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공부

초월의 길은 어떻게 가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9. 10:15

초월의 길은 어떻게 가는가?
 
 
여덟 번째 빠알리 수업을 받았다. 총 열두 번 강좌에서 네 번 남았다. 이번에 빠알리 문법기초 수업에 임하면서 죽기살기로 공부하기로 했다. 이번에 끝내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이는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결정이 왜 중요할까? 십바라밀에서 ‘결정바라밀’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라밀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바라밀은 세 가지 단계로 나누는데 마지막 세 번째 단계가 자신의 생명을 던질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타카에 세 가지 종류의 초월의 길(pāramī)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보살이 성취해야 하는, 깨달음을 완전히 성숙시켜 부처님이 되는 원리는 이러한 것들뿐이므로, 열 가지 초월의 길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없다. 이러한 열 가지 초월의 길은 상방의 허공에도 없고, 아래의 땅 위에 도 없고, 동방을 비롯한 사방에도 없고, 오로지 나의 심장 안에 있다.’이렇게 그는 그것이 마음 안에 있는 존재를 보고, 그 모든 것을 확고하게 결정하고 거듭 성찰하면서 순역으로 관찰했다. 그는 끝에서 잡아서 처음에 이르게 하고 처음에 잡아서 끝에 세우고, 중간에서 잡아서 양쪽으로 끝내고, 양쪽 끝에서 잡아서 중간에서 끝냈다. 외적 소유를 버리는 것이 일반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고, 사지를 버리는 것이 우월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승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다. 그는 열 가지 일반적 초월의 길, 열 가지 우월적 초월의 길, 열 가지 최승적 초월의 길에 대하여. 떨어지는 기름을 함께 붓듯, 크나 큰 메루산을 교반봉으로 삼아 우주계의 대해를 휘젓듯, 관찰하였다.”(자타카 1권 25p, 자타카, 1권 먼 인인이야기, 세 종류의 초월의 길)
 
 

 
흔히 바라밀이라 불리우는 초월의 길에는 세 종류가 있다. 그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pāramī), 우월적 초월의 길(upapāramī), 승의적 초월의 길(paramatthapāramī)을 말한다. 이 중에서 승의적 초월의 길이 가장 수승하다. 왜 그런가? 목숨 걸고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의적 초월의 길에 대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승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다.” (Jat.1.25)라고 했다.
 
초월의 길에는 세 종류가 있다. 세 종류의 초월의 길에는 각각 열 종류의 초월이 있다. 어떤 것인가? 자타카 각주를 보면 짜리야삐따까에 있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1)보시(dān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
 
2)계행(sīl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해치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계행이고, 손이나 발 등의 신체를 해치지 않는 것은 우월한 계행이고,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계행이다.
 
3)출리(nekkhamm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자르고 출가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고, 손이나 발등과 같은 신체에 대한 집착을 자르고 출가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다.
 
4)지혜(paññ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해야 할 일과 유익한 일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지혜이고,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해야 할 일과 유익한 일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지혜이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해야 할 일과 유익한 일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지혜이다.
 
5)정진(viriya): 모든 일반적 초월의 길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정진이고, 모든 우월적 초월의 길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정진이고, 모든 승의적 초월의 길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정진이다.
 
6)인내(kham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인내 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인내이고, 손이나 발등과 같은 신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인내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인내이고,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인내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인내이다.
 
7)진실(sacc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 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고,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의 기관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고, 목숨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다.
 
8)결정 (adhiṭṭhān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결정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고,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의 기관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결정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고, 목숨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않는 결정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다.
 
9)자애(mett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 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 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고,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의 기관의 파괴가 도래 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우월 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고, 목숨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다.
 
10)평정(upekkha):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을 돕건 해치건 상관 없이 존재와 의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 평정이고,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의 기관을 돕건 해치건 상관 없이 존재와 의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우월적 평정이고, 목숨을 돕건 해치건 상관없이 존재와 의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평정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바라밀은 한국빠알리성접협회 각주에 따르면 담마팔라 장로의 견해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십바라밀을 보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아내와 아이와 자신의 목숨이다. 부처가 되기 위한 초월의 길을 가는 자는 아내와 아이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바라밀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보시바라밀이 있다. 승의적 초월의 길에 대한 것을 보면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라고 했다. 자타카를 보면 보살은 목숨을 보시했다. 토끼의 본생 이야기(saja jātaka, Jat.316)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보살은 흔쾌히 “바라문이여, 음식을 구하기 위해 내게 온 것은 잘한 일입니다. 오늘 내가 예전에 보시한 적이 없는 것을 보시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계행을 지키는 자로서, 살생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가서 갖가지 장작을 모아서 숯불을 만들고 나서 나에게 알려주십시오 내가 자신을 [희생하여, 숯불 가운데로 뛰어들겠습니다. 나의 몸이 익으면, 그대기 그 살코기를 먹고 수행자의 삶을 사십시오.”라고 말했다.”(Jat.316, 토끼의 본생 이야기)
 
 

 
사자자타까(Jat.316)에 따르면, 보살이 토끼로 살 때 현자 토끼였다. 그래서 현자 토끼는 늘 “보시를 해야 하고, 계행을 지켜야 하오.”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마침내 그 때가 왔다. 제석천이 바라문의 행색으로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다.
 
