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빤냐와로바라기가 되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15. 14:23

빤냐와로바라기가 되어
 
 
생각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부서진다. 마치 인해전술로 끊임 없이 밀고 들어 오는 것 같다. 어떻게 격퇴해야 할까? 새기는 수밖에 없다. 생각을 생각이라고 새기고 또한 생각의 앎을 새기는 것이다.
 
재가우안거 88일째이다. 그제 담마와나선원에서 해제법회가 있었으나 보름날까지 간다. 보름달이 세 번 뜰 때, 90일째 되는 날 끝난다.
 
오늘도 개인수행처로 떠났다. 백권당토굴을 말한다. 요즘시대에는 아파트나 오피스텔도 토굴개념으로 본다. 한적한 암자나 시골집과 같은 이미지에서 개념이 확장된 것이다.
 
일인사업자이자 블로거이자 재가수행자
 
용도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여기 있는 상은 공부할 때는 책상이 되지만 밥 먹을 때는 밥상이 된다. 일인사업자이자 블로거이자 재가수행자인 사람의 처소는 어떠할까? 일감이 있어서 일할 때는 일터가 되고, 글을 쓸 때는 블로거가 되고, 행선과 좌선을 할 때는 수행처가 된다.
 
요즘 백권당은 수행처나 다름 없다. 일감이 뚝 끊긴지 몇 주 되었다. 모든 것이 수행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오전은 수행으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그리고 수행기를 작성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오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요즘 할 것이 없다. 무엇보다 유튜브를 보지 않는 것이 크다.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세상이 조용하다. 그러나 한줄 소식은 막을 수 없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새로 설치된 모니터에서 한줄 뉴스가 나온다. 애써 피한다. 식당에 가면 뉴스채널을 볼 수 있다. 애써 눈길을 주지 않는다.
 
뉴스 없는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 TV없이 산지는 몇 년 되었다. 신문 보지 않은지는 십 년 이상 되었다. 요즘에는 카톡방도 잘 열어 보지 않는다. 이념투쟁에 몰두하는 사람의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 보는 것은 있다. 페이스북이다.
 
끼리끼리 논다고 말한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어울리는 것이다. 페이스북도 이에 해당된다. 그러다 보니 정치투쟁, 이념투쟁하는 사람의 것이 없다. 배제했기 때문이다.
 
수행을 마치고 이렇게 하얀 여백을 대한다. 가장 순수한 마음 상태이다. 뉴스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막 좌선을 끝냈기 때문에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상태가 된다. 마치 흙탕물이 정화되어서 바닥에 있는 돌맹이가 보일 정도로 투명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글을 쓴다.
 
오늘 좌선은 한시간 했다. 삼십분 알람을 설정해 놓았으나 시간이 되었을 때 무시했다. 거의 1분 울리는 알람소리를 새기면서 삼십분 더 달렸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다. 새벽에 한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난방을 하면 좋다. 그러나 시간이 늦었다. 전기매트라도 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음식도 가려 먹는다. 술은 일체 마시지 않는다. 우안거기간 동안의 큰 변화이다. 예전에는 막행막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거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차 선원에서 사는 것처럼 되었다.
 
선원에서는 팔계를 지킨다. 재가자의 경우 매일 새벽법회 때 팔계를 받아 지닌다. 재가자의 팔계를 포살계라고 하는데 이를 ‘하루낮하루밤계’라고 한다. 효력이 하루밖에 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받아 지닌다. 하루만큼은 출가수행자처럼 사는 것이다.
 
우안거 세 달은 몸과 마음을 바꾸게 하기에 충분한 기간
 
우안거는 이틀 남았다. 이틀 후가 되면 자유인이 된다. 그렇다고 만행하는 것은 아니다. 세 달 동안 형성된 습관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마치 몸과 마음이 바뀐 것과 같다.
 
이 몸은 내 몸일까? 내 몸이라면 변함 없이 그대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몸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 안에서는 신진대사가 일어나고 있다.
 
