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매혹적 대상에 갈애를 일으켰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 11:58

매혹적 대상에 갈애를 일으켰을 때

 
개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항상 개와 함께 한다. 공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젊은 여성에게서 종종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왜 개를 좋아할까? 아마 말을 잘 듣기 때문일 것이다. 말 안 듣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이런 말이 유행했었다. 애인보다 컴퓨터가 더 좋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애인은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는 명령한대로 수행한다. 애인과 함께 있는 것보다 컴퓨터 가지고 노는 것이 훨씬 더 재미 있음을 말한다.
 
요즘 공원에 가면 애완견이 부쩍 많아졌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런 변화를 느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아마 말 안 듣는 사람보다 더 나은지 모른다. 다루기 힘든 애인보다 더 나은지 모른다.
 
애완견을 길러 보지 않았다. 그러나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애완견은 주인 말을 잘 듣는다. 또한 주인을 보면 반가워 한다. 혼자 산다면 이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컴퓨터 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최근 어느 스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 스님의 개에 대하여 시비 건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매우 불쾌해 하게 생각한다.
 
스님은 개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 같다. 산중에서 홀로 사는 스님에게 개는 개 이상이다. 개는 친구가 되고 도반이 되고 삶의 활력이 된다. 스님에게서 개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다.
 
스님의 개가 새끼를 낳았다. 강아지를 다섯 마리 낳은 것이다. 스님은 개가 성장하는 모습을 마치 중계 하듯이 페이스북에 올려 놓는다. 눈도 못 뜬 갓난 강아지들이 어미 젖을 빠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눈 뜬 강아지들이 마당에서 뛰어 노는 장면도 올려 놓았다.
 
개 기르는 스님에 대하여 비판했다. 자꾸 새끼를 배게 하는 것에 대한 비난 겸 비판이다. 육개월이 멀다하고 새끼를 낳는 것에 대하여 이전 사진과 비교해서 글을 쓴 바 있다.
 
스님은 반론을 제기한다. 스님은 늘 말하는 것이 있다. 사람이나 강아지나 똑같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개가 더 낫다는 식으로 써 놓는다. 개만도 못한 인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육도윤회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축생이다. 그러나 인간과 축생이 다르다. 같은 중생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사유에 있다. 인간에게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축생에게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깨달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욕계를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개를 볼 때마다 연민의 마음을 갖는다. “어쩌다가 개의 태에 들어가 개로 태어났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윤회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존재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은 불사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불사는 오온에서 실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시설될 수 없다. 불사이면 불생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스님이 개를 키워도 될까? 이런 의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스님도 똑 같은 사람인데 안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스님은 재가자와 다른 존재이다. 같은 인간이기는 하지만 다른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지만 출가자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간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뒤에 법을 설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알 수 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차라리 설하지 말아야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
 

 
부처님이 법을 설하기 주저한 것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탐욕으로 살고, 성냄으로 살고, 어리석음으로 사는데 그 반대로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귀 기울일까에 대한 의문이다.
 
세상은 탐욕으로 가득하다. 욕망으로 세팅되어 태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에 욕망의 세계, 욕계에 산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욕계를 떠나라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닙비다(nibbidā), 위라가(virāga), 니로다(nirodha)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 수없이 등장하는 이 말은 염오, 이욕, 해탈에 대한 것이다.
 
욕계를 떠나려면 먼저 욕계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이것이 닙비다, 염오이다. 어느 정도인가? 전봇대에 토해진 것을 보는 듯 해야 한다.
 
누구든지 토한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없다. 욕계에 대하여 토한 음식 보듯 한다면 다시는 욕계에 있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점차적으로 욕망이 줄어든다. 마치 물감들인 천이 빛 바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위라가, 탐욕의 빛바램이라고 한다.
 
욕계를 떠나려면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이렇게 싫어하는 마음을 내면 사라지게 된다. 탐욕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욕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으면 싫어하여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욕계에서 티끌만큼이라도 즐거움을 찾는다면 떠날 수 없음을 말한다.
 
스님은 개를 기르고 있다. 육개월마다 새끼를 낳는다. 목줄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발정기 때 대책을 세워 놓지 않은 것 같다. 목줄을 하든지, 아니면 자유롭게 살도록 자연속으로 보내야 했다. 목줄을 해 놓지 않으니 새끼들이 생긴 것이다.
 
스님이 개를 기르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율장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런가? 율장에서는 나무 잎 하나라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는 농사를 짓지 말라는 말과 같다.
 
출가수행자는 탁발에 의지해야 한다.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소유한 것이 있으면 애착이 있을 수밖에 없다. 동물을 키우는 것도 애착이다. 수행자의 삶이 아니다.
 
