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테라와다불교 2024년 우안거 해제의 날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행선전과 행선후가 다르다. 행선으로 다른 마음 상태가 되었다. 중립적 마음이다. 평온한 마음이다. 충만된 마음이다. 이런 맛에 명상하는 것 아닐까?
재가우안거 87일째이다. 우안거는 사흘 남았다. 그럼에도 어제 담마와나선원에서는 우안거해제법회가 있었다. 사람들은 일요일에 시간이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나흘 앞당겨 열린 것이다.
오늘 행선은 특별했다. 그렇다고 빛을 보는 것 같은 황홀한 것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현상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한시간 했을 때 명색이 분리되는 것 같았다. 정신 따로 마음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놀라운 집중의 힘
명상을 하다 보면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집중의 힘일 것이다. 마음을 집중하면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마치 돋보기로 한 지점을 타겟으로 하는 것과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인지 중학교 저학년 때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 나무칼을 만들었다. 칼로 나무를 다듬어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 문양도 집어 넣었다. 마치 달군 쇠꼬챙이로 지진 것처럼, 돋보기를 이용하여 햇볕을 집중해서 만든 것이다.
돋보기를 이용하여 햇볕을 집중하면 하나의 포인트가 형성된다. 계속 비추면 연기가 난다. 이런 방식으로 나무칼 문양을 만들었다. 너무 열심히 만들어서일까 눈병이 날 지경이었다. 마음도 집중하면 놀라운 효과를 보게 된다.
명상은 마음을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음을 한곳에 모으면 엄청난 힘이 생겨난다. 상상도 못할 일이 발생한다. 선정삼매에 들면, 예를 들어 사선정에 들면 신통이 생겨난다는 정형구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리속담에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면 되지 않을 일이 없음을 말한다. 명상은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좌선보다 행선을 더 중시하는 것은
오늘 아침 행선은 1시간 30분 했다. 재가우안거기간 동안 이렇게 오래 한적은 없었다. 오늘 기록 세운 것이다. 오늘 좌선은 생략했다.
행선에서 이런저런 것을 본다. 행선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볼 수 없는 것도 본다. 의도 같은 것이다. 좌선에서 보기 힘들다. 의도는 행선에서만 볼 수 있다. 또한 좌선은 사대를 온전히 볼 수 없다. 그러나 행선에서는 사대를 온전히 볼 수 있다.
빤냐완따 스님은 행선예찬론자이다. 스님이 쓴 ‘경행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글에 따르면, 스님은 행선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법의 성품을 본 것이다.
행선은 법의 성품을 보기 좋은 수행방법이다. 실제로 행선을 해보니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에 대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조건파악의 지혜를 말한다.
행선에서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를 보는 것은 좌선에서 보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왜 그런가? 움직이는 대상을 새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 앉아서 명색을 새기는 것보다 움직이면서 새기는 것이 법의 성품을 보는데 있어서 더 빠르고 효과적인 것 같다.
행선을 중시하는 수행전통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한국불교에 행선과 유사한 포행이 있지만 이는 몸풀기에 지나지 않는다. 걷기가 수행이 되려면 명색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서서 수행하는 방법
이번 재가우안거기간 동안 거의 매일 행선했다. 이에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행선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매일 하다 보니 나름대로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행선은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걷기, 멈추기, 돌기, 이렇게 세 단계를 말한다. 이 가운데 핵심은 걷기이다. 그런데 걷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서있기와 돌기이다.
행선하다 방향을 바꾸려면 멈추어야 한다. 이때 “획”하고 돌아서면 안된다. 멈추었다가 서서히 도는 것이다. 멈추어 서 있는 것도 수행이고, 방향을 바꾸어 도는 것도 수행이다.
서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며칠 되지 않았다. 서있을 때 아무 생각없이 서 있다면 번뇌가 일어날 것이다. 마음은 늘 대상으로 향하고 있고,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때 마음을 묶어 두어야 한다. 몸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이다.
서있는 수행은 어쩌면 좌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왜 그런가? 눈을 감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는 것이 좌선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신체 전 부위를 스캔 하는 것이다. 서 있으면서도 복부의 움직임 등 몸관찰하는 것이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마하시방식이다.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풍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사대는 물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몸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선(住禪), 즉 서있는 수행에서도 몸관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는 상태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것이다. 이른바 ‘몸스캔’하는 것이다.
