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혈

식감 파근파근 해남특산 밤호박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29. 09:18

식감 파근파근 해남특산 밤호박
 
 
바로 이 맛이다. 파근파근한 것이 맛의 기억을 소환한다. 해남특산품 밤호박맛이다.
 
어제 택배가 도착했다. 금요일 저녁 행사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귀가했는데 문앞에 박스가 있었다. 다음주에 도착할 줄 알았으나 통화한지 하루 만에 왔다.
 

 
해마다 이맘때면 먹는 것이 있다. 밤호박이다. 단호박이 아니라 ‘밤호박’이라 한다. 왜 밤호박이라 하는가? 식감이 파근파근해서 밤호박이라 한다. 맛이 밤맛이라 해서 밤호박이라 한다. 해남으로 귀촌한 친구부부가 농사지은 것이다.
 
친구가 많이 아프다. 그제 친구처와 통화하면서 들었다. 대장수술을 했는데 요양원에 있다고 한다.
 
친구는 자신의 고향마을로 귀촌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초여름에는 밤호박, 중가을에는 꿀고구마를 출하한다. 대규모로 짓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로 둘이서 감당할 수 있는 것만큼 짓는다.
 
둘이서 살다가 한사람이 아프면 혼자 남은 사람이 다 해야 한다. 친구가 아프니 친구처가 밤호박를 지었다. 둘이서 하다 혼자 하려니 얼마나 힘들까?
 
벌써 몇 년째인가? 이제 거의 십년은 된 것 같다. 지난 십년동안 친구의 특산품을 홍보해 왔다. 칠월에는 밤호박, 시월에는 꿀고구마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방, 밴드에 알렸다.
 

 
사업을 오래 하다 보면 단골이 생긴다. 별도로 광고하지 않아도 주문이 들어온다. 농산물직거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십년동안 친구의 농산물을 홍보해 왔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서 특산품을 팔아 주었다. 시중 보다는 약간 비싸기는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생산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은 밤호박으로 식사하기로 했다. 박스에 있는 설명문대로 전자레인지에 몇 분 가열했다. 완성되면 황금빛 밤호박이 된다. 파근파근한 식감이다. 껍질째 먹는다. 뒷 끝이 좋다. 인스턴트 식품과 비할 바가 아니다. 최고급 웰빙식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나의 밤호박이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몇 해전 친구의 농장을 방문한 적 있다. 그때 친구로부터 들은 것이 있다. 파근파근한 식감을 내기 위해서는 과감히 솎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박과 밤호박은 다르다. 흔히 시장에서 보는 호박은 물컹물컹하며 맛도 없다. 왜 그럴까? 생기는 대로 수확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밤호박은 철저히 품질관리를 한다. 명품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몇 개의 열매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은 따주어야 한다.
 
페이스북에서 농사 짓는 사람의 글을 보았다. 텃밭농사 짓는 사람의 글이다. 작물을 수확하려면 모진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써 놓았다. 잡초 제거는 말할 나위 없다. 한주만 남기고 주변 것은 모두 뽑아 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한주 남은 것에서 몇 개의 열매만 남기고 나머지 열매는 모두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농사를 지어 보지 않았다. 농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글을 통해서 또는 말로 들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하나의 상품을 만들기 위에서는 솎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율장을 보면 수행승이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농사 짓는 것이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수행자 고따마는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의었다.”(D1.10)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수행자가 농사하면 농부가 될 것이다. 이는 행위에 따른 것이다. 이는 “인간 가운데 소를 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셋타여, 그는 농부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Stn.612)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태생에 의해 바라문인 자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바라문인 자가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Stn.686)라고 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그 사람의 지위로 판단해야 할까? 그 사람의 배움으로 판단해야 할까? 그 사람의 부로 판단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이다. 행위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나타낸다. 그래서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도 되고 농부도 되고 도둑이 된다고 했다.
 
수행자가 농사를 지으면 농부가 된다. 그런데 농사를 짓다 보면 오계를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닭이나 돼지 등 가축을 기르다 보면 살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축생은 비참한 존재이다. 왜 그런가?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 약한 것은 잡아 먹히고 강한 것은 잡아 먹는다. 축생은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존재이다.
 
요즘 자주 보는 유튜브가 있다. 베트남에서 야생돼지 치는 사람의 유튜브이다. 유튜브 제목은 ‘Green forest life’이다. 매우 성실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숲속에서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 준다.
 
유튜브 ‘Green forest life’를 보면 야생돼지의 일생을 볼 수 있다. 새끼 때부터 팔려 나갈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 준다. 또한 돼지를 잡아 먹는 것도 보여주고 닭을 잡아 먹는 것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런 영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돼지도 치고 닭도 길렀다. 유년시절 기억에 따른다. 멀리서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았다. 이런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유튜브 영상에서 돼지 새끼는 태어날 때 마치 세상에 던져지는 것 같다. 막을 뒤집어 쓴 채 탯줄까지 달려 있는 갓난 새끼는 잠시 멍한 것 같다. 그러나 이내 젖을 찾아간다.
 