바라문은 음식이 필요했다. 보살은 바라문에게 기꺼이 음식이 되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스스로 먹이가 되어 주기 위해서 불구덩이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토끼는 터럭 하나 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제석천은 보살에게 “현자인 토끼여, 나는 바라문이 아닙니다. 그대를 시험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보살은 “제석천이여, 그대는 그만 두십시오. 온 세상의 세상사람들이 나를 보시로 시험하려고 하더라도, 내가 보시를 꺼리는 것을 알아챌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며 사자후를 토했다. 승의적 초월의 길은 이렇게 가는 것이다.
 

 
 
출리바라밀은 어떤 것일까? 이는 승의적 초월의 길을 보면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출가라는 것은 가장 소중한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출가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출가로 인하여 이전의 나는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출가하는 것에 대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모와 형제, 자식, 아내와도 인연을 끊는 것은 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죽고 새로운 세상을 태어나는 것을 출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출리바라밀에 대하여 최상의 승의적 초월의 길이라고 했을 것이다.
 
진실바라밀은 어떤 것일까? 이는 승의적 초월의 길을 보면 “목숨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종교에서는 최선을 추구한다. 진리 역시 최선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서는 차선은 장려된다. 정치적 행위가 대표적이다. 여와 야는 양보와 타협을 통해서 차선책을 내놓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차선이 있을 수 없다. 진리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결정바라밀이 있다. 승의적 초월의 길을 보면 “목숨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않는 결정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번 하기로 결정했으면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수메다 존자의 서원에서도 확인 된다.
 
 
그는 진흙 위에 엎드려서 다시 두 눈을 꼼짝 않고 디빵까라 부처님의 불광(佛光)을 보면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일체의 번뇌를 불사르고 참모임의 신참자로서 람마 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겉모습을 통해, 내가 번뇌를 불 사르고 열반을 성취할 필요는 없다. 디빵까라 부처님처럼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의 배를 띄워 많은 사람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한 뒤, 나중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야겠다. 이것이 나에게 알맞은 것이다. 그래서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추고서 부처님이 되리라고 결심하고 엎드렸다.”(자타카 1권 14p, 쑤메다의 서원)
 
 
수메다 존자는 부처가 출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메다는 먼 훗날 부처가 되기로 서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마을에 디빵까라 부처님이 오셨을 때 진흙 바닥에 배를 깔았다. 부처님이 자신의 등을 밟고 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수메다 존자는 부처가 되기로 서원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십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십바라밀을 닦은 공덕의 힘으로 부처가 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생에서 열반을 체험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내가 번뇌를 불 사르고 열반을 성취할 필요는 없다.”라고 한 것이다.
 
 범부로서 오를 수 있는 최상의 지혜에 해당되는 상카루뻭카냐나, 즉 형성평온의 지혜이다. 이는 위빠사나 16단계 중에서 11단계 지혜를 말한다. 수메다 존자는 정법이 살아 있을 때 완전한 열반에 들기를 포기하고 보살의 길을 가기로 했다, 이른바 서른 가지 초월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추고서 부처님이 되리라고 결심하고 엎드렸다.”라고 하여 결심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결정바라밀아닐까?
 
빠알리 기초문법공부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 여덟 차례의 줌수업을 통해서 어느 정도 구조는 파악했다. 이는 백도수 선생이 잘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줌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전에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 것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공부는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반복학습이 중요하다. 언어는 이해차원이 아니라 외워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백도수 선생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전에 배웠던 것을 빠른 속도로 반복한다. 그리고 명사의 격변화와 동사의 활용변화에 대해서는 외우라고 말한다.
 

 
빠알리어는 익숙하다. 빠알리 경을 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전을 읽을 때 빠알리어를 접한다. 그러나 지난 십년 이상 문법을 모르고 빠알리어를 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단한 결심을 했다. 이번만큼은 빠알리어 문법을 마스터 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런 것도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결정바라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십바바리밀에서 모든 초월의 길은 궁극적으로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빠알리어 공부 역시 죽기살기로 해야 한다.
 
 
2024-02-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