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권당

155권 진흙속의연꽃 2024 I

담마다사 이병욱 2026. 1. 13. 19:15

 

155권 진흙속의연꽃 2024 I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음의 문만 열어 놓았다. 그러나 귀의 문은 닫을 수 없다. 창 밖에 차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럼에도 집중된 마음에 영향주지 못한다.

 

명상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지나치게 흥분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쳐져 있어도 역시 집중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고요가 찾아 온다.

 

백권당에 공사가 시작된다. 에어컨 설치공사를 말한다. 오피스텔이 낡아서 더 이상 중앙냉방장치가 가동되지 않는다. 개별냉방을 해야 한다. 시스템에어콘을 설치하기로 했다. 겨울에는 난방도 되는 것이다.

 

창측에 실외기를 설치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한다. 탁자와 화분을 명상공간으로 옮겼다. 마치 사무실이 피난민촌이 된 것처럼 어수선하다. 이런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식물은 때 되면 꽃이 핀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명상하는 것은 꽃 피우기 위한 것이다. 환경이 열악해도 눈만 감으면 그만이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자신만 아는 세계를 말한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도를 닦으면 과를 이루어야 한다. 눈 감고 앉아 있는다고 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배운 대로 행해야 한다. 나의 스승은 마하시 사야도이다. 사야도가 남긴 법문집을 스승으로 삼아 정진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목숨 걸고 해야 한다. 죽을 각오로 임하면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없을 것이다. 명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로나 나의 명상은 이제까지 절박하지 않았다. 단지 의무적으로 매일 아침 삼십분 앉아 있는 것으로 그쳤다.

 

오늘 아침에도 삼십분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비장한 각오를 했다.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 고요와 평화가 찾아 왔다. 창 밖에 차 지나가는 소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나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을까? 백권당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 오년 앉아 있지만 진척은 없다. 그럼에도 의무적으로 앉아 있는다. 앉아 있다 보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그러나 절박감 없는 명상은 매일 그 모양이다.

 

삼십분명상이 끝나면 글을 쓴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 글을 쓰면 자동기술하는 것 같다. 외부 요인에 영향 받지 않아서 쓰고 싶은 것을 쓴다. 미리 머리 속에 준비해 둔 것이다.

 

오늘은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작년 썼던 글을 모아 놓은 파일이 있다.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책만들기 작업을 하기로 했다.

 

책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이미 써 놓은 글을 한데 모아서 목차를 만들고 서문을 작성하면 그만이다. 가장 힘들고 지루한 작업은 사진을 배열하는 것이다. 사이즈를 줄여서 적당한 위치에 넣어야 한다. 사진편집작업은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린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있다. 책만들기는 서문을 씀으로써 완성된다. 이렇게 서문이 완성되면 피디에프(pdf)파일을 만든다. 블로그에 올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종이책으로 두 권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 책만들기 할 것에 대한 파일을 열어 보았다. 이미 만들어진 목차를 보니 나의 과거를 보는 것 같다. 작년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이에 기쁨이 일어났다.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하루에 하루가 지나가다 보면 달이 가고 해가 간다. 나는 잘 살았는가? 나의 삶은 헛되지 않았는가?

 

매일매일 기록을 하고 있다. 하루 일과 가운데 오전은 글 쓰는 시간이다. 이렇게 글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탑을 이루었다. 이를 금자탑(金字塔)이라고 칭한다면 나의 자만일 것이다.

 

금자탑을 만들고 싶었다. 이왕 쓰는 글 후대에 길이 남는 글을 쓰고 싶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 싶었다. 2006년 이후 이제까지 이렇게 써왔다. 이런 사실을 회상하자 마음은 충만해졌다.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바란다. 마치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이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것과 같다. 지난날을 되돌아 보았을 때 기쁨이 일어났다면 헛된 삶은 아닐 것이다.