몸스캔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어쩌면 나만의 방식인지 모른다. 전신을 모두 스캔할 수 없으므로 중요부위 여섯 군데만 대상으로 한다. 눈, 코, 입, 배, 무릎, 발바닥을 말한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감각대상에 가 있기 쉽다. 어느 곳에나 갈 수 있고 어느 곳에나 내려 앉을 수 있는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서 있을 때 마음을 눈, 코, 입, 배, 무릎, 발바닥에 두면 마음은 도망가지 않는다.
행선을 하면서 발견한 것이 많다. 서 있을 때도 명칭 붙여 새기는 것이다. 마음을 눈에 두었을 때 “눈, 눈, 눈”하며 감은 눈의 촉촉함을 본다. 본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다.
마음을 코로 가고자 할 때는 “코, 코, 코”라며 명칭 붙인다. 그렇다고 코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코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는 빤냣띠(개념)이 되어 버려서 실재를 볼 수 없다. 실재를 보려면 코에서 나오는 바람을 보아야 한다.
마음을 배로 가고자 할 때는 “배, 배, 배”하며 명칭 붙인다. 배에서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한다. 이럴 때는 사실상 좌선하는 것과 같다. 마하시 방식에서는 좌선할 때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더 내린다. 마음을 무릎으로 가지고 가고자 할 때는 “무릎, 무릎, 무릎”이라고 명칭 붙인다. 그리고 장딴지 등 뻣뻣함을 새긴다.
마음을 끌고 다닐 수 있다. 마침내 바닥에 이른다. 발바닥 감촉을 느끼고자 할 때는 “발바닥, 발바닥, 발바닥”하며 명칭 붙이는 것이다. 발바닥에서 오는 차가움과 딱딱함을 새긴다.
서 있을 때 여섯 단계로 명칭 붙이는 것은 내가 해 본 것이다. 서 있을 때 멍하니 서 있으면 생각이 치고 들어 오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하는지 알 수 없다.
방향을 바꿀 때는
도는 것도 수행이다. 방향을 바꾸는 것도 수행인 것이다. 어떻게 바꾸는가? 발을 세 번에 걸쳐서 돌린다. 이때 의도를 알아차려야 한다. 발을 돌리려는 의도를 새기고 난 다음 움직임을 새기는 것이다.
방향을 바꿀 때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된다. 이는 자세를 바꿀 때도 마찬가지이다. 좌선할 때 다리가 저릴 때 자세를 바꿀 수밖에 없다. 이때 자세를 바꾸는 동작을 새겨야 한다. 마찬가지로 행선할 때 방향전환 역시 전과정을 새겨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급하게 해서는 안된다. 선원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큰 허물이다. 새김을 유지하면 뛰어 다닐 수 없다. 그래서 허리아픈 환자처럼 천천히 움직이라고 말한다. 방향전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을 특징 짓는 상호가 있다. 32상 80종호를 말한다. 그런데 80종호 중에 방향전환에 대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 볼 때 마치 코끼리가 방향전환하는 것처럼 움직이라는 것이다. 이를 행선에서 돌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수행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뛰어서는 안된다. 수행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획”하고 돌면 안된다. 마치 코끼리가 걷는 것처럼, 코끼리가 방향전환하는 것처럼 천천히 해야 한다. 방향전환하는 것도 수행이다.
행선할 때 노트하는데
행선할 때는 노트를 옆에 두고 있다. 행선하면서 떠 오른 생각을 필기하기 위한 것이다. 좌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행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행선에서는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필기하는 것도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만 멈추어 있다면 가능하지 않다. 행선하는 방법에 대하여 써 놓는다. 오늘 아침 노트해 놓은 것을 보니 무려 여덟 페이지에 달했다.
사람들은 자신들마다 사는 방식이 있다. 이에 대하여 자신들만의 사는 재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행선할 때 자신만의 방식을 찾을 수 있다. 행선하면서 체험하고 느낀 것에 대하여 기록해 두는 것이다. 다음에 써먹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행선할 때 노트한 것은 머리 속에 있다. 이를 글로 표현하고자 한다. 자신만의 행선방식이다. 그렇다고 마하시 방식의 행선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행선을 좀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사마타보다 더 어려운 위빠사나
행선을 할 때 잊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명색을 새기는 것이다. 이것이 빠지면 행선은 하나마나하는 것이 된다. 몸풀기나 다리 힘을 기르기 위한 운동이 될 것이다.
