 것이다! 불교를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불교를 종교로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았을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삶이다. 동물 같은 삶이다.
 
불교를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이 달라졌다. 사십 대 때 불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망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올해 목표는 빠알리어를 능숙하게
 
매일 담마와 함께 보내고 있다. 글쓰기 하는 것도 담마에 대한 것이고, 명상을 하는 것도 담마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경전과 논서를 읽는 것도 담마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빠알리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올해 목표가 있다. 그것은 빠알리어를 능숙하게 익히는 것이다. 먼저 문법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빠알리로 된 원문과 주석을 읽는 것이다.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작년 12월 20일 처음으로 빠알리문법 강좌를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 시절인연이 되어서 듣게 되었다.
 
빠알리 문법수업을 앞두고 예습한다. 예습을 해 놓아야 따라 갈 수 있다. 단지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실패할 것이다.
 
현재 빠알리 교재에서 15과까지 예습했다. 총 32과이니 거의 반 예습한 것이다. 이렇게 예습한 것에 대하여 카톡방에 알렸다. 이에 백도수 선생은 “예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면 경전 이해에 큰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열공함에 감사드립니다.”라며 ‘빠알리클라스(2024년 기초반 겨울강좌)’ 카톡방에 글을 남겼다. 현재 카톡방에는 33명이 있다.
 
이미우이 음악과 함께
 
빠알리어를 접하면 가슴이 뛴다. 왜 그럴까? 아마 그것은 하나의 음악때문인지 모른다. 이미우이의 라따나숫따(ratana sutta: 보석경)와 자야망갈라가타(jayamagala gāthā: 승리와 행운의 노래) 음악의 영향이 크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본다. 사십대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절망의 시기였다. 그때 이미우이 음악은 큰 힘이 되었다. 세계적인 불교음악가, 중국계 말레이시아 불자가수 이미우이가 창송한 보석경과 승리와 행운의 노래를 들으면 세상의 시름과 근심과 걱정이 잊혀졌다.
 
나의 사십대 후반 이미우이 음악을 발견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미우이 음악을 들었을 때 마음이 안정되었다. 잔잔한 기쁨과 함께 환희가 올라 왔다. 세상의 시름, 근심, 걱정을 잊어 버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미우이 음악을 발견한 것은 2007년의 일이다. 그때 한창 글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을 때이다. 2006년부터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매일 쓰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사십 대 절망의 시기에 이미우이 음악은 위로가 되었다.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마치 천상에 있는 것 같았다. 빠알리어로 창송되는 이미우이 음악은 천상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하루 일과를 보석경 (寶石經) 으로
 
이미우이 음악에 푹 빠졌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이미우이 음악을 모조리 다운 받았다. 2007년 당시에는 중국 사이트에 이미우이 원본 파일이 올려져 있었다.
 
이미우이 음악은 수십곡 된다. 이 중에서 가장 아끼는 음악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라따나숫따(보석경 또는 보배경)와 자야망갈라가타(길상승리게, 승리와 행운의 노래)이다.
 
하루 일과를 보석경으로 시작했다. 아침에 일터로 갈 때 보석경을 들었다. 두 번 반복되는 보석경 음악은 27분짜리이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승리와 행운의 노래를 들었다. 이 노래는 두 번 반복해서 23분짜리이다.
 
내가 좋으면 남도 좋은 것일까? 혼자 듣기가 아까웠다. 이미우이 노래를 인터넷으로 알렸다. 블로그에 올려 놓은 것이다. 블로그에 ‘불교명상음악’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이미우이 음악을 소개 했다.
 
블로그에 불교명상음악에 대한 글은 311개에 달한다. 인터넷에 다운 받은 불교음악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방식이다. 2007년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를 책으로도 만들었다.
 
불교명상음악과 관련된 책은 네 권 만들었다. 이는 50, 54, 55, 56번 책을 말한다. 블로그에 모두 올려져 있다. 책만들기 카테고리에 pdf파일이 올려져 있어서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다.
 