 

작년 2024년 상반기 때 일상에 대한 쓴 글을 모았다. 목차를 보니 모두 마흔네 개의 글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마치 자식 같은 글이다. B5사이즈에 폰트사이즈는 11이고 405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자신을 속이지 않는 부끄러움 없는 한해가 되고자

2. 개인사업과 사회사업을 동시에

3. 끊어짐을 볼 수 있어야 열반에

4. 방탄복 같은 외투를 선물 받았는데

5. 먼저 본 사람이 휴지 줍는 플로깅라이프

6. 생일선물로 받은 돈봉투

7. 성도절날에 미역국을 먹고

8. 보기 싫은 사람, 나를 무시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을 대하는 방법

9. 극단적 미니멀라이프의 실천

10. 세 번의 실수 끝에 방향을 잡았으니

11. 임종순간에 “껄껄껄”하는 것보다 호흡을 지켜 보며 평온한 마음을

12. 남의 업(業)에 개입하면 미쳐버린다

13. 나는 언제나 직장 꿈을 꾸지 않을까?

14. 왜 자신을 섬으로 해야 하는가?

15. 무불상시대의 남인도 특별전

16. 절에서 음력보름날은 아무 날도 아닌 것일까?

17. 나의 무지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18. 유통기한의 그날까지

19. 한량없는 숭고한 마음이 있는데

20. 절망의 나날에서 희망을

21. 어떻게 적극적 공리주의를 실천할 것인가

22.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 만년필

23. 삶이 지겨울 때 여덟 가지 윤회의 고통을

24. 보시통장을 만들고자

25. 죽을 것처럼 절망스러운 나날일지라도

26. 백권당 가는 길에 청둥오리를

27. 뿌리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28.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할 때

29. 생일날 손카드 건네기

30. 형성의 그침이 행복

31. 자기연민에 빠졌을 때

32.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33. 그럼에도 행복하게 살아야죠

34. 화사한 벚꽃에서 찬란한 슬픔을

35. “차 맛 어때?”라는 말이 절로, 2024년 서울국제불교박람회

36. 진실선언으로 장애와 고난에서 벗어나기

37. 개처럼 살지 않고자

38. 명학공원과 쌍개울 봄마중

39. 보시전용통장을 만들고

40.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읽기 시동을 걸고

41. 두려울 것이 없는 무아(無我)

42. 저 강아지들을 어이할꼬?

43. 오토바이 폭탄음

44. 망해암 낙조바위

 

 

 

 

이것은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매일 오전에 쓴 것이다. 명상을 하고 나서 썼다. 나중에 책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이제 시절인연이 되어서 한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책 제목은 ‘155 진흙속의연꽃 2024 I’이다. 이는 155번째 책으로 2024년 1월 1일부터 5월 3일까지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쓴 글이다.

 

작년 새해가 시작되었을 때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에 대하여 목차 1번항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부끄러움 없는 한해가 되고자’(2024-01-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어떤 것인가?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움 없는 한해가 되고자 한 것이다.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있다면 축생과 구별된다. 이 두 가지가 무너지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부끄러움 없이 살아 왔는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많다.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청정한 삶을 살까?

 

오늘 책만들기 하면서 목차를 보자 법구경에서 읽었던 인연담이 생각났다. 그러나 찾기 힘들다. 수백개나 되는 인연담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때 테라가타가 떠올랐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집을 떠나 출가한지 나는

이십오 년이 되었으나,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큼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Thag.405)

 

“심일경성을 얻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탐욕으로 괴로워하며

팔을 움켜잡고 울면서

정사(精舍)를 박차고 나왔다.”(Thag.406)

 

“차라리 칼을 들어 자결해 버릴까?

목숨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랴?

학습계율을 포기하고,

어떻게 나와 같은 자가 죽을 수 있을까?”(Thag.407)

 

“그때 나는 삭도(削刀)를 들고

침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목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서

삭도를 가져다 그 곳에 대었다.”(Thag.408)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해졌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409)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Thag.410)

 

 

장로는 자결하고자 했다. 출가한지 이십오 년이 되었건만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목에 칼을 대었을 때 깨달았다.