수행자의 허물은 작은 것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법이다. 다음과 같은 하늘사람과 수행승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한 때 한 수행승이 꼬쌀라 국의 한 우거진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그 수행승은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을 한 뒤에 연못으로 들어가서 붉은 연꽃의 향기를 맡곤 했다. 마침 그 우거진 숲에 살고 있던 하늘사람이 그 수행승을 가엾게 여겨 그의 이익을 위해서 수행승을 일깨우고자 그 수행승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그 수행승에게 시로 말했다.

[
하늘사람]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 도둑이네.”
 
[
수행승] “나는 연꽃을 취하지도 않았고
꺾지도 않았고 떨어져서 향기만 맡았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대는
나를 향기 도둑이라고 하는가?

연 줄기를 잡아 뽑고,

연꽃을 꺾고, 그와 같이 거친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하늘사람] “어떤 사람이 거칠고 흉폭하고,

하녀의 옷처럼 심하게 더럽혀졌다면,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 없지만,
지금은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네.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

[수행승] “참으로 야차여, 그대는 나를 알고

나를 가엾게 여기네.
야차여, 그대가 그러한 행위를
볼 때마다 다시 말해주시오.”

[하늘사람] “우리는 그대에 의지해 살지 않고

또한 당신에게 고용된 하인도 아니네.
행복한 세계로 가는 길을,
수행승이여, 그대가 스스로 알아야 하네.”(S9.14)
 
 
쌍윳따니까야 실려 있는 ‘향기도둑의 경’이다. 게송에서 클라이막스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라는 구절이다.
 
출가수행자는 쉽게 구별된다. 먼저 삭발한 것이 구별된다. 다음으로 승복으로 구별된다. 이는 세상사람들과 차별화 된 것이다. 아주 작은 잘못을 해도 눈에 띈다. 그것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다.
 
수행승은 연꽃 향기를 취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상습적이었을 때 천신에게 충고받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향기도둑’이라는 말이다.
 
수행승은 졸지에 향기도둑이 되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훔쳐 보는 것도 도둑질이 된다.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출가수행자는 청정한 삶을 살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구족계 받은 것이 큰 이유가 된다. 수백가지나 되는 구족계를 지켜야만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야 열반에 들 수 있다. 불사가 되는 것이다. 불사가 되면 불생이 된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든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수행승이 연꽃향기를 취했을 때 천신은 충고 해주었다. 이때 천신은 마치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면 바로 잡아 주고자 한다.
 
천신은 수행승의 습관에 개입했다. 상습적으로 향기를 취했을 때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일종의 충격요법을 준 것이다. 향기도둑이라고 한 것이다.
 
수행승은 향기도둑이 되었다. 억을 했을 것이다. 재가자는 연꽃을 꺾기도 하는데 고작 코로 냄새 맡은 것에 대하여 도둑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천신이 수행승을 가엽게 여겨서 말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갈애를 일으키면 집착이 된다. 집착 단계가 되면 뗄 수 없다. 달라 붙어서 떼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업의 존재로서 태어남이 있게 된다.
 
수행승은 연꽃과 연꽃향기에 갈애를 일으켰다. 갈애가 강화되면 집착이 된다. 이렇게 되면 출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수행승이 향기가 마음에 든다면, 다음 날도 다시 꽃냄새를 맡게 되고, 그러한 마음이 자라 탐욕이 되고 갈애가 된다. 향기에 대한 갈애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갈애는 해탈에 방해가 된다.”(Srp.I.297)라고 설명해 놓았다.
 
갈애는 해탈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스님이 개를 좋아하는 것은 갈애이다. 더구나 육개월에 한번씩 새끼를 본다면 이는 집착이 된다. 수행자로서 해탈과 열반에 방해가 되는 삶이다.
 
스님은 어제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올렸다. 이번에 태어난 두 달도 안된 강아지 한마리에 대하여 쓴 것이다. 마치 손주 보듯 한다. 인간보다 강아지가 훨씬 더 은 듯이 써 놓았다.
 
한국스님들은 자유롭다. 한국스님들은 자유롭게 사는 것 같다. 한국스님들은 걸림 없이 사는 것 같다. 계율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도 없는 것 같다.
 
종종 한국스님들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 누구나 쓰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지위가 있고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종단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지위도 없고, 명예도 없고, 종단과 이해관계가 없는 블로거는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어떤 재가불자가 댓글을 달았다. 스님을 비판한 것에 대하여 몹시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그 재가불자는 나에게 구업(口業)짓는다고 했다.
 