새끼돼지는 어미의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어느 정도 자라면 돼지죽을 먹는다. 상당히 자라면 시장에 내다 판다. 이런 과정을 보았을 때 돼지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시람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축생의 일생은 비참하다. 마치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다. 그런 축생은 오로지 먹기만 한다.
 
축생은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있는 것 같다. 하나 더 있다면 생식하는 것이다. 그래 보았자 축생의 최후는 사람의 먹잇감이 된다. 닭의 운명도 그렇고 소의 운명도 그렇다. 이런 축생의 일생에 대하여 경전에서는“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M129)라고 했다.
 
요즘 고기를 가능하면 먹지 않으려 한다. 마트에서 고기 사는 일이 줄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 일체 고기를 사지 않았다. 어류도 사지 않는다. 그 대신 가공된 소시지는 구입한다.  식당에서는 주는 대로 먹는다. 그러나 최소화하고자 한다.
 
고기를 멀리 한 것은 축생의 비참함에 대하여 숙고하고 나서부터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축생은 잡아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태어남 자체가 비참하다. 남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인간이 축생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육도윤회에서 인간은 축생의 지위로 떨어질 수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을 탐하여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 가운데 동료로 태어난다.”(M12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맛을 탐하는 자는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갖는 사람은 이 다음에 죽어서 돼지나 닭, 소와 같은 동물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먹은 죄 / 반칠환)
 
 
시인은 ‘먹은 죄’를 노래했다. 먹은 것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고기를 좋아해서 돼지고기를 먹고, 소고기를 먹고, 닭고기를 먹었다면 먹은 죄의 과보를 받을지 모른다. 먹은 죄로 인하여 돼지, 소, 닭의 동료 가운데 하나로 태어날지 모른다.
 
맛에 탐착하면 축생과 같은 삶이 된다. 그러나 거룩한 존재는 식사를 하지만 맛을 탐하지 않는다. 맛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범부는 음식을 대할 때 갈애로 먹는다. 또한 범부는 탐욕으로 먹고 분노로 먹는다.
 
수행자는 음식을 접할 때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먹어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 어느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아기를 데리고 황야를 건너고자 했다. 도중에 음식이 떨어졌다. 부부는 아들고기를 먹고 황야를 무사히 건넜다.
 
부부는 황야를 빠져 나오기 위해 아들고기를 먹었다. 귀한 외동아들을 잡아 먹은 것이다. 부부는 통곡했다. 아들고기를 먹으면서 “외아들아, 어디에 있니? 외아들아, 어디에 있니?”(S12.63)라며 가슴을 후려쳤다.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먹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놀이 삼아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취해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진수성찬으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영양을 위해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S12.63)라며 물었다.
 
음식을 놀이나 사치로 먹는다면 범부이다. 음식을 미용으로 먹어도 범부이다.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먹어야 한다. 몸에 기름칠하는 정도로 먹는다. 아플 때 약으로 먹듯이 먹어야 한다.
 
아들고기 이야기는 수행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청정도론에서 ‘음식에 대한 혐오적 지각수행(āhāre paṭikkūla-saññā)’에 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이 그러한 두려움이 있는 까닭에 물질의 자양은 아들 살의 비유로 될 수 있다.”(Vism.11.1)라고 했다.
 
요즘 식사할 때 주로 채식 위주로 한다. 요즘 가장 좋아 하는 메뉴는 비빔밥이다. 일체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채식이다. 이전에는 고기를 꼭 먹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어렸을 적에 고기를 먹지 못하고 자란 것도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경전공부가 심화될수록 고기를 점차 멀리 하게 되었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고기를 사먹지 않는다. 이렇게 나이에 따라 시절인연에 따라 입맛이 바뀌는 것 같다.
 
수행자가 해서는 안될 일이 많다. 그 중에 하나는 농사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게 되면 가축을 기르게 된다. 가축은 대부분 먹잇감이 된다. 또한 농사를 지으면 초목을 다치게 한다.
 

 
오늘 밤호박을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먹었다. 식감이 파근파근한 것이 최상의 맛이다. 이는 다름 아닌 담백한 맛이다. 다른 조미료가 필요없다. 껍찔째 먹는다. 먹고 나면 뒤끝이 좋다. 몸이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 같다.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다. 해남친구는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게 되었다. 요양원에서 살고 있다. 하루 빨리 완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주에 한번은 집에 온다고 한다. 그 결과 농사는 친구처가 짓게 되었다.
 
농사는 힘든 일이다. 농사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고 한다. 더구나 여자 혼자 몸으로 농사 지었을 때 힘은 배가 될 것이다. 그런 특산품이 도착했다.
 

 
오늘 먹은 한끼의 식사는 반나절을 버티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릴없이 다음 식사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서는 안된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갖고, 먹는 것이 대사가 된다면 축생과 다를 바 없다.
 
오로지 맛에만 탐착한다면 죽어서 축생으로 태어날지 모른다. 인간 또는 천상의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업을 쌓아야 한다. 어떻게 쌓는가? 매순간 매번 새김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나는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가?
 
 
2024-06-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