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권 담마의 거울 2024 II
발바닥 감촉이 좋다. 끈적거리지 않는다. 아마도 시스템에어컨이 가동되기 때문일 것이다. 달콤하다고 해야 할까 감미롭다고 해야 할까? 일시적으로 기쁨이 충만했다.
재가우안거 16일째이다. 오늘 아침에는 행선만 삼십분했다. 좌선은 생략한 것이다. 행선이 너무 잘 되어서 좌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행선 할 때는 눈을 감고 걷는다. 어떻게 눈을 감고 걸을 수 있단 말인가? 오래 하면 그렇게 된다. 마치 생활의 달인이 눈을 감고 던져도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백권당에 행선대와 좌선대를 만들어 놓은 것은 2020년 1월의 일이다. 열 평 되는 사무실 공간을 반으로 갈라서 만든 것이다.
좌선공간은 세 평이 확보되었다. 마하시 방식은 행선도 중요시하므로 행선대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행선대는 걷는 공간이다. 복도라면 훌륭한 공간이 된다. 문에서 벽면을 따라 형성된 복도에 금을 그었다. 검정 테이프를 삼십센티 간격으로 붙인 것이다. 마치 도로의 분리선 같은 것이다.
길이가 4미터 되는 행선대를 만들었다.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행선대로 만든 것이다. 보통 때는 복도가 되지만 행선할 때는 행선대가 된다. 때에 따라 쓰임새를 달리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행선을 잘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발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눈을 감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오래 하면 할 수 있다.
행선대를 만들어 놓은지 5년 되었다. 그 동안 무수히 행선대를 오갔다. 눈을 감아도 걸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마치 생활의 달인처럼 눈 감고 던져도 바구니 속에 척척 들어 가는 것처럼, 눈을 감고 행선을 해도 비틀거리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이다.
행선할 때 눈을 감으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개념화를 방지하는 것일 것이다. 발의 모양을 보지 않는 것이다.
행선 할 때 발의 모양을 보아서는 안된다. 행선할 때는 실재를 보아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대를 보는 것이다. 사대 가운데서도 풍대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는 운동성에 대한 것이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발모양을 보지 않게 된다. 마치 눈을 감고 좌선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보는 것과 같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이때 배의 모양을 떠올려서는 안된다. 단지 부품과 꺼짐이라는 운동성만 보아야 한다. 풍대를 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닿음으로 설명된다. 배가 부풀 때 이는 풍대에 대한 것인데, 이는 물질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부품을 아는 마음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앎’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배가 부풀 때는 부푸는 물질과 이를 아는 앎, 두 가지를 새겨야 한다. 부품이라는 물질과 앎이라는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이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눈을 감고 좌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늘 하던 행선대에서 눈을 감고 발을 옮겼을 때 마치 배가 부풀고 꺼지는 것을 새기는 것과 같다. 단지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을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눈 감고 행선하는 것은 나만 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빤냐와로 스님은 뒤로 행선한다고 한다. 눈을 감고도 행선을 하지만 뒤로 가기 행선도 하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눈을 감는다. 눈을 뜨면 대상이 보여서 실재를 보기 어렵다. 눈을 감고 행선을 하면 오로지 움직임만 관찰하게 된다. 여기에 발을 디딜 때 딱딱한 감촉을 느낀다면 이는 지대에 대한 것이다. 발에 차갑거나 뜨거운 것을 느낀다면 이는 화대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지수화풍 사대를 느끼는 것이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를 보기 위함이다. 이는 개념화를 방지하는 말과 같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새기면 실재를 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발모양이나 배모양이 떠오른다면 이는 개념을 보는 것이 된다.
행선과 좌선을 할 때 눈을 감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념을 보지 않고 실재를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 대부분 개념으로 보기 쉽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는 실재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눈을 감고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재가우안거라 하여 재가자가 우기 안거를 나고 있다. 백권당 사무실에서 행하고 있다. 어제와 그제는 오후 좌선도 했다. 매일 오전에만 삼십분 앉아 있었으나 오후까지 확대된 것이다.
유튜브를 멀리하고 있다. 정치유튜브를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작심삼일인 것 같다. 슬금슬금 보다 보니 어제는 저녁 늦게까지 보게 되었다.