치유효과 있는 이미우이 음악
 
이미우이 음악은 치유효과 있다.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 더구나 잔잔한 기쁨과 함께 환희가 올라 온다. 마음이 우울할 때 들으면 즉시 기분전환이 된다.
 
이미우이음악을 씨디로 만들어서 선물했다. 2008년 이후 지금까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페이스북 친구들에게도 선물했다.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현 하는 사람들에게 택배로 보내 준 것이다.
 
이미우이음악은 명상으로도 사용되고 치료용으로도 사용된다. 언젠가 임사체험 강사에게 씨디를 주었다. 강사는 말기암 환자들에게 씨디를 들려 주었다. 환자들은 씨디를 갖기 원했다. 들어 보니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아마 잔잔한 기쁨과 함께 환희도 올라 왔을 것이다.
 
내가 좋으면 남도 좋은 것 같다. 씨디를 주고 나서 들은 소감을 물어 보면 한결같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런 것도 법보시에 해당될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이미우이음악을 들었다. 라따나숫따를 27분 듣고 자야망갈라가타를 23분 들었다. 음악을 들을 때는 크게 해 놓고 들어야 한다.
 
백권당 사무실 가득히 음악이 퍼졌다. 마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천상의 음악이 있다면 이런 음악일 것이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2007년 이후 17년 동안 매일 듣지만 늘 새롭다.
 
보석경 1번 게송을 보면
 
오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따나숫따와 자야망갈라가타에 대하여 하루 한 게송씩 소개 하는 것이다.
 
라따나숫따와 자야망갈라가타는 이미 빠알리어로 외운 바 있다. 라따나숫따는 2011년에 외웠다. 이후 자야망갈라가타도 외웠다. 음악도 아름답지만 뜻을 알고 들으면 더욱더 신심이 난다. 먼저 라따나숫따를 소개하고자 한다.
 
라따나숫따는 가장 고층경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수타니파타에도 실려 있다. 작은 법문의 품에 있는 첫 번째 경(Sn2.1)이다.
 
라따나숫따는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하여 라따나라고 했다. 여기서 라따나는 보석 또는 보배를 뜻한다. 그래서 라따나숫따에 대하여 보배경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보석경(寶石經)이라고 칭한다.
 
보석경은 모두 1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번 게송)
 
Yānīdha bhūtāni samāgatāni             
야니-다 부-따-니 사마-가따-니
Bhumm
āni vā yāni va antalikkhe,        
붐마-니 와- 야-니 와 안딸릭케
Sabbeva bh
ūtā sumanā bhavantu          
삽베와 부-따- 수마나- 바완뚜
Athopi sakkacca su
antu bhāsita.     
아토삐 삭깟짜 수난뚜 바-시땅
 
여기 모여든 모든 존재들은
지상에 있는 것이건 공중에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존재들은 기뻐할지니
마음을 가다듬고 이제 말씀을 경청할지니라.”(Stn.222)
 
 
보석경은 악귀를 쫓아내기 위한 게송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보석경은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호경이기도 하다.
 
한사람만 있어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법문하는 이유는?
 
경에서 부따니(bhūtāni)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부따는 일반적으로 비인간을 말한다. 이는 신들, 야차, 나찰. 다나바, 건달바, 긴나라, 마호라가와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
 
부처님은 ‘여기 있는 모든 존재들은 들으라’라고 했다. 베쌀리에 있는 인간만이 법문을 듣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천신과 같은 비인간도 법문을 듣는 것이다.
 
부처님이 법문 할 때는 보이지 않는 존재도 듣는다. 이는 법화경에서 영산회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장 고층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수타니파타에서 영산회상의 원형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새벽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읽다가 감동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그것은 천신도 부처님 법문을 듣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런데 그때 수천의 하늘사람들이 이와 같이 ‘오늘 세존께서는 존자 라훌라에게 번뇌의 소멸에 관한 최후의 가르침을 베푼다.’라며 세존을 따라갔다.”(S35.121)라는 구절을 말한다.
 
