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방향을 찾았으니 주욱 그 길로
빠알리경전반 수업이 시작된지 한달이 되었다. 빠알리기초반이 끝나고 6주차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빠알리경전반 수업을 잘 들을 수 있을까? 예습과 복습을 하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추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아침 백권당으로 향해 걷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빠알리문법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새기고 싶은 문구를 글로 쓰는 것이다.
빠알리문법을 알고자 했다. 빠알리경전을 읽다 보니 빠알리원문이 궁금했다. 부처님당시에 부처님이 사용하던 언어이었기 때문에 빠알리어를 접하면 좀더 부처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빠알리 문법을 모르면 항상 그자리 머물 것 같았다.
빠알리기초반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교재 빠알리프라이머에 대하여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다. 교재가 너덜너널해질 때까지 봤다. 그러나 경전반은 달랐다.
빠알리경전반의 특징은 문구에 대하여 문법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대부분 생소한 단어이다. 그러나 과거 빠알리 게송을 외운 경험이 있어서 어렴풋이 구조는 파악된다.
경전반이라 하여 문법적 구조만을 파악하려 한다면 길을 잃고 헤매기 쉽다. 이럴 때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문법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내용을 보자는 것이다.
어제 4월 16일 화요일 빠알리경전반 강의가 줌으로 진행되었다. 경전반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맛지마니까야 140번경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 된 것 같다.
빠알리경전반은 도중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 없다. 기초반이 끝나고 새로운 경전반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존 반에 흡수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실력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마치 월반한 기분이었다.
공부 잘하는 사람 특징이 있다. 예습과 복습을 잘 하는 것이다. 어제 수업은 예습 없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방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그저 선생의 강의를 듣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수업은 오후 8시부터 9시 반까지 1시간 30분 진행된다. 강의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저 백도수 선생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 밖에 달리 할 것이 없다. 그런데 듣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줌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다. 맛지마니까야 140번경에서 열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열반에 대하여 성스런 진리라고 했다.
성스러운 진리는 사성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40번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성스런 진리라고 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백도수 선생도 이런 말을 이곳에서 접한다고 했다. 관련 문구는 다음과 같다.
tassa sā vimutti sacce ṭhitā akuppā hoti. tañhi, bhikkhu, musā yaṃ mosadhammaṃ, taṃ saccaṃ yaṃ amosadhammaṃ nibbānaṃ. tasmā evaṃ samannāgato bhikkhu iminā paramena saccādhiṭṭhānena samannāgato hoti. etañhi, bhikkhu, paramaṃ ariyasaccaṃ yadidaṃ — amosadhammaṃ nibbānaṃ.
“그의 해탈은 진리에 입각해 있어 흔들림이 없다. 수행승이여, 허망한 법은 거짓이고 허망하지 않은 법인 열반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을 갖춘 수행승은 이 최상의 진실의 기초를 갖춘 것이다. 수행승이여, 이것이 최상의 고귀한 진실 즉, 허망하지 않은 법인 열반이기 때문이다.”(M140)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이다. 여기서 “이것이 최상의 고귀한 진실 (paramaṃ ariyasaccaṃ yadidaṃ)”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허망하지 않은 법인 열반(amosadhammaṃ nibbānaṃ)”이라고 했다.
열반이 왜 최상의 진리이고 열반이 왜 최상의 진실일까? 그것은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로 설명되어 있다.
번뇌는 탐, 진, 치에 대한 것이다. 탐, 진, 치가 모든 번뇌의 뿌리이기 때문에 탐, 진, 치만 제거 되면 번뇌의 뿌리가 뽑히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한다.”(M140)라는 정형구가 사용된다. 여기서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든다’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어 ‘tālāvatthukata’에 대한 백도수 선생의 설명이 있었다. 백도수 선생에 따르면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스리랑카 스님에게 어떤 뜻인지 문의해 보았다고 한다.
야자수는 일반 나무와 다른 특징이 있다고 한다. 줄기를 자르면 죽는다는 것이다. 줄기를 자르면 차츰 아래로 죽어가기 때문에 뿌리까지 죽는 것임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tālāvatthukata’라는 말을 번뇌의 소멸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라고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야자수 줄기처럼 만들고”라고 번역했다.