음식을 먹으면 살이 되고, 뼈가 되고, 피가 된다. 신진대사에 따른 것이다. 나의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어떤 이에 따르면 몸은 백일이 지나면 모두 바뀐다고 말한다. 마치 물갈이 하는 것과 같다. 세포가 모두 바뀜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우안거 세 달 동안 몸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몸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먹는 것에서 드러난다. 소식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는 찐계란 하나, 찐 고구마 한 개를 먹는다. 여기에 찐 감자나 찐 단호박을 곁들인다. 최소한의 식사이다. 매우 소박한 식사이다. 점심 때는 한식부페식당에서 조금 먹는다. 고기는 배제하고 나물이나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한다. 저녁에는 밥 한공기가 약간 부족하게 먹는다. 육고기 보다는 생선 위주의 식단이다.
 
매일매일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삶이 바람직하다. 왜 그런가? 수행자의 삶은 일상이 늘 변함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고, 어제는 내일과 같은 삶이다. 이렇게 살았을 때 몸과 마음에 변화가 있게 된다.
 
백일이 되면 몸이 바뀐다고 한다. 온몸의 세포가 바뀌는 것이다. 당연히 살도 바뀌고, 뼈도 바뀌고, 피도 바뀐다. 마음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우안거 세 달도 몸과 마음을 바꾸게 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바뀌었는가?
 
수행기는 안거의 증명서
 
오랜만에 사람을 보면 변화를 감지한다. 어떤 이에게서는 눈을 크게 볼 정도로 큰 성장을 이룬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어떤 이에게서는 몸과 마음이 크게 무너져 있음도 보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큰 변화는 없다. 옛날 그 모양, 그 모습에서 변한 것이 없다.
 
자신을 변하게 하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수행을 하면 향상되는 삶,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어느 날 보았을 때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작년과 올해 연속 안거를 나고 있다. 생애 통산 두 번의 안거이다. 법랍으로 따지면 두 해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가자의 안거에 대하여 인정해 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수행기로 나타난다.
 
안거기간 동안 거의 매일 수행기를 작성했다. 수행기는 책으로 나온다. 이번에도 책으로 나올 것이다. 수행과정에서 체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쓴 것이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향상되고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수행기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기는 안거의 증명서가 된다.
 
믿고 신뢰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 것도 자신이 알 수 있다. 누군가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태도와 습관으로 알 수 있다. 언행일치로도 알 수 있다. 이는 스승을 선택하는 척도로도 활용된다.
 
스승 없이 안거를 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을 스승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대단히 경솔한 생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고 했다. 이는 경전을 스승으로 삼아 정진할 수도 있음을 말한다.
 
 
도와 과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스승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믿고 신뢰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이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은 훌륭한 스승이 된다.
 
제자가 스승을 선택한다
 
스승도 선택해야 한다. 스승이 제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제자는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M47)라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학생을 뽑는다. 학생에게는 스승의 선택권이 없다. 교실에 들어와서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이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스승이 아니라 선생이다.
 
선생은 학생을 찾아 다닐 수 있다. 과외선생이나 학원을 예로 들 수 있다. 학교 선생도 이와 같은 범주에 해당된다. 그러나 스승은 학생을 찾아 다니지 않는다. 학생이 찾아 오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하여 제자가 스승을 선택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스승 선택 조건 세 가지
 
훌륭한 스승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맛지마니까야 ‘관찰자의 경’(M47)에서는 부처님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오염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 (M47)
둘째,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뒤섞인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 (M47)
셋째,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청정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 (M47)
 
 
스승의 조건 세 가지에 대한 물음이다. 스승이 오염된 상태인지, 뒤섞인 상태인지, 그리고 청정한 상태인지 파악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 그런가? 마치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정신능력이 낮은 자는 자신보다 정신능력이 높은 자를 결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인 행동을 보고 추론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인지 알기 위해서는 잘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이에 대하여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오염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M47)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탐, 진, 치로 오염되어 있는 자
 
