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권 진흙속의연꽃 2024 II
오늘 아침 삼십분 좌선에서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은 “삶은 절망이다.”라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절망의 기록’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매일매일 글쓰기 하는 것을 말한다.
하루 일과 가운데 오전은 가장 청정하다. 세상사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체 뉴스를 보지 않은 것이 크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허용된다.
어제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을 살펴본다. 평소와 다르게 정치적 글을 쓰면 공감추천이 적다. 그러거나 말거나 쓰고 싶은 것을 쓴다. 거리낄 것이 없다. 글로 이익 볼 것도 없고 손해 볼 것도 없다.
글은 마음이 맑을 때 쓴다. 오전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그것도 이른 아침에 쓴다. 몇 해 전에는 백권당에 오자마자 글을 썼다.
걸어 오면서 좋은 생각이 나면 메모해 둔다. 마음속에 씨나리오를 만든다. 자판을 치기만 하면 된다. 요즘에는 삼십분 명상한 다음에 쓴다.
글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글 쓰는 것도 구업이다. 글을 말하듯이 내뱉었을 때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마음 속에 생각해 둔 것을 쓴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 메모앱에는 쓸 거리에 대한 키워드가 가득하다. 백권당에 도착해서는 노트에 메모해 둔다. 연필로 메모해 놓은 것이 가득하다.
쓰고 싶은 것을 다 쓰지 못한다. 메모한 것 가운데 일부만 채택된다. 자판 치는 대로 쓴다. 그러다 보면 엉뚱한 길로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쓰고 나면 “참 잘 썼다.”라며 스스로 만족해 한다.
글은 자신의 얼굴과도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글은 자신의 인격과도 같은 것이다. 한번도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그 사람이 남긴 흔적으로밖에 판단이 되지 않는다. 글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오늘 아침 좌선 중에 “삶은 절망이다.”라는 말이 크게 다가 왔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경전적 지식에 따른다.
상윳따니까야에 ‘십이연기분석경’이 있다. 부처님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여기서 ‘절망’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부처님은 왜 태어남에 대하여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고 했을까? 이 말을 한단어로 말한다면 ‘괴로움’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던진 말이 있다. 그것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생, 노, 병, 사 사고와 여기에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를 합하여 팔고를 말했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할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할 때 처음부터 “이것이 행복이다.”라 하여 낙성제(樂聖諦)를 설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충격요법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아름다울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이 바뀌면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즐거운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이다. 결국 괴로운 느낌으로 귀결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 (yaṃ kiñci vedanīyaṃ taṃ dukkhasmiṃ)”(S36.11)라고 말씀 하셨다.
어떠한 느낌도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한 느낌일 뿐이다. 특히 감각적 행복에 대한 것이 그렇다. 조건이 바뀌면 어떤 느낌이 될지 모른다.
행복한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이다. 이런 것도 괴로움이다. 더욱더 미세한 괴로움도 있다. 어떤 것인가?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행고성(行苦性: saṅkhāradukkhata)이다.
행고성은 미세한 것이다. 수행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고고성과 괴고성까지만 알 수 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이라는 고통 그 자체라면 이는 고고성이다. 즐거운 느낌에서 괴로운 느낌으로 변하거나, 계절무상 또는 인생무상을 느낀다면 이는 무너지는 괴로움에 해당되기 때문 괴고성이 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존재자체가 괴로움이라는 행고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기불교를 접하고 가장 감명 받은 말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문구이다. 이 가운데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있는데 이 말은 빠알리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a)’라는 복합어를 번역한 말이다.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a)는 ‘soka+parideva+dukkha+domanassa+upāyāsa’의 복합어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영역했을까? 이는 ‘sorrow, lamentation, pain, displeasure, and despair’ 라고 번역해 놓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despair’ 는 절망의 뜻이다.
삶의 끝은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절망이다. 이는 부처님이 복합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우빠야사(upāyāsa)를 집어 넣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빠야사는 어떤 말일까?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면 ‘tribulation; grief’라고 설명되어 있다. 재난, 고난, 시련의 뜻이다. 또한 깊은 슬픔의 뜻이다. 그렇다면 청정도론에서는 어떻게 설명해 놓았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절망’이라는 것은 친지를 잃은 자 등이 경험하는 극심한 정신적 괴로움에서 생겨난 기분이다. 어떤 자들은 형성의 다발에 포함되는 하나의 사실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마음의 연소를 특징으로 삼고, 신음을 기능으로 삼고, 초췌를 현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형성적 괴로움인 까닭에, 또한 정신을 불태우고 신체를 초췌하게 하는 까닭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Vism.16.52)
절망에 대하여 친지를 잃은 것 같은 괴로움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을 불태우는 것과 신체를 초췌하게 하는 것으로 절망은 극도의 괴로움을 낳으니 괴로움이라 불리는 것이다.”(Vism.16.52)라는 게송으로 강조해 놓았다.
절망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운명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나 죽는다. 지금 잘난 사람, 지금 지위가 있는 사람, 지금 명예가 있는 사람도 죽음으로 끝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삶은 절망적이다.