어떤 재가법사가 있다. 그 법사는 사람 모인 숫자에 민감하다. 법회에서 사람이 많지 않으면 법문을 할 맛이 나지 않는 것 같다. 한두 번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빤냐와로 스님에게 들은 말이 있다. 밴드에 공유해 놓은 영상을 본 것이다. 스님은 후배 스님에게 “법문을 하면 천상의 존재들도 듣습니다.”라고 말했다.
 
빤냐와로 스님은 한국에서 출가했지만 태국에서 다시 출가했다. 태국에서 삼장법사의 지위도 부여 받았다. 그런데 스님에 따르면 태국에서는 스님이 법문할 때 한 사람만 앉아 있어도 최선을 다해 법문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보이지 않는 존재도 법문을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법문할 때 한사람만 앉아 있어도 법문하겠다고 했다. 이는 어느 교수출신 법사가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으면 맥 빠진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법문은 한사람만 앉아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사람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도 듣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라훌라에 법문했다. 오로지 라훌라 한사람에게 법문한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수천의 하늘사람들이 “오늘 세존께서는 존자 라훌라에게 번뇌의 소멸에 관한 최후의 가르침을 베푼다.”(S35.121)라며 부처님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보석경 1번 게송 문법적 풀이
 
부처님은 베쌀리에서 베쌀리 사람들에게 법문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 즉 부따(bhūtā)도 있었던 것이다. 경에서는 부따니 bhūtāni 라고 했는데 이는 부따의 복수형이다. 복수에는 ‘장모음+ni’가 붙는 것이다.
 
야니다(yānīdha)는 ‘여기’로 번역된다. 이는 ‘yā+nīdha’의 형태이다. 여기서 ‘yā’는 ‘which; what; whatever’의 뜻으로 지시대명사이다. 그리고 ‘nīdha’는 ‘nu idha’의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nu’는 ‘an affirmative indefinite particle’이라 하여 ‘긍정어적부정허사(肯定的不定虚词)’라고 한다. 그리고 ‘idha’는 ‘here’의 뜻으로 ‘여기’가 된다. 따라서 야니다(yānīdha)는 ‘여기’라고 번역된다.
 
첫 구절에서 ‘samāgatāni’는 ‘모든 존재들’이라고 번역된다. 여기서 ‘samāgata’는 ‘samāgacchati’의 과거분사형이다. 뜻은 ‘met together; assembled’이다, 복수형은 ‘장모음+ni’가 되기 때문에 ‘samāgatāni’가 된다. 그래서 ‘samāgatāni’는 ‘모인 존재들’이라는 뜻이 된다.
 
두 번째 구절에서 ‘bhummāni’가 있다. 이 말은 부미(bhūmi에서 온 것이다. 부미는 ‘ground; earth’의 뜻이다. 따라서 부마니(bhummāni)는 ‘땅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 ‘vā’는 ‘or; either’의 뜻이다. 빠알리어 ‘yāni va’에서 ‘yāni’는 ‘who,what,which’의 뜻으로 인칭대명사 또는 지시대명사이다. 그래서 yāni va’는 ‘누구이건’이라고 번역된다.
 
빠알리어‘antalikkhe’는 어떤 뜻일까? 이 말은  ‘antalikkha + e’로 되어 있다. 여기서 antalikkha는 중성명사로 ‘the sky’의 뜻이다. 하늘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복수가 될 때는 ‘–e’를 붙여 준다. 그래서 ‘antalikkhe’는 ‘공중에 있는 존재들’이라고 번역된다.
 
세 번째 구절에서 ‘sumanā bhavantu’가 있다. 여기서 sumana’ 는 형용사(adj.)로서 ‘glad’의 뜻이다. 그렇다면 ‘bhavantu’는 어떤 뜻인가?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希望他是’라고 설명되어 있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 보면 ‘그들이 그러기를 바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수마나 바완뚜 (sumanā bhavantu)’는 ‘그들이 기뻐하기를 바란다’라는 뜻이 된다.
 
빠알리 문법교재 16과에 따르면 –tu 는 명령형이다. 이는 명령, 축복, 기도나 바람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그래서 바완뚜는 ‘그렇게 되기를!’라는 뜻이 된다.
 