 

장로가 목에 칼을 대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테라가타 각주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법구경 인연담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빠알리어 삽빠다싸(sappadasa)와 테라(thera)를 키워드로 구글검색했다. 법구경 인연담을 찾기 위한 것이다. 법구경 112번 게송에 다음과 같은 ‘삽빠다싸와 관련된 이야기(Sappadāsattheravatthu)’가 있다.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장로 씹빠다싸와 관련된 이야기(Sappadāsattheravatthu)이다.

 

싸밧티 시의 한 훌륭한 가문의 아들 쌉빠다싸(Sappadāsa)는 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승단에 들어가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승려생활에 불만족하여 스스로 ‘나와 같은 젊은이에게 재가의 생활은 맞지 않아 출가했지만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살할 방도를 강구했다. 어느 날 수행승들이 아침 공양을 하러 나갔다가 큰 방에 뱀이 있는 것을 보고 단지에 넣어 뚜경을 닫고 그것을 승원 밖으로 옮겼다. 그는 뱀을 놓아주려는 것을 알고 자신이 놓아 주겠다고 하면서 단지를 가져와 한 장소에 놓고 자신의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뱀은 그의 손을 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독사뱀이 아니고 집뱀이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 뱀은 독사뱀이었고 전생에 그의 하인이었으므로 주인을 알아보고 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불만족한 수행승은 승원에서 이발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면도칼을 가지고 승원으로 들어가서 하나는 마루에 놓고 하나로는 수행 승들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리고 마루에 놓인 면도날을 치우려는 순간 ‘이 면도칼로 내목을 자르고 죽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나무로 가서 나무가지에 목을 기대고 면도 날을 숨통을 자르는 순간 자신이 구족계를 받고 오점없는 달이나 투명한 보석처럼 흠없는 청정한 사람인 것을 회상하며 온몸에 환희의 전율이 가득 차는 것을 느끼고 그 느낌을 극복하고 통찰을 계발하여 네 가지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그는 면도칼을 거두었다. 나중에 그는 수행승들에게 ‘나는 면도칼로 숨통을 끊는 대신에 지혜의 면도칼로 일체의 번뇌를 끊었다.’라고 말했다. 수행승들은 그가 죽으려고 면도칼로 숨통을 끊으려는 순간에 거룩한 경지를 성취한 것에 대하여 의아해하자 부처 님께서는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수행승은 땅위로 발을 들거나 땅에 발을 내려놓거나 발이 땅에 닿기 전의 순간에 거룩한 길에 도달할 수 있다. 게으른 사람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한 순간을 사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게으르고 정진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정진하고 견고하게 노력 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DhpA. II. 256-260)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서는 자결장면이 종종 발견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초기경전은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전승된 것이다. 자살과 같은 불리한 것을 감추지 않았다. 초기경전은 진실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로는 자결 순간에 깨달았다. 시초는 자신의 계행에 대한 것이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파노라마쳤을 때 자신의 계행이 깨끗한 것을 안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흠없는 청정한 사람인 것을 회상하며 온몸에 환희의 전율이 가득 차”(DhpA. II. 256-260)라고 표현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완성은 계, 정, 혜 삼학을 닦아 완성된다. 가장 기본은 계학이다. 장로는 구족계를 받은 이래 한번도 계행을 어겨 본 적이 없다. 목에 칼을 그었을 때 자신의 계행이 청정한 것을 알고 기쁨과 환희가 일어났던 것이다.

 

정학과 혜학은 계학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 계행이 청정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는 진행되지 않는다. 장로는 자신의 계행이 청정한 것을 알고서 통찰이 일어났다. 인연담에서는 “그 느낌을 극복하고 통찰을 계발하여 네 가지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DhpA. II. 256-260)라고 표현되어 있다.

