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근불가원

어떻게 해야 정치중도를 실현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11. 10:36

어떻게 해야 정치중도를 실현할 수 있을까?

 
평온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일터에는 이미우이의 라따나경음악이 울려 퍼진다. 언제나 들어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그리고 잔잔한 기쁨과 환희가 일어난다.
 


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 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한 것이다. 이런 것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오만하고 불통이고 무능하고 무도한 정권에 대하여 심판한 것이다.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은 밤에 바뀌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잠 자는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무력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었다. 이는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날이 밝자 숙부와 숙모는 오늘은 상점을 열 수 있을 것 같다며 집으로 떠났다. 우리도 다들 밖이 조용해진 걸 전쟁이 진정된 것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붙들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헐레벌떡 되돌아온 숙부는 몹시 얼뜬 목소리로 밤사이에 세상이 바뀐 걸 알려 주었다. 엄마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어쩔꼬, 이를 어쩔꼬” 헛소리처럼 탄식하는 엄마의 손을 잡으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248쪽)
 
 
밤 사이에 인민군이 들어 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날이 새고 나서 밖에 나가 보니 인민군이 있었던 것이다. 하루 밤만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다. 엎치락뒤치락한 것이다. 마치 오늘날 선거를 해서 여와 야가 바뀌는 것과 같다.
 
이번에는 국군과 미군이 들어 왔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가장 바람직한 건 우리가 자는 사이에 소리 없이 전선이 우리 위를 지나가서 밤사이에 바뀐 세상을 맞을 수 있는 거였다.”(92쪽)라고 했다. 또한 “전선이 밤사이에 슬쩍 우리 머리 위를 통과할 수도 있지만 밀고 당기고 들락날락하는 한가운데 끼지 말란 법도 없었다.”(98쪽)라고 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주인도 밤에 바뀌었다. 요즘은 선거로 바뀐다.
 
어제 총선 결과도 새벽에 알게 되었다. 출구조사에서는 200석을 넘을 기세였지만 180석도 턱걸이가 되었다. 하루 밤 자고 났더니 변화가 생긴 것이다.
 
밤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 선거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옛날에는 전쟁을 해서 세상이 바뀌었다. 그러나 요즘은 투표로 세상이 바뀐다.
 
세상이 바뀌어도 민중들은 삶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하루 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는 나라의 주인이 바뀐 것과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금징수원만 바뀐 것이다.
 
중국 역사를 보면 변화무쌍하다. 중원에서는 수시로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 어느 해에는 오랑캐가 들어 왔다. 그러나 민중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누가 나라의 주인이 되든지 상관 없는 것이다. 세금을 가장 적게 가져 간다면 좋게 보았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투표라는 정치적 행위를 하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직화 되어야 한다. 정당이 출현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어도 세상이 잘 바뀐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시장에 가면 상인들은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고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부자들은 여전히 부유하게 산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변화를 갈망한다. 반면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은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정치적 성향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이유에 해당된다.
 
세상의 주인이 바뀌어도 나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투표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영웅이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존심으로 살기도 한다. 리더의 덕목도 이에 해당된다.
 
여기 리더가 있다. 리더가 자신보다 더 낮게 보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조폭과 같은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굴욕감’을 느낄 것이다.
 
여기 나보다 못한 형편 없는 자가 있다. 그 사람이 내 위에 있어서 군림하려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자괴감과 함께 분노를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재작년 3월 세상이 바뀌었다. 하루 밤 사이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치 조폭이 지배하는 세상 같았다. 마음속으로 굴욕을 심하게 느꼈다.
 
그날 이후 일체 뉴스를 보지 않았다. 식당도 골라 다녔다. 뉴스가 있는 식당에 가지 않은 것이다. 이런 세월을 거의 일년 반 이상 보냈다.
 
작년 12월에 변화가 생겼다. 그 동안 일체 보지 않던 유튜브를 보게 된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현 집권세력의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한번 하기가 어렵다. 한번 하고 나면 자주 하게 된다. 한번 정치관련 유튜브를 보다 보니 이것 저것 보게 되었다. 심지어 반대진영 유튜브도 보게 되었다.
 
정치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가까이하지도 않고 너무 멀리 하지도 않는 것이다. 너무 가까이 하면 타버리고 너무 멀리 하면 방관자가 된다.
 
그 동안 유튜브를 너무 가까이 했다. 그 결과 매일 매시간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이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정치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각자 해야 할 일이 있다. 정치에 지나치게 관심 보이면 흥분하게 된다. 이는 말려 들어감을 말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다. 투표라는 최소한의 정치행위는 해야 한다.
 
이제 정치관련 유튜브를 끊으려고 한다. ‘관심없음’으로 하면 보이지 않는다. 정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튜브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행과 관련된 유튜브를 보고자 한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정치에 지나치게 빠지면 삶의 리듬이 깨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고 배제하게 된다. 점차 폭력적으로 된다.
 
폭력에는 신체적 폭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폭력도 있다. 입에 칼을 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더욱더 근본적인 폭력은 정신적 폭력이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말한다.
 