첫째, 그 사람이 오염된 상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 막행막식하는 자가 있다. 이런 자를 스승으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자의 행위는 눈을 통해 인식할 수 있고 또한 귀를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물이 찰랑이고 거품이 보글대면, 안에 물고기가 있다고 추론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살생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하는 신체와 언어의 행위를 보고 듣고 그것이 근거하는 마음이 오염되었는지를 추론한다.”(Pps.II.380)
 
 
부처님은 스승의 조건을 갖추었다. 일체지자로서의 스승이다. 그러나 범부는 일체지자의 경지를 모른다. 그래서 여래라는 말 대신에 스승이라는 말을 넣으면 “오염된 상태들이 스승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가 된다. 그 사람의 행위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파악된다. 탐, 진, 치로 사는 자를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
 
밝은 행위(業)와 어두운 행위(業)가 섞여 있는 자
 
둘째, 그 사람이 뒤섞인 상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스승을 선택할 때 뒤섞인 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때는 청정해 보이지만 또 어떤 때는 아닌 경우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뒤섞인 상태들이 스승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라고 말할 수 있다.
 
뒤섞인 상태는 불안한 상태이다. 선행과 악행이 혼재 되어 있는 것과 같다. 행위를 청정하게 하지만 지속적으로 유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밝은 행위(業)와 어두운 행위(業)가 섞여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자를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
 
마음의 오염원이 없는 자
 
셋째, 그 사람이 청정한 상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스승을 선택할 때는 청정한 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는 부처님에 대하여“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청정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로 관찰하는 것과 같다.
 
청정한 자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마음의 오염원이 없는 자를 말한다. 탐, 진, 치가 소멸된 자라면 최상의 조건이 된다. 세상에 부처님만한 스승이 어디 있을까?
 
부처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 그러나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찾아서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사람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체크 해야 할 것을 말했다.
 
 
1) “착하고 건전한 상태에 도달한지 오래 되었는지 일시적으로 도달한 것인지” (M47)
2) “명성을 얻고 유명해졌는데 그에게 다소간 위험이 있는지” (M47)
3) “두려움 없이 고요한지, 두려움 때문에 고요한지, 그가 탐욕의 소멸을 통해 탐욕을 떠났으므로,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는 것인지” (M47)
 
 
세 가지 체크포인트에서 두 번째에 주목한다. 이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왜냐하면, 수행승이 명성을 얻고 유명해지지 않으면, 그에게 위험은 없지만, 수행승이 명성을 얻고 유명해지면, 그에게 다소간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M47)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위험은 ‘자만, 오만, 교만’등을 말한다. 수행승이 유명해지지 않고 추종자도 없으면, 그러한 위험은 발견되지 않으며, 조용하고 고요하지만, 수행승이 유명해지고 추종자도 얻으면, 그들은 날카로운 뿔로 소의 무리를 공격하는 못된 황소처럼, 사슴 무리를 짓밟는 표범처럼, 다른 수행승을 여기 저기 공격한다. 존경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지 않고 무례하게 돌아다닌다.”(Pps.II.384)
 
 
명성을 중시하는 스님이 있다. 이른바 스타스님이다. 대중 앞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애쓰는 스님이 해당된다. 더 나아가 국민스님이 되었을 때 명성에 금이 갈 까봐 부처님의 가르침도 왜곡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이 대표적이다.
 
유명하다고 해서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출가스님이라고 해서 청정하지는 않다. 몸은 출가 했지만 마음은 세속에 있는 스님들도 많다. 이른바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빠진 스님들이다. 이런 스님들을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 청정한 자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하게 되었을 때
 
매일 긴 글을 쓴다. 요즘은 안거기간이라 행선과 좌선을 마치면 수행기를 작성한다. 어떤 이는 다짜고짜 선지식을 찾으라고 말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스승으로 삼아 정진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은 것 같다.
 