걷는 것이 수행이 되려면 명색을 새겨야 한다. 정신과 물질과정을 새기는 것이다. 어떻게 새기는가? 발을 들 때는 드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기 때문에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발을 들 때 드는 것을 아는데 이는 정신적 현상이기 때문에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발을 들 때 물질따로 정신따로 새기는 것이다.
명색을 따로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런데 명색을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고도로 집중해야 한다. 어쩌면 사마타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위빠사나수행하다 피곤하면
사마타수행은 하나의 개념에 집중한다. 개념은 생멸이 없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변화하는 대상을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정신적 과정과 물질적 과정을 구분해서 따로따로 새겨야 한다. 위빠사나가 사마타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이유에 해당된다.
어떤 수행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빠사나 하다가 피곤하면 선정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하다가 피곤하면 그만 두고 일상으로 돌아와 쉬는 것이 아니라 선정에 들어가 쉼을 말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놀랐다.
위빠사나가 얼마나 하기 힘들길래 선정에 들어가 쉰다고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마하시 사야도의 논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이는 “그렇게 드러나는 대로 따라서 관찰하다가 몸과 마음이 피곤할 때 선정에 다시 입정할 수 있습니다. 피곤이 풀리면 드러나는 물질-정신을 따라서 다시 관찰하면 됩니다.” (담마짝까법문, 213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정에 드는 것은 쉼터와 같은 역할이 된다.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는 순수위빠사나에 해당된다. 선정수행을 닦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순수위빠사나 수행자가 변화하는 대상을 관찰하다가 피곤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선정이 없는 이들의 경우는 닿음, 생각함, 들음, 봄 등 드러나는 혼합된 형성들만을 끊임없이 따라서 관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들을 끊임 없이 따라서 관찰하다 피곤해지면 선정이 없기 때문에 선정에 입정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익숙하게 실천해 놓은 부품과 꺼짐 등 관찰하던 원래 대상으로 돌아와서 관찰해야 합니다. (담마짝까법문, 215쪽)라고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주관찰대상이 쉼터인 것이다.
행선은 좌선과 일상선의 중간과정
행선을 하면서 끊임 없이 새겼다. 여기서 새긴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명색을 새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여기서 후자는 나의 주장이다. 왜 그런가?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도 싸띠(새김)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행선 중에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명색을 새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필기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진정한 행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행선을 잘하기 위한 과정이다. 행선하면서 발견한 방법을 써 놓기 위한 것이다. 나중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행선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행선은 좌선과 일상수행의 중간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빤냐완따 스님이 ‘경행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새삼 이렇게 떠올리게 된 것은 행선을 일상으로까지 가져 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행선을 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 경전에서는 행선하는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긴 여행을 견디게 하고, 정근을 견디게 하고, 건강해지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을 완전히 소화시키고,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A5.29)라고 했다. 여기서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부처님은 경행에 대하여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인가? 주석에 따르면 “앉으면, 서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누우면, 앉아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경행하면,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즉,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마디로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에 가져갈 수 있음을 말한다.
좌선하기 전에 반드시 행선을 한다. 이는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고스란히 좌선에 가져 가기 위함이다. 이렇게 했을 때 힘들지 않고 삼매가 형성된다. 그런데 오늘 아침 행선을 하면서 또 하나 행선공덕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것은 “행선이 일상에서의 새김을 유지시켜 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일상으로
어제 담마와나선원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 우안거 해제법회가 있었다. 빤냐와로 스님을 비롯하여 아홉 분의 상가스님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빤냐와로 스님은 해제법문을 했는데 말미에 “살아 있는 동안 싸띠를 놓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빤냐와로 스님이 법문하면 늘 하는 말이 있다. 한시도 싸띠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좌선이나 행선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늘 싸띠를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이 말을 듣고서 행선을 떠 올려 보았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앟는다. 좌선에서 형성된 선정을 행선이나 일상으로 가져갈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주석에서 “앉으면, 서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Mrp.III.23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정은 좌선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일상에서도 새김(sati)이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아침 생각한 것은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가듯이, 마찬가지로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일상으로 가져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일상에서도 늘 새김이 유지될 것이다.
사마타가 쉬울까 위빠사나가 쉬울까? 어떤 이는 선정삼매에 들기 어렵기 때문에 사마타가 더 어렵다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어렵기는 위빠사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는 행선에서 형성되는 삼매, 즉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찰나삼매가 선정삼매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왜 그럴까? 주석에서는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했다. 한번 행선삼매가 형성되면 꽤 오래간다고 한다. 이를 일상에 적용한다면 일상에서도 늘 새김(sati)이 있게 될 것이다.
