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작은법회

불교입문 이십 주년 모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6. 22:19

불교입문 이십 주년 모임
 
 
인생에 있어서 변곡점이 있다. 그것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다. 2004년 불교에 입문했다.
 
불교에 늦게 입문했다. 사십대 중반에 들어간 것이다. 이전에는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잘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 가장 크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대부분 시간 지나면 해결된다. 감기에 걸렸을 때 일주일 내지 이주일 지나면 낫는다. 그러나 생, 노, 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와 같은 근본문제는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불교는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이다. 도저히 풀릴 것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법을 제시한다. 불교공부를 하면 분명히 해법이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오늘 점심 때 동기모임이 있었다. 능인선원 불교교양대학 37기 모임이다. 해담채 강남점에서 모임을 가졌다.
 

 

 
올해로 불교에 입문한지 만20년 되었다. 2004년 3월에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했으니 딱 20년 된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이십년 지났으니 강산이 두 번 바뀐 것이다. 오늘 해담채 점심모임은 일종의 불교입문 이십주년 기념 같은 것이다.
 
오랜 만에 법우들을 봤다. 코로나 이후 작년에 한 번 모이고 이번이 두 번째 모임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년에도 너댓차례 모였으나 코로나 이후 뜸하게 모인다.
 
한가지 불가사의한 것이 있다. 법우들은 늙지 않는 것 같다. 곱게 꽃단장하고 나와서 그런 것일까? 아마도 자주 보기 때문일 것이다.
 
동기들 얼굴은 익숙하다. 늙어 보이지 않는 것은 얼굴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마치 가족이나 친지들 얼굴을 보는 것과 똑같다. 모두 건강한 모습이다.
 
지난 과거를 돌아 본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는 모임이라는 것이 없었다. 직장과 집을 왕래 했을 뿐이다. 밤낮 없이, 주말 없이, 휴가 없이 일만 했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사십대가 되었을 때 허전함을 느꼈다. 오로지 일만하며 살아 가는 것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것은 종교였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 불교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불교에 입문한 것은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건대 나의 인생은 불교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불교교양대학에 입문한 것은 최초의 모임을 갖는 것과 같다. 이전에는 모임이라는 것이 없었다. 단체 가입 같은 것도 없었다. 오로지 직장과 집을 왕래하며 무미건조하게 살았다.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새로운 세상이 전개 되었다. 그것은 사람들과 만남에 대한 것이다. 불교교양대학으로 인연 맺어진 사람들과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모임 중에 최상의 모임은 무엇일까? 여러 모임이 있지만 아마도 종교모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등산모임, 축구모임, 독서모임 등 갖가지 모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종교모임이 가장 수승하다.
 
흔히 끼리끼리 논다고 말한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4)라고 했다.
 
여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좋아 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어울릴 것이다. 세계가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배움이 없는 자는 배움이 없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게으른 자는 게으른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7)라고 했을 것이다.
 
사십대 중반에 불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렸기 때문이다. 또한 배움이 있는 자들과 어울렸고 부지런한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렸다.
 
인생에 있어서 사십대는 변곡점과 같다. 인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생기는 때이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해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십대 때 교양대학에 입문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십대가 되면 자녀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이다. 자녀가 수능을 앞두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교교양대학에는 사십대 여성이 많았다. 상당수는 자녀의 수능을 위해서 들어 온 것 같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입문한 것이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다. 불교교양대학에 들어 온 사람들 역시 갖가지 사연이 있었다. 어떤 이는 아이엠에프(IMF)로 인하여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위해 입문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해서 역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위해서 입문했다고 한다.
 
2004년 당시 불교교양대학에 입문한 사람들은 많았다. 수계법회 할 때 거의 사백명 가까이 되었던 것 같다. 첫해 동기모임을 가졌을 때 백명 가까이 참석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줄어 들었다. 이십년이 지난 현재는 삼십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해담채 강남점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21명이다. 이 정도 인원이면 꽤 많이 모인 것이다. 바쁜 와중에도 일부로 발걸음 한 것이다. 대부분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2004년 당시 사십대였던 사람들은 이제 육십대가 되었다. 오십대였던 사람들은 이제 칠십대가 되었다. 육칠십대가 대부분이다.
 