혼자 수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논서를 스승으로 삼아 수행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도와 과를 이루려거든 훌륭한 선지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다. 설령 찾았다고 할지라도 알 수 없다. 이럴 때 부처님의 스승을 찾는 세 가지 방법을 배워야 한다. 부처님은 자신을 예로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제자는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 스승을 찾아야한다. 그 스승은 그에게 가르침을 어둡고 밝은 양쪽 면으로, 점점 높은 수준으로, 점점 섬세한 수준으로 가르친다. 스승이 수행승에게 가르침을 어둡고 밝은 양쪽 면으로, 점점 높은 수준으로 점점 섬세한 수준으로 가르치는 것만큼, 그만큼 그는 이 가르침 가운데 여기 어떤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알아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에 이르게 되고,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이고, 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참모임은 잘 실천한다.’고 스승에 대하여 신뢰한다.”(M47)
 
 
이것이 진정한 스승의 조건이다. 제자를 향상과 성장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는 스승이 도와 과의 경지에 들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제자는 스승을 선택하여 배운다. 낮은 단계에서부터 높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배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 경에서는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에 이르게”한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이 있어야 배울 수 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가르침이 스승에 의해서, 길(道)과 경지(果)와 열반의 관통을 통해 직접적으로 알려져서 교시될 때에 수행승은 예비적인 가르침을 깨달음에 필요한 것이라고 결론 짓게 된다.”(Mdb.1243)라고 설명해 놓았다.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해탈과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는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특히 열반을 증득해야 그래야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다.
 
수행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열반을 증득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그런데 스승이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고 사향사과에 들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 제자도 열반을 증득하지 못사고 사향사과에 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스승의 조건은 출세간적 길을 통해 진리를 본 자이어야 한다.
 
선지식을 찾으라고 말한다. 선지식도 선지식 나름이다. 출세간적 길과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를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 열반은 증득해야 할 것이다. 열반을 증득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될 수 있다. 아무나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
 
혹시 저 사람은 아라한이 아닐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저 사람은 어느 정도의 경지일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판단을 해 본다. “혹시 저 사람은 예류자가 아닐까”, “저 사람은 일래자가 아닐까?, “저 사람은 불환자가 아닐까?”, “저 사람은 아라한이 아닐까?”라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상상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범부의 눈으로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인품이나, 인격, 지위, 자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세간적으로 명성이 있어도 출세간적 지혜가 있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을 따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스승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세간적 스승과 출세간적 스승은 차이가 있다.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과 범부는 다른 것이다.
 
빤냐와로바라기가 되어
 
담마와나선원은 특별 법회가 있을 때 간다. 대개 붓다의 날, 우안거 입재, 우안거 해재, 까티나축제 때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한다. 이때 빤냐와로 스님이 오는 것도 이유가 된다.
 
이번 우안거 해제법회 때 멀리서 온 사람이 있다. 순천에서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올라 온 I선생이다. 선생은 왜 그토록 먼거리를 달려 왔을까? 아마 빤냐와로 스님을 보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본다. 그래서 해바라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담마와나선원법회 때도 ‘빤냐와로바라기’가 있는 것 같다. 빤냐와로 스님 보려고 오는 것이다.
 
담마와나 선원 특별법회가 열리면 법당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모두가 빤냐와로 스님을 보고자 온다고 말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분명한 사실은 빤냐와로 스님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크다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이 시대 최고의 선지식이나 다름 없다. 스님의 법문을 접하면 알 수 있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충만된다. 아마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진리를 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빤냐와로스님바라기가 되는 것 같다.
 

 
빤냐와로 스님의 명언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래서일까 밴드에는 스님의 음성녹음을 녹취해서 한글로 올려 놓는 사람도 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올린다. 들을만한 가치, 볼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이 있는 날은 노트를 준비한다. 마치 기자가 받아 적듯이 작은 노트에 기록해 둔다. 후기를 쓸 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다. 그제 들은 것 중에 명언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이 날 때 관찰하고 있습니까? 정신으로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화살을 두 번 맞을 수 없습니다. 느낌관찰을 하십시오. 도마낫사로 넘어가지 않게 하십시오.”
 