네 번째 구절에 ‘athopi’가 있다. 이 말은 ‘atho+pi’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atho’는 ‘then; and also’의 뜻이다. 빠알리어 ‘pi’는 부사로서 ‘또한, 역시’로 번역된다. 따라서 ‘athopi’는 ‘그런데 또한’이라고 번역된다.
 
빠알리어 ‘sakkacca’는 절대분사(abs.)로서 ‘having well prepared, honoured, or respected’의 뜻이다. 그래서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이라는 뜻이 된다.  
 
빠알리어 ‘suantu’은 어떤 뜻일까? 빠일리어 ‘suantu’는 ‘suāti’가 동사원형이다. 이는 ‘hears’의 뜻이다. 복수형은 ‘suanti’가 된다. 이는 ‘그들이 듣는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명령형 ‘–tu’가 붙어서 ‘그대들은 들으시오’가 된다.
 
빠알리어 ‘bhāsita은 ‘bhāsita + a의 형태이다. 여기서 ‘bhāsita’는 ‘bhāsati’ 의 과거분사(pp.)로서 ‘said; spoken’의 뜻이다.  그렇다면 ‘bhāsita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빠알리어 ‘bhāsita’에서 ‘이 붙었다. 빠알리 문법교재를 찾아 보니 목적격 단수에 ‘ṃ’이 붙는다. 설명문을 보니 목적격 단수는 “기본형에 -를 더한다. 복수는 –a를 –e로 고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bhāsita은 ‘내가 말하는 것을’이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suantu bhāsita은 “내가 말한 것을 그대들은 잘 들으시오.”가 된다.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음악
 
빠알리어 문법공부를 하면서 보석경 1번 게송을 번역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인 2011년 처음 이 게송을 빠알리어로 외울 때는 문법적 지식 없이 외웠다. 속된 말로 “무대뽀”로 외운 것이다.
 
이미우이 음악을 들었을 때 음악이 너무 좋았다. 천상의 음악을 듣는 것 같다. 듣다 보면 시름,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던 것이다!
 
이미우이 음악과 함께 살았다. 어려울 때 힘이 되었다. 빠알리어로 창송되는 음악을 듣다 보면 부처님 당시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인도나 미얀마, 스리랑카를 가보고 싶었다.
 
꿈은 이루어졌다. 인도와 미얀마, 스리랑카를 가 본 것이다. 특히 스리랑카가 좋았다. 왜 그런가? 부처님 당시의 불교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빠알리어 전통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사십 대 때 방황과 좌절의 나날에 이미우이 음악이 큰 힘이 되었다. 보석경과 자야망갈라가타를 듣다 보면 시름을 잊어 버렸다. 그리고 잔잔한 기쁨과 함께 환희가 올라왔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음악도 내용을 알고 들으면 더 좋다. 그래서 빠알리어로 되어 있는 경과 게송을 외웠다. 문법도 모르고 외운 것이다. 단어 뜻만 알고 외웠다.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이제는 문법공부를 하고 있다. 오늘 처음으로 보석경 1번 게송에 대하여 그 동안 예습한 문법적 지식을 동원하여 풀이해 보았다. 앞으로 계속 진행될 것이다.
 
빠알리어를 접하면 가슴이 뛴다
 
나에게는 믿는 것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경전을 읽고서 믿음을 내고 있다. 그런데 음악으로도 신심을 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미우이음악을 듣고 신심을 내고 있다. 이제 한번도 신심을 내고자 한다. 빠알리 게송을 문법적으로 분석하여 뜻을 파악하는 것으로 신심을 내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 못지 않게 기쁜 마음이다.
 
오늘 오전 내내 자판을 쳤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치유될 것 같다.
 
빠알리어를 접하면 가슴이 뛴다. 이는 이미우이 음악의 영향이 크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최후의 죽음의 침상에서도 보석경과 자야망갈라가타를 듣는 것이다. 천상의 음악을 들으면 천상에 태어나지 않을까?
 
 
2024-01-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