글을 쓰면 구업이 된다. 그것이 선업이 될지 악업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을 비판하면 구업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의 허물을 말하면 구업이 된다. 승가의 일에 재가자가 간섭한다는 것이다. 재가자가 비판하지 않아도 승가의 자정능력이 작동되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 율장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율장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빠알리 율장도 번역되어서 출간되었다. 누구나 율장을 사볼 수 있다. 옛날에는 금서였으나 지금은 누구나 볼 수 있다.
 
율장은 수범수제(隨犯隨制)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를 범했을 때 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스님이 개를 기른다고 누군가가 비난이 있었다면 아마 “수행승들이여, 개를 기르지 말라. 개를 기르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새로운 율이 만들어질 것이다.
 
오늘날 빠알리 니까야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행승이 해서는 안될 일이 경장에도 실려 있다. 동물 기르는 것과 관련된 것도 물론 있다.
 
디가니까야에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이 있다. 이 경에서 동물과 관련된 계행이 있다. 이는 “염소나 양을 받는 것을 여읩니다.” “닭이나 돼지를 받는 것을 여읩니다.”등의 내용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출가수행자가 동물을 길러서는 안됨을 말한다.
 
출가수행자는 농사를 지어서는 안된다. 당연히 동물을 길러서도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 스님들은 농사도 짓고 동물도 키운다. 한국불교 출가자는 어떤 것이든 걸림이 없는 것 같다.
 
스님은 출가를 왜 했을까? 출가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피형 출가도 있고 생계형 출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근본 이유는 해탈과 열반의 실현일 것이다.
 
해탈과 열반의 실현에 방해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갈애이다. 갈애를 일으키면 집착이 된다. 연꽃에 반해서, 연꽃 향기에 반해서 매일 코를 댄다면 갈애가 된다. 갈애가 강화 되어서 집착이 되면 해탈과 열반과는 멀어진다. 동물 키우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누구나 개를 좋아 할 수 있다. 공원에서 목줄한 애완견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개모차’까지 등장했다. 그렇다고 비난할 수 없다. 혐오할 수는 있어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님이 공원에 애완견을 데리고 나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한 스님이 절에서 개를 키우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난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수행승의 허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스님에 대하여 글을 쓰면 좋은 소리 듣지 못한다. 특히 스님들이 싫어한다. 스님의 허물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에 떠들어 대면 불교 교세가 약화된다고 말한다. 타종교 좋은 일 시켜 준다고 말한다.
 
오늘날 불교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적극적인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율장에서 볼 수 있다. 어떤 수행승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율장 대품을 보면 어떤 도둑이 출가했다. 도적질을 하고 도망가서 승가에 숨어 버린 것이다. 이것을 나중에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 감옥을 부순 도적을 출가시킬 수 있단 말인가?”(Vim.I.75)라며 분개 했다.
 
수행승들은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알렸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감옥을 부순 도적을 출가시켜서는 안된다. 출가시키면 악작죄가 된다.”(Vim.I.75)라고 했다. 새로운 율이 만들어진 것이다.
 
율장은 수범수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를 지으면 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법이 만들어지는 원리와 똑같다. 수행승이 담배 피운다면 담배 피우지 말라는 율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수행승이 개를 키운다면 개를 키워서는 안된다는 율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스님이 어미개 단속 하지 못해서 새끼들을 가졌다고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더구나 강아지들을 분양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법과 율에 위반 된다. 수행승은 “사고 파는 것을 여읩니다.”(D2)라고 했는데 분양하는 것은 사고 파는 것이 된다.
 
오늘날 승가가 유지되어 온 것은 사람들의 적극적 비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보고서도 못 본 척 하고, 듣고서도 못 들은 척 했다면 오늘날까지 승가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승가나 스님에게 잘못이 있다면 드러내야 한다. 먼저 승가의 자정 능력이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갈마를 이용한 자정이다.
 
갈마란 무엇인가? 스님의 잘못을 드러내서 처벌하는 것이 주된 것이다. 그런데 잘 살펴 보면 부처님의 정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법에서 벗어나면 쳐내는 것이다. 마치 타종교에서 이단을 단속하는 것과 같다.
 
스님에 대하여 비난하고 비판하는 글을 종종 쓴다. 이럴 때 비난 받고 비판 받는다. 어떤 이는 구업 짓는다고 말한다. 이럴 때 “구업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오래 유지되려면 승가가 청정해야 한다. 또한 스님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하여 재가자들의 적극적인 비난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교도 살리고 승가도 살리는 것이다.
 
 
2024-06-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