절망은 희망이 없는 상태이다.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주어진 운명에 저항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운명적 파탄에 직면했을 때 절망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도 절망적이다.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글쓰기가 탄력을 받았다. 대승불교를 접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것은 아마도 현재 나의 삶과 관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삶에 대입해 본다. 이럴 경우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일까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이 가운데에서도 절망이라는 말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 삼십분 좌선하면서 절망의 기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는 삶이 절망임을 말한다. 매일 절망적 삶을 살면서 쓴 글에 대하여 절망의 기록이라고 본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말했다. 이는 부처님이 절망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은 절망인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진리를 설할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먼저 던진 것과 같은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 현실직시의 가르침도 있다. 현실을 제대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성제의 진리를 설할 때 가장 먼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던졌다. 이 말은 “이것이 삶의 절망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충격요법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은 절망이다. 삶을 살면서 절절히 느낀다. 이렇게 본다면 매일 아침 글을 쓰는 것은 절망의 기록이 된다.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절망의 기록임을 말한다.
책을 하나 만들었다. 2024년 하반기 삶의 기록이다. 절망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156 진흙속의연꽃 2024 II’라고 이름 붙였다. 156번째 책으로 2024년 5월부터 12월까지 7개월간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모두 47개의 글이 실려 있고 488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신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2. 빈자일등(貧者一燈) 정신으로
3. 폐기물 수거장에서 취득한 오단책장
4. 종로는 외국인 이주민노동자들의 해방구, 2024년 우중의 연등축제
5. 매번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중생의 삶
6. 김동수 열사는 지장보살의 화현
7. 세상에 무지한 스님들이 너무 많아
8.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용기
9. 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
10. 매혹적 대상에 갈애를 일으켰을 때
11. 평범한 자의 비범한 일상
12. 나도 발간사를 쓸 수 있을까?
13. 명학공원 산책하기
14. 방향도 목적도 없는 삶은
15. 나는 언제나 어른이 될 수 있을까?
16. 당고개역 가는 길에
17. 사는데 이유가 있나요?
18.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회원이 되기로
19.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20.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21.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멀리 떠나고자
22. 보시는 손해 보는 장사인가 남는 장사인가?
23. 길거리 노점트럭에서 양말구입하기
24. 명상이 일상이 되고자
25. 세상에 미오기전도 있지만 여기 병우기전도
26. 노년에 근(筋)테크 하라는데
27. 진흙속의연꽃 블로그와 함께 살아온 19년
28. 이십 년 후 정상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29. 그게 뭐였더라? 좋은 생각이 났었는데
30. 비급이 살아가는 방식
31. 음식에 적당량을 알고 음식절제 하는 것도 수행
32. 내가 갈 데가 있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지
33. 보시공덕 지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
34. 20년동안 우정이 변치 않은 것은
35. 모닝을 타고 다녀도 벤츠가 부럽지 않은 것은
36. 보국(報國)의 삶을 위하여
37.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네
38. 안양중앙시장 서울식당
39. 69만원대 트렌치코트를 16만원대에
40. 백권당은 적막강산
41. 네이버에서 제2의 블로그 인생을
42. 노도강의 큰바위얼굴
43. 빛의 속도로 대처한 품질사고
44. 법(法) 기술자들의 세상에서
45. 동편제 박금재 명창 탄생하려나?
46. 볼 때는 볼 때뿐이고
47. 정년백수를 축하하는 꽃바구니인가?
책만들기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2018년 말에 처음 만든 이래 현재까지 7년동안 156권 만들었다. 작년 것까지 만들었으니 이제 다 따라 잡았다. 책만들기 대장정이 끝나가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쌓이고 쌓인다. 이를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려 놓는다. 이렇게 온라인에 글이 있으면 그 자체로 책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글을 쌓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글을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모아 놓으면 책이 된다. 이렇게 한 권, 두 권 만들다 보니 이제 156권에 이르렀다.
나는 왜 기록을 남기는가? 세상에 남길 것은 기록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은 가도 기록은 남는다. 목숨 걸고 쓰는 이유가 된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누군가 읽어 주기를 바래서 쓴다고 말할 수 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는 누군가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독자를 바라지 않는다면 일기를 쓰면 될 것이다.
글을 쓸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 오전은 글쓰기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이 가장 맑을 때 쓴다. 요즘에는 명상한 다음에 쓴다. 청정한 마음 상태에서 쓰는 것이다.
나에게 글은 생명 같은 것이다. 글에 오전 시간이 다 녹아 있다. 글에 시간이 녹아 있어서 생명 같은 글인 것이다. 이런 글을 누가 읽을까?
작가는 독자를 의식한다. 마치 배우가 관객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 소설가나 시인은 독자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그렇다면 블러거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나는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또한 기사를 쓰는 기자도 아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따라서 독자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읽으면 좋다. 읽지 않아도 그만이다.
어느 작가이든 자신의 글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고 페이스북에 동시에 게재하는 것도 독자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리지 않는 다면 일기 쓰듯이 자신의 컴퓨터에만 저장해 두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글에 공감하면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정성 들여 쓴 글이라 해서 반드시 추천이 많은 것은 아니다. 글이 길면 길수록 공감추천은 적어진다. 이럴 때 “단 한사람의 독자를 위해서 쓴다.”라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글을 쓴다. 그러나 무명이기 때문에 관심을 덜 받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미래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라며 정신승리해 본다. 정약용처럼 미래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가족이 보아도 부끄럼 없는 글을 쓰고자 한다. 자연스럽게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게 된다. 이런 글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하나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책은 오로지 인터넷 블로그에서만 볼 수 있다. 이는 삶에 대한 절망의 기록이다. 절망적 삶의 극복을 위한 어느 한 불교인의 처절한 삶의 기록이다.
2025-07-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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