전쟁을 하면 승자와 패자가 있다. 선거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있다. 선거에서 승자는 환호한다. 패자는 말이 없다. 다음 번 선거에서는 복수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네.”(S3.14)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승리와 패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준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Vin.I.345)
 
 
이 말은 율장대품 꼬삼비의 다발 디가부이야기에 실려 있다. 왕에게 복수하려는 아들에 대하여 아버지가 만류하는 것이다.
 
디가부는 아버지의 원수인 왕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라며 말렸다. 이는 극단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래서“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원한이 그친다.”라는 뜻이다.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복수하려 할 것이다. 이는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원한의 복수는 또 다른 원한만을 낳을 뿐이다.
 
디가부는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왕의 측근이 되어서 왕을 살해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서 칼을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폐하,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라고 한 것은 ‘폐하께서 나의 부모를 죽였다.’라고 제가 폐하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폐하를 위하는 사람들이 저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고, 저를 위하는 사람들이 다시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원한은 원한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폐하는 저의 목숨을 살려 주었고, 저는 폐하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원한은 원한의 여읨에 의해 쉬어졌습니다. 폐하, 이것을 두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라고 한 것입니다.” (Vin.I.348)
 
 
원한은 원한을 내려 놓음으로서 원한이 해소된다. 이는 무한반복적인 복수를 막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출세간적이다. 원수에 대하여 복수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Dhp.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마치 더러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씻어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책상에 침이 묻었다. 침을 침으로 닦아 낼 수 있을까? 바닥에 가래가 묻었다. 가래를 가래로 닦아 낼 수 있을까?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난다. 똥이 더럽다고 하여 똥으로 똥을 닦을 수 있을까?
 
침이나 가래, 똥은 더러운 것이다. 더러운 것을 더러운 것으로 닦아 낼 수 없다. 더러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씻어 내려 한다면 더욱더 악취만 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욕하는 자에게 앙갚음하여 욕을 하거나 때리는 자에게 앙갚음하여 때리는 방식으로는 원한이 그치지 않는다.”(DhpA.I.50)라고 했다.
 
카톡방에는 증오가 난무한다. 상대진영을 멸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보인다. 같은 진영에서도 사상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 반목하기도 한다. 마치 욕하는 자에게 앙갚음하여 욕을 하는 것과 같고, 때리는 자에게 앙갚음하여 때리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이런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세간의 가르침이다. 이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가르침임을 말한다. 그래서 원한 맺힌 자에게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고,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 그친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라고 했다. 그것도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진리라는 것이다.
 
오물은 오물로 깨끗해지지 않는다. 오물은 물로 씻어 내야 한다. 그 물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이는 “새김의 확립을 통해서 원한을 소멸시키고 그치게 할 수 있다.”(DhpA.I.51)라는 주석의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대승불교권에서는 마음 ‘심(心)’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좀더 구체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새김, 즉 사띠(sati)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새김을 유지해야 한다. 새김을 잊어 버리면 무심코 하게 된다. 무심코 하늘을 바라 본다든가, 무심코 예쁜 꽃을 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잃어 버리는 것이 된다. 악마의 영역에 있음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새김을 유지해야 한다. 원한 맺힌 자에 대해서도 새김을 유지해야 한다. 새김을 유지하면 원한이 원한인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원한은 앞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원한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부처님, 연기법을 깨달은 님, 거룩한 님이 걸었던 길이다.”(DhpA.I.51)라고 했다.
 
이제 선거가 끝났다. 지난 오개월동안 유튜브를 지나치게 보았다. 심지어 반대진영의 유튜브도 즐겨보았다. 이제 투표라는 정치적 행위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정치유튜브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하지 않을 뿐이다.
 
정치는 삶의 일부와도 같다. 투표를 하는 것은 정치적인 행위에 해당된다.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방관자가 된다. 그런데 부처님도 정치적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두다바와 관련된 이야기(Vidudabhavatthu)’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싸까야족을 멸망시키려는 비두다바 군을 막으려고 했다. 이는 “부처님께서는 싸끼야족을 보호하기 위해 까삘라밧투 근처 비두다바의 진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늘이 없는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았다.”(DhpA.I.337-361)라는 이야기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비두다바 군을 세 번 막았다. 그러나 네 번째는 막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세 차례의 왕의 침공을 막았으나 네 번째에는 싸끼야 족의 업보인 것을 알고 막지 않았다.”(DhpA.I.337-36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지금 당장 받을 수 있고 이 생에서 받을 수 있고 내생에서 받을 수 있고 먼 후생에서 받을 수 있다. 싸끼야 족이 멸망한 것은 업보에 따른 것이다. 업보는 부처님도 막을 수 없다.
 
정치는 가까이 하면 타버린다. 멀리하면 방관자가 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불가근불가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쩌면 정치중도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선거는 끝났다. 이제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긴다. 또한 정치 고관여층에게 맡긴다. 다음 번 투표 때까지 불가근불가원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정치중도를 실현하는 길이라 본다.
 
 
2024-04-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