2) “두 찰나도 똑 같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 변합니다.”
 
3) “출가한 스님은 무슨 마음으로 출가했을까요? 아마 세속을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답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출가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왜 출가하지 못합니까?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 못합니다. 내려 놓지 못해서 출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내려 놓았습니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출가는 대단한 것입니다.”
 
5) “이제는 내려 놓으십시오. 자신을 위해 투자하십시오. 열반에 이르는 것은 본인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그것을 수행대상으로 삼으십시오.”
 
6) “남방가사 입고 다니다 보면 누군가 시비겁니다. 먼저 ‘한국분이세요?’라고 물어 봅니다. 한국스님이 확인 되면 ‘한국스님이면 한국승복을 입어야죠?’라며 훈계하듯이 말합니다. 이럴 때 ‘고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7) 남방가사 입고 다니면 제약이 많습니다. 법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남방승복 입습니다. 테라와다승복 입는 한국스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8) “이 승복 입고 죽으면 범부와 똑같습니다. 윤회하지 않으려고, 해탈하기 위해서 승복입고 수행합니다.”
 
9) “하나 여러분에게 여쭈어 볼께요. 여러분은 법에 대해 확신이 있습니까? 법문이 귀에 들어 옵니까? 내용이 들어 옵니까? 법문에 대해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도 사띠하는 것입니다.”
 
10) “하나 더 물어 볼께요. 잘 안떨어지는 번뇌는 뭐가 있습니까? 잠재성향입니다. 이런 것은 빨리 끄집어 내어서 알아차리고 빼내야 버려야 합니다.”
 
11) “여러분 열반 경험해 보았습니까? 빨리 경험해 보십시오.”
 
12) “하나 물어 볼께요. 왜 살아요? 이런 질문에 생존욕구 때문에 산다고 말합니다. 갈애로 사는 거죠. 그런데 갈애를 제거해야 도와 과를 이룹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해 삽니다’라고 답해야 합니다.”
 
13)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좌선과 경행만 열심히 하면 절름발이 수행이 됩니다. 일상에서도 수행해야 합니다.”
 
14) 오계는 자동으로 지켜 지고 있습니까? 출가자는 구족계를 부단히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스님은 여자가 혼자 오면 오지 마라고 합니다. 사람이 모일 때 같이 오라고 합니다. 작은 허물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15) “하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싸띠해야 합니다. 일상에서 싸띠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16) “싸띠의 힘을 키워야 도와 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띠는 도와 과로 들어갈 수 있는 도구입니다. 사마타만 닦는 스님은 소수입니다. 보조적 도구로 사마타 수행합니다.”
 
17) “고요함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호흡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무상, 고, 무아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임종에 이를 때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서 죽어야 합니다.
 
18) “고요하고 평화로움을 즐기지 마십시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수행하십시오.”
 
19) “특별한 경험, 특별한 경지에 오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싸띠하면 재미 있습니다. 바뀌어 가는 느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을 들은지 칠년 되었다. 2018년 담마와나선원 개원법회 때 부터 들었다. 유튜브로도 들었다. 그러나 직접 듣는 것만 못하다.
 
빤냐와로 스님 법회가 있을 때 꼭 참석했다. 법문 중에 반드시 노트를 했다. 요즘은 작은 수첩을 활용한다. 빠짐 없이 받아 적는다. 그리고 후기에 활용한다. 이렇게 보면 법문을 세 번, 네 번 듣는 것이 된다.
 
나의 선지식은 누구일까? 빤냐와로 스님만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말해 본 적은 없다. 인사할 때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이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나보다 나은 자를 스승으로 삼아야
 
인상이 과학이라고 한다. 이는 관상이 과학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얼굴에 다 써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계를 잘 지키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정직한지, 그 사람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청정하면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
 
나보다 나은 자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나와 동등한 자는 동료가 될 것이다. 그래서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리라.”(Dhp.61)라고 했다. 현재는 홀로 가고 있다. 무소의 뿔처럼 나혼자.
 
 
2024-10-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