여기 잡초가 있다. 잡초는 아무리 뽑아도 다시 난다. 머리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머리를 삭발해도 머리가 다시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털에 대하여 ‘무명초’라고 했을 것이다.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번뇌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탐욕의 뿌리, 성냄의 뿌리, 어리석음의 뿌리를 뽑는 것이다. 그런데 번뇌의 뿌리를 뽑는데 있어서 종려나무 구루터기처럼 만들면 된다고 했다. 나무 줄기를 잘라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뿌리를 뽑지 않아도 말라 죽게 된다.
부처님은 최상의 진리에 대하여 열반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성제가 최상의 성스러운 진리로 알려졌으나 이 경에서만큼은 열반이 최상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최상의 성스로운 진리인 열반은 어떻게 구현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최상의 버림을 기반을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흔히 ‘방하착’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아래로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는 버림으로 설명된다. 내려 놓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이다. 최상의 진리, 즉 열반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버림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고귀한 버림(paramo ariyo cāgo)”이라고 했다.
청소를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하다. 사무실 바닥을 물청소 했을 때 기분이 산뜻하다. 그런데 버릴 때도 기분이 산뜻하다는 것이다. 보지도 않는 책을 버렸을 때, 쓰지도 않는 가구를 버렸을 때 속이 후련하다. 마찬가지로 집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버렸을 때 역시 속이 후련할 것이다.
여기 여덟 가지 정신적 재물이 있다. 이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을 말한다. 여기서 보시의 재물은 버림의 재물이라고도 말한다.
버림은 빠알리어로 ‘짜가(cāga)’이다. 왜 버림이 정신적 재물일까? 이는 ‘abandoning; giving up’의 의미가 크다. 포기 하는 것도 정신적 재물인 것이다.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이는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M140)으로 설명된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고 분명히 알고, ‘탐착할 만한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알고, ‘기뻐할 만한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압니다. 그는 괴로운 느낌을 느껴도,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탐착할 만한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알고, ‘기뻐할 만한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압니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껴도,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고 분명히 알고, ‘탐착할 만한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알고, ‘기뻐할 만한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압니다.”(M140)
즐거운 느낌은 행복과 동의어가 된다. 감각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선정의 즐거움도 행복이 된다. 이런 행복은 버려져야 한다. 왜 그런가?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탐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감각적 즐거움과 선정의 행복은 기뻐할만한 것이 못된다.
최상의 행복은 즐거운 느낌이 없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행복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거기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낍니다. 그는 괴로운 느낌을 느껴도, 거기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낍니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껴도, 거기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낍니다.”(M140)라고 했다.
함부로 행복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열반의 행복을 맛보지 않은 자는 행복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열반의 행복은 행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의 행복은 느낌도 지각도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다. 그래서 열반에 대하여 “이것이 최상의 고귀한 지혜, 즉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M140)라고 했다.
부처님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설했다. 이는 사성제로 설명된다. 그런데 사성제는 열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은 열반에 대하여 성스러운 진리라고 했다.
열반이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놀랍다. 아직까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 140번 경에서는 열반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최상의 고귀한 진실 즉, 허망하지 않은 법인 열반이기 때문이다.”(M140)라고 했다. 열반은 고귀한 것이고 성스러운 것이고 진실인 것이다.
오늘 아침 백권당으로 향하면서 빠알리경전공부 방향을 잡았다. 그것은 문법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 연연해 하기 보다 가르침을 새기자는 것이다. 이렇게 방향이 정해지자 한결 발걸음이 가벼웠다.
빠알리경전공부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시작된다. 매주 진행되다 보니 시간이 금방금방 다가 오는 것 같다. 그런데 반대로 매달 지불해야 날자는 빨리 오는 것 같다.
오늘 아침 걸으면서 강의료 결재를 했다. 스마트폰 앱에 깔려 있는 은행앱에서 5만원을 ‘사단법인 고요한 소리’ 계좌로 입금한 것이다.
보시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소액보시도 가능한 것이다. 페이스북에 후원을 요청하는 포스팅을 보면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많은 금액을 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능력에 맞게 능력껏 보시하는 것이다. 만원이나 이만원 소액보시한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한다. 주었어도 티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하고 나서 “소액이마나 후원했습니다.”라는 문자를 남긴다. 아직까지 상(相)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경전과 함께 하고 있다. 빠알리경전공부에 진척이 없자 포기하려 했으나 새기고자 하는 가르침이 있어서 계속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강의료를 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색하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나 경전을 사 보는 것에는 매우 인색하다. 더구나 배우는 것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배움에는 아무 대가 없이 후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빠알리경전공부가 대표적이다. 이제 방향을 찾았으니 주욱 그 길로 나아가면 된다.
2024-04-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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