 

장로는 순식간에 깨달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수행승들은 의심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수행승은 땅위로 발을 들거나 땅에 발을 내려놓거나 발이 땅에 닿기 전의 순간에 거룩한 길에 도달할 수 있다.”(DhpA. II. 256-260)라고 인정해 주었다.

 

열반에 대한 환상이 있다. 열반은 깊은 잠을 잔 것처럼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한참 후에 깨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순간적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하지만 형성들이 사라진 성품을 직접 경험하여 실현하는 그 순간은 길지 않다. 단 한번 새겨 아는 기간 정도로 매우 순간적이다.”(2권, 107쪽)라고 설명해 놓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열반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이는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 하셨고 논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인연담을 보면 설법을 듣고 깨달았다는 내용이 많다. 이는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어떻게 사구게 하나만 듣고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하지만 게송을 듣고 도와 과에 이르렀다고는 해도 몸 느낌 마음. 법 중의 어느 한 법이라도 고찰하지 않고서는, 관찰하고 새기지 않고서는 통찰지수행(paññābhāvana)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DA.ii.339)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념처경 주석에 있는 내용이다.

 

게송만 듣고서도 깨닫는 자가 있다. 이를 ‘약설지자(略說知者)’라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를 갖춘 자를 말한다. 전생에 수행자로 산 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삼장에서는 칠세 아라한이야기로 설명되어 있다. 자의식이 생기고 언어적 이해가 되었을 때 사구게를 듣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약설지자(ugghaitaññū) 는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 자를 말한다. 상세한 설명으로 아는 자를 상설지자(vipañcitaññū) 라고 한다. 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를 제도가능자(neyya) 라고 한다. 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를 제도불가능자 (padaparama) 라고 한다. 이렇게 네 종류의 수행자가 있다.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이 설법할 때 깨닫는 자가 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단지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위빳사나수행방법론 2권, 108쪽)라고 말했다. 주석서 대로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이 있는가? 이에 대하여 “법문을 들으면서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고 새기며 위빳사나 지혜, 도와 과의 지혜가 차례로 생겨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었다고 알아야 한다.”(2권, 108쪽)라고 말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수행방법론을 접하고서 수행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그것은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 대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을 접한 것은 삼년 되었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이 주어서 읽게 되었다. 나의 위빠사나수행은 이 논서의 전과 후로 갈린다. 이전에는 막연하게 알았으나 이후에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명색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은 위빠사나수행의 시작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행선할 때도 좌선할 때도 명색을 구분하여 새기고자 했다. 더 나아가 일상에서도 적용해 보고자 했다. 소리가 났을 때, 소리를 물질이라고 새기고 동시에 들음을 정신이라고 구분해서 새기는 식을 말한다.

 

세상에 수많은 수행방법이 있다. 위빠사나에 대한 것도 많다. 그들의 말이나 글을 유심히 본다. 이때 하나의 기준이 적용된다. 그것은 마하시 사야도의 ‘명색구분새김’을 적용해 보는 것이다. 이 기준에 맞으면 제대로 하는 것이고 맞지 않으면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자만일 것이다.

 

삽빠다사 장로는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목에 칼을 그은 순간 자신의 계행이 청정함을 알았다. 이후 순식간에 통찰이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장로는 “나는 면도칼로 숨통을 끊는 대신에 지혜의 면도칼로 일체의 번뇌를 끊었다.”(DhpA. II. 256-260)라고 말했다.

 

지혜는 면도날과 같은 것이다.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번뇌를 단번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전생부터 수행자였던 사람이 가능하다.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으로 결생한 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를 갖추었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 이런 게송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체의 자신의 상속 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야 한다. 길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나고, 경지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난 자가 되어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받을 만한 님이 된다.”(Vism.1.7)

 

 

오늘 책 한권 만들었다. 생애통산 155번째 책이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다.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블로그 백권당 카테고리에 올려 놓으면 그만이다. 인연 있는 사람이 다운 받아갈 것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한권의 책을 만들게 되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나의 삶은 헛되지 않았는가?

 

 

2025-06-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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