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공부

결정적인 순간에는 스승의 도움이 필요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15. 10:18

결정적인 순간에는 스승의 도움이 필요해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한번 말한 것으로 족했다. 그것은 “과거분사도 격변화합니다.”라는 말이었다.
 
빠알리어에서 현재분사만 격변화하는 것으로 알았다. 이는 빠알리 기초문법교재 ‘빠알리 프라이머’에서 과거분사에 대하여 격변화한다는 설명문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아홉 번째 빠알리수업에서 백도수 선생은 분명히 과거분사도 격변화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빠알리교재를 한번 다 보았다. 총 32과를 다 본 것이다. 이는 미리 예습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예습을 해놓아야 수업시간에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과거분사에서 막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격변화하는 것 같았다. 이는 관련된 격에 따라 동조되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심증은 있지만 확인 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물음표시와 첵크표시를 수없이 해놓았다.
 
빠알리기초문법강좌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총 열두 강좌에서 아홉 번 소화했으니 이제 세 번 남았다. 그런데 어제 과거분사의 격변화에 대한 것을 배우고 나자 거의 다 배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는 어느 정도일까? 백도수 선생에 따르면 “과거분사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과거분사의 격변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더 어려운 것은 특별한 형태의 과거분사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규칙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 ‘쟁기질하다’의  ‘kasati’에 대한 과거분사는 ‘kaṭṭha’가 된다. 이는 어미가 ‘-ta’로 끝나는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런 불규칙한 과거분사는 외워야 한다.
 
빠알리어에서 현재분사와 과거분사는 격변화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명사가 8격변화하듯이 격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주격, 목적격, 도구격, 탈격, 여격, 처소격에 따라 과거분사도 격변화하는 것이다.
 
주격 격변화가 있다. 이는 “Upāsakehi vihāra paviṭṭho Buddho diṭṭho hoti”라는 문장으로 설명된다. 이 문장은 “절에 들어간 부처님은 우바새들에 의해서 보여졌다.”라고 해석된다.
 
이 문장에서 주격은 ‘Buddho’이다. 이는 주격단수이다. 깨달은 자를 뜻하는 buddha의 어미에 ‘o’가 붙으면 단수가 되고 ‘ā가 붙으면 복수가 된다. 그래서 ‘Buddho’ 는 주격단수가 되어서“부처님은”이라고 번역한다.
 
문장을 보면 주격을 수식하는 과거분사가 있다. 이는 ‘paviṭṭho’라는 과거분사이다. 이 과거분사는 ‘paviṭṭha’에서 주격으로 전환된 것이다. 주격을 수식하고 있기 때문에 어미에 ‘o’가 붙는다. 그래서 ‘paviṭṭho Buddho’의 형태로 되는데 이는 “들어간 부처님은”이라고 번역된다.
 
과거분사가 목적격으로 사용되는 예는 어떤 것일까? 이는 “Te Buddhena desita dhamma suisu”라는 문장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과거분사 ‘desitaṃ’은 목적어 ‘dhammaṃ’을 수식한다. 그래서 목적격 단수에 해당되는 ‘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desita dhammaṃ’ 된다. 이 말은 “그들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법을 들었다.”라고 번역된다.
 
빠알리문법을 예습했다. 처음 접하는 생소한 문법이지만 교재에서 설명된 대로 따라가고자 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쳤다. 억지로 진도를 나가서 끝까지 보기는 했지만 물음표를 수없이 달아 놓았다. 그런데 선생으로부터 들어 보니 단번에 해결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의 도움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 짧은 한마디 말에 마치 얼키고 설킨 실타래가 풀어진 듯 하다.
 

 
빠알리 수업을 듣다 보면 교재에 없는 내용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과거분사의 격변화에 대한 것이 그런 것 같다. 백도수 선생은 과거분사의 격변화를 설명하면서 “과거분사의 격변화는 수동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백도수 선생에 따르면 경전에서는 수동태 문장이 많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실중심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에 대한 결과를 말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했다.
 
한역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한다. 빠알리 경전에서는 “에왕 메 수탕(Eva me suta)”이다. 이 말은 전해들은 것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이 말은 내가 말한 것이 아니다. 주체적인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들려졌다”라는 수동태로 표현된다. 이는 객관적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경전에서 과거분사형이 사용된다고 했다.
 
어제 빠알리수업에서 과거분사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중요한 말을 들었다. 과거분사는 도구격과 함께 쓰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도구격+p.p’로 설명했다. 이런 말은 교재에는 실려 있지 않다. 빠알리 수업을 통해서 선생에게 들은 말이다. 이 말 한마디로 인하여 단어가 과거분사인지 아닌지 파악된다.
 
교재에서 과거분사 격변화에 대한 것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거의 예외 없이 ‘도구격+p.p’로 되어 있다. 이는 “Te Buddhena desita dhamma suisu”라는 문장에서 ‘Buddhena’라는 말은 도구격이다. 그리고 desita은 목적격인 dhamma에 대하여 목적격으로 격변화한 것이다. 문장에서 도구격+p.p’가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빠알리 수업을 들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결정적이다. 예를 들어 현재분사인지 알려면 단어 속에 ‘-ant’가 들어 있는지 보라고 했다. 예를 들어서 요리하다는 pacanti에 대한 현재분사형은 ‘pacanto(주격)’, ‘pacantam(목적격)’, ‘pacantena(도구격)’로 격변화한다. 공통적으로 어간 ‘paca’에 ‘-ant’가 추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ant’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서 현재분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과거분사의 경우 어간에 i가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어간에 i가 붙으면 과거형을 낯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목적격 과거분사 ‘desita을 보면 어간 ‘des’에 ‘i’가 들어가 있어서 이 단어가 과거형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빠알리 수업은 1시간 반 동안 진행된다. 총 12주 수업이니 3개월 코스이다. 그런데 수업시간이 1시간 반이다 보니 대학에서 수업한다면 한학기 수업이 될 것이다.
 