올해 재가우안거를 하면서 최대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도 새김이 유지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김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단지 언어적 개념을 차단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이다. 음악도 듣지 않는 것이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고 일체 감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일상에서 새김이 유지될까? 그러나 이런 것은 일상새김을 위한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늘 싸띠(새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행선에서 형성된 찰나삼매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수행체험한 것을 떠올리는 것도 싸띠(새김)
행선을 하면서 이런 실험 저런 실험을 한다. 느낀 것을 노트에 필기해 둔다. 잠시 행선을 중단하고 행선대 바로 옆에 있는 노트에 기록해 두는 것이다. 이는 행선을 잘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또 하나는 일상새김을 잘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시간 되면 이런 과정은 사라질 것이다.
오늘 아침 행선을 한시간 반을 했다. 좌선도 생략하고 행선에 올인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집중이 이루어진 것 같다. 행선한지 한시간이 지났을 때 평소와 다른 상태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행선은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마치 정신과 몸이 분리 되는 것 같았다. 정신따로 몸따로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행선할 때 마치 제3자가 걷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걷는 운동성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체험은 처음 있는 일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경험한 것은 오래간다. 수행에서 체험한 것도 오래간다. 그런데 수행체험한 것에 대하여 떠올리는 것도 싸띠(새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싸띠에 대하여 1)명색(정신과 물질) 과정을 따로따로 새기는 것도 싸띠이고, 2)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도 싸띠이고, 3)수행에서 체험한 것을 떠올리는 것도 싸띠라고 본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싸띠에 대한 수행용어는 ‘새김’이 적당하다. 반면에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부적당하다. 가르침을 새기는 것은 맞지만 가르침을 마음챙김한다는 말은 맞지 않은 것이다. 싸띠의 제1의 의미는 기억인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에는 기억의 뜻이 없는 것이 큰 이유이다.
나라는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새기면
행선한지 한시간 되었을 때 행선이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눈을 뜬 상태에서 전방 3-4미터 앞을 본 상태로 움직였다. 마치 좌선에서 통증을 지켜 보듯이 발의 움직임을 지켜 보았다.
위빠사나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이는 개념을 보는 수행이 아님을 말한다.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발의 움직임만 있었다. 좌선할 때 다리저림이라는 통증을 마치 남의 다리 지켜보듯이, 발의 움직임을 무심히 지켜 보았다.
위빠사나수행의 핵심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좌선이나 행선하는 것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 몸과 마음을 정신과 물질의 과정으로 새기는 것이다. 어떻게 새기는가? 구분해서 새겨야 한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무엇이 남을까? 물리학자는 원자를 말한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를 더 나누면 무엇이 나올까? 양자론에 따르면 텅 빈 것만 있다고 말한다. 위빠사나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은 대상을 분리해서 관찰하는 수행이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하는 것도 분리해서 관찰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집착된 무더기를 먼저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새겨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볼 때 부품이라는 물질을 새기고, 부품이라고 아는 정신을 새긴다. 발을 들 때 들려진 물질을 새기고, 들려진 것을 아는 마음을 새겨야 한다. 이렇게 집착된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새기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나는 없게 된다. 나라는 존재가 해체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언어적 명칭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오늘 아침 행선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분리 된 것 같았다. 마치 제3자가 걸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물질 걸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로보트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은 차분했다. 마음은 평온했다. 오로지 정신과 물질의 과정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체험은 처음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
대념처경을 보면 이런 서두에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오늘 새벽 일어났을 때 이 말이 사무쳤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슬플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 시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시를 보면 거의 대부분 슬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시인은 왜 슬픔을 노래할까? 아마 슬픈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슬퍼하는 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감성과는 다르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슬픔은 있을지 몰라도 슬퍼하는 자는 있을 수 없다.
수타니파타에 ‘화살의 경’(Sn3.8)이 있다. 이 경은 슬픔에 대한 게송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읽어 보면 슬픔을 극복하는 게송이다. 어떻게 극복하는가? 이는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뿐입니다.”(Stn.584)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 걱정이 태산 같은 사람이 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을 없애 버린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Stn.583)라고 했다.