어느 모임이든지 위계가 있기 마련이다. 먼저 들어 온 사람이 고참이다. 그러나 동기모임에서는 고참이 없다. 모두 동등한 위치에 있다. 한마디로 우정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같은 클라스의 우정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동기법회가 열리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순례법회 역시 빠지지 않았다. 송년회, 연등축제 등 각종 모임에도 빠짐 없이 참여했다.
 
불교와의 인연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불교를 접했을 뿐만 아니라 글도 썼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2006년 이후 거의 매일 썼다. 그러다 보니 글이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지난 18년동안 쓴 글은 7,400개 가량 된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이다. 작성된 글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123권 만들었다.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묶은 것이다. 글을 30-50개 가량 묶으면 300페이지가량의 책이 된다.
 
오늘 해담채 삼성점 모임에서 법우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었다. 능인선원 37기에 대한 책이다. 입학에서부터 시작하여 법회, 순례, 연등축제 등 갖가지 행사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는데 이를 한데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작년 7월에 북콘서트를 했다. 능인선원 37기 동기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때 책을 한권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받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오늘 해담채 모임에서 여덟 권을 추가로 제작하여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책은 모임의 산역사와도 같다. 나이가 칠십팔 세가 되는 법우님은 책을 무척 반겼다. 자신의 가족에게도 보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을 받아 본 다른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능인선원 37기 모임은 영상으로도 기록을 남겼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사진을 모아서 음악영상을 만든 것이다. 이를 유튜브에 올려 놓았다. 음악이 다른 두 종류의 영상이 있다.
 
첫 번째 영상은 14분짜리로 6년전인 2017년에 올려 놓은 것이다. 유튜브 제목은 ‘능인선원 금강회 37기(2004-2017)( https://youtu.be/ZP5l1MmpQXM?si=U1K72vqc77V-lmT-
)이다. 중국불자가수 제예가 부른 경쾌한 리듬의 산스크리트어‘대길상천녀주’를 배경음악으로 했다.
 
두 번째 영상은 21분짜리로 2021년에 올려 놓은 것이다. 유튜브 제목은 ‘동기들이여 영원하라! 능인선원 금강회 37기 (2004)( https://youtu.be/rTJw7-YZSjw?si=wqsJM1TlYAfhmHjh)이다. 배경음악은 보디찟따그룹의 띠사라나(三歸依偈)로서 빠알리어로 된 흥겨운 음악이다.
 
영상은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사진모음에 대한 것이다. 이를 업데이트 하려 했으나 과거에 모아 놓은 사진은 모두 사라졌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먹어 자료가 소실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남은 것은 기록밖에 없다. 행사 때마다 참여해서 기록을 남겨 놓으니 책이 되었다. 사진을 모아서 배경음악을 깔아 영상을 만드니 또한 기록이 되었다.
 
기록은 영원하지 않다. 특히 개별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기록물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온라인에 올려 놓은 기록물은 살아 있다!
 
유튜브에 올려 놓은 영상을 다시 보았다. 사진은 이십년 전 것도 있다. 그때 사진을 보니 머리가 흑발이다. 지금 거의 백발이 된 것과 대조적이다.
 
사진에는 사십대 때 얼굴 모습이 보인다. 함께 사진을 찍은 법우들 모습도 젊다. 보인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은 가만 있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는 게송이 있다. 젊은이는 중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젊은이와 중년은 노년에 도달한 자를 버린다.
 
세월이 이십년 흘렀다. 그때 중년의 사람은 노년이 되었다. 마침내 노년도 버려지게 될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중년과 노년 모두를 버리게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십년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불교에 입문했다. 나는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았는가? 단지 방향만 파악했을 뿐이다. 부처님은 “죽음의 자양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찾으리.”(S1.4)라고 했다.
 
 
2024-04-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