줌으로 진행되는 빠알리 수업은 고도로 압축된 것이다. 줌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밀도가 있다. 한마디 한마디 따라가기 바쁘다. 예습이 되어 있지만 헤매기 쉽다. 그런데 한시간 반은 매우 길다는 것이다. 그래서 50분 수업을 하고 10분 쉬는 시간을 갖는다. 이어서 30분 수업을 하고 마무리한다.
 
빠알리 수업에 누가 참여하는지 모두 파악되지 않는다. 카톡방에는 33명 있지만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17명 가량 된다. 대부분 얼굴을 숨기고 참여한다. 얼굴을 드러내고 참여하는 사람은 4-5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 나이가 여든인 분은 매우 열심이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배우는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가 많다고 하여 배움을 멈춘다면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배워야 한다.
 
배우는 사람을 학인(sekha)이라고 한다. 경전에서 학인의 정의는 아라한을 제외한 성자들을 말한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은 배우는 자들이다. 그래서 학인이라고 한다. 하물며 일반 범부들은 어떠할까?
 
나이가 들었다고 하여 배우지 않는다면 자만이 된다. 더구나 조금 안다고 하여 요즘 말로 꼰대짓을 한다면 자만플러스가 될 것이다. 청정한 삶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배움을 멈출 수 없다.
 
빠알리 수업 중에 휴식시간이 있다. 십분 휴식시간에 백도수 선생은 어느 분에게 “왜 빠알리 수업을 듣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나이가 칠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은 “이제까지 번역본을 보았는데 이번에 배워서 직접 보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나이 들어서도 학생 때처럼 배우는 사람이다. 빠알리수업도 그런 것 같다.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다. 대부분 육십이 넘은 것 같다.
 
배움에는 스승을 필요로 한다. 독학으로 학습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에도 해법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결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어제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두 번째 읽고 있다. 매우 인상적인 내용을 발견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것이다.
 
경전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스승에게 크게 의지한다. 스승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그래서 빠른 성과를 내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찬먜 사야도의 수행침서 ‘위빳사나 수행 28일’(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보면,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경전적 지식이 없는 십대 후반의 젊은 여성에게서 위빠사나 지혜가 빠르게 생겨난다고 했다.
 
경전적 지식이 많은 사람은 스승이 없어도 혼자서도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경계에 부딪쳤을 때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두 갈래의 길을 예로 들었다.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경전적 지식이 많은 사람은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모른다. 경전적 지식이 많기 때문에 두 갈래 길이 나올 때마다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심만 하다 시간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뒤에서 따라오는 짐승에게 잡아 먹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경전적 지식만 있고 스승이 없는 자가 두 갈래 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 쪽 길로 갈 것인지 저 쪽 길로 갈 것인지 따지고 의심하고 따지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이다. 이는 번뇌에 해당된다. 번뇌라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힘을 말한다.
 
길을 갈 때는 스승이 있어야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하나의 경을 예로 들었다. 그것은 맛지마니꺄야 23번경 ‘개미언덕의 경’이 바로 그것이다.
 
맛지마니꺄야 23번경 ‘개미언덕의 경’은 두 갈래 길에서 해법을 제시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두 갈래 길에서는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다.
 
 
세존이시여, 어떤 하늘사람이 한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널리 안다와나를 비추며 제가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다가와서 한 쪽으로 물러섰습니다. 한 쪽으로 물러서서 그 하늘사람은 제게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수행승이여, 여기 있는 개미언덕은 밤에는 연기를 내뿜고 낮에는 불타오릅니다.’ 바라문이 말했습니다. ‘현자여,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칼을 들어 파내자 빗장이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빗장입니다.’ 바라문이 계속 말했습니다. ‘현자여, 빗장을 제거하십시오.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다시 칼을 들고 파내자 두꺼비가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두꺼비가 있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두꺼비를 제거하십시오.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다시 칼을 들고 파내자 두 갈래 갈퀴가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두 갈래 갈퀴가 있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두 갈래 갈퀴를 제거하십시오.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다시 칼을 들고 파내자 하나의 가로막는 체가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가로막는 체가 있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가로막는 체를 제거하십시오.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다시 칼을 들고 파내자 거북이가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거북이가 있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거북이를 제거하십시오.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다시 칼을 들고 파내자 칼과 도마가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칼과 도마가 있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칼과 도마를 제거하십시오.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다시 칼을 들고 파내자 고깃덩어리가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고깃덩어리가 있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고깃덩어리를 제거하십시오. 칼을 들어 파내십시오.’ 현자가 다시 칼을 들고 파내자 용이 나타났습니다. ‘존자여, 용이 있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용은 그냥 두십시오. 용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용에게 귀의합시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은 문제를 세존께 가서 질문해 보십시다. 세존께서 해명하는 대로 받아 새기겠습니다. 수행승이여, 저는 신들의 세계에서, 악마들의 세계에서,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서,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서 여래와 여래의 제자들이나 그에게 들은 자들을 빼놓고는, 달리 그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는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하늘사람은 이와 같이 말하고는 그 곳에서 사라졌습니다.”(M23)
 
 
부처님의 제자 꾸마라 깟싸빠가 하늘사람에게 들은 것을 부처님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두 갈래 길에서 스승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래서 스승이 가라는 방향대로 가면 되는 것이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고민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이번 빠알리 수업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 있다. 제아무리 독학을 열심히 했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망설인다. 그러다 시간만 지나 갈 것이다. 때로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다. 이럴 때 스승이 있어서 길을 알려 준다면 휠씬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2024-02-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