현명한 자는 걱정도 없고 슬픔도 없다. 걱정을 걱정으로 제거하고, 슬픔을 슬픔으로 제거하는 일은 없다. 만일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현명한 자는 왜 걱정하는 자도 아니고 슬퍼하는 자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나라는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했기 때문이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텅 빈 것처럼 된다. 나라는 집착된 무더기를 나누고 또 나누어서 관찰했더니 나라는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없으니 걱정과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슬픔과 비탄,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는 위빠사나
부처님의 여제자 가운데 난다마따가 있다. 난다마따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 그것도 살해당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난다마따에게 동요는 없었다. 이에 경에서는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라고 되어 있다.
난다마따는 왜 마음의 동요가 없었을까? 비정한 엄마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아나함의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있어도 슬퍼하는 자는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슬픔과 비탄,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한다. 이는 대념처경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나라고 여기는 집착된 무더기를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겼을 때 더 이상 나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정신과 물질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오늘 행선에서 경험한 것이다.
슬픔은 있지만 슬퍼하는 자는 없다고 하지만 궁극적 의미로는 슬픔도 없다. 오로지 명색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끝없는 명색의 과정이다. 그런데 명색의 과정은 이전 명색의 과정을 원인으로 한다는 것이다.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조건발생하는 명색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강물은 똑같아 보여도 같은 강물은 아니다. 한번 흘러가고 나면 그만이다. 명색도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건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명색은 항상 쌍으로 있기 때문에 명색은 동시에 발생해서 동시에 사라진다.
행선할 때 의도는 원인이 된다. 발을 드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의도가 있고 나서 명색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런 의도는 명색에서 정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명색이 원인이 되어 명색을 조건으로 새로운 명색이 생겨나는 것이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이때 배의 부품이나 꺼짐은 원인이 된다. 어떤 인과관계인가? 배가 부풀 때 배가 원인이 된다. 이는 의도가 원인이 되는 것과 다르다. 물질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몸의 신진대사작용하는 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나의 의도와 무관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배라는 물질이 원인이 된다. 이를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각주에서는 동격수식과 피수식어로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배라는 단어와 원인이라는 단어가 같은 동격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동격이고, 배가 원인이라는 단어를 수식하기 때문에 수식와 피수식어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의도가 업이라고 했다. 의도를 내는 것을 업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업을 지으면 이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배라는 원인이라는 구절에서처럼 동격의 수식어와 피수식어관계기 된다. 이런 것은 행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을 들려는 것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의도는 원인이 되고 드는 것은 결과가 된다. 업을 조건으로 다발을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 생겨나는 생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다섯 가지 법들이 이전 생에서 행했던 업을 조건으로 하여, 즉 업이라는 조건 때문에 생겨난 결과법들이다.”(무애해도 Ps.50,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57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의도 내는 것에 대하여 ‘내가낸다’고 하여 존재론적으로 볼 수 있다. 의도를 내는 것은 내가 내는 것이 아니다. 명색이 내는 것이다. 명색의 정신에서 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과관계는 명색을 원인으로 명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명색을 관찰하면 나, 너, 중생, 창조주와 같은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언어적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슬퍼한다’고 말한다. 본래 없는 나, 본래 있지도 않은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슬픔은 있어도 슬퍼하는 자는 없다
내가 있으면 슬프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슬퍼할 것이 없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은 내가 없음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선불교와 정반대이다.
선불교에서는 본래 나를 찾는다. 또는 본래 부처를 찾는다. 나는 이미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깨달은 존재, 본래 나를 찾아 가는 여정이 수행인 것이다.
사람들은 나가 있다고 본다. 또한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토끼에게 뿔이 있을까? 토끼뿔은 어떠한 모습일까?”(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48쪽)라며 의문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고 또한 명색을 원인으로 조건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당연히 슬퍼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 내가 없으니 슬픔은 있어도 슬퍼하는 자는 없는 것이 된다.
2024-10-14
담마다사 이병욱
'담마와나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빤냐와로바라기가 되어 (4) | 2024.10.15 |
---|---|
저녁 한끼 안 먹었다고 해서 (4) | 2024.09.02 |
일주일에 한번은 비워주는 것도, 일요포살날 오후금식하기 (11) | 2024.08.05 |
한국테라와다불교 2024년 우안거 입재법회 (5) | 2024.07.16 |
오늘 하루는 출가수행자처럼, 담마와나선원 2024년 붓다의 날 (3) | 2024.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