뉴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선정한 것에 끌려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선정한 것을 일방적으로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요즘 공원에 가면 나이 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소리가 크게 나서 들어보면 대부분 정치관련 유튜브이다.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남이 선정해 놓은 뉴스에 마음을 빼앗겨서 될까?
TV나 유튜브 시청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책을 읽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마치 뉴스 기사를 읽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경전은 예외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명상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한국명상원의 묘원 선생은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방식입니다.”라고 말했다. 2008년 12월 논현동에 있던 한국위빠사나선원에서 좌선할 때 듣던 말이다.
글 쓰는 것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단지 책을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소극적이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 자체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긴 하지만 글쓰기에 비해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글쓰기에 앞서 명상을 한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명상을 하고 쓴 글과 명상 없이 쓴 글의 차이는 분명 있다.
오늘 책 하나 서문을 쓰고자 한다. 이렇게 서문을 쓰는 것이다. 명상을 하고 난 다음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책 제목은 ‘158 담마의 거울 2024 II’이다. 158번째 책으로 2024년 3월 29일부터 12월 25일까지 칠개월 동안 쓴 글이다. 2024년 담마(Dhamma)에 대한 두 번째 글모음이기도 하다. 총 22개의 글에 309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는 다음과 같다.
(목차)
1. 여인은 감각적 욕망 그 자체일까?
2.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들
3. 범부는 장애를 가진 것과 같아서
4. 수행자는 한송이 타오르는 불꽃
5. 나는 정말 나일까?
6.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7. 업은 공유될 수 없다
8.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갈까?
9. 출가자가 속퇴하는 다섯 가지 이유
10. 재가의 성자라도 사미에게 합장공경해야 하는 이유
11. 또 하나의 삶의 결실 쌍윳따니까야 완독
12.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윤회를 부정할까?
13. 아무리 찾아봐도 관찰자는 없네
14.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때그때 새기는 삶
15. 아픈 만큼 단단해지고
16. 절망의 강을 건네주는 형성평온의 지혜
17. 마음에 드는 것을 보시하는 자는 마음에 드는 것을 얻는다
18.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길라잡이로 하여
19. 더 이상 울지 않으리, ‘눈물경’(S15.3)을 외우고
20. 나병환자 숩빠붓다 이야기
21. 시간을 벗어난 법(法)
22. 건방진 마음과 빛나는 마음
어떤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특히 글쓰기만큼은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이렇게 본다면 글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분신 같은 글이다. 어쩌면 이것도 집착일지 모른다.
일년전에 쓴 글이다. 명상을 하고 나서 쓴 글이기 때문에 예전 글보다는 글의 품질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청정한 마음에서 쓴 글과 혼탁한 마음에서 쓴 글은 분명 차이가 있다.
편집작업을 하면서 글을 주욱 훝어 보았다. 가장 인상적인 글이 있다. 그것은 목차 4번 ‘수행자는 ‘한송이 타오르는 불꽃’ (2024-04-26)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강아지 탄생을 보고서 느낌을 적은 것이다.
언젠가 본 영화제목이 생각난다. ‘개 같은 인생’이라는 제목을 말한다. 영화는 보지 않았다. 외국 청소년들과 관련된 영화이다. 왜 ‘개 같은 인생’이라는 말에 마음이 꼽혔을까?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은 ‘개’자가 붙은 욕일 것이다. “개자식”이라거나 “개XX”라고 말한다. 이 보다 더 심한 욕이 어디 있을까? 최근에 안 것이다. 개자식은 어떤 자식일까?
개의 새끼는 아버지가 어떤 개인지 모른다. 어느날 암놈과 숫놈이 붙어서 새끼가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 개는 알고 있지만 아버지 개는 알지 못한다. 문제는 근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한마디로 짐승 같은 사람들이다. 왜 그런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 있다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와 양과 닭과 돼지와 개와 승냥이가 뒤섞이는 것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 있다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Iti.36, A2.9)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은 개 같은 사람이다. 이는 경에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 있다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축생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 개의 새끼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경에서처럼 개의 자식은 어머니 개와도 붙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을 욕할 때 “개자식” 또는 “개XX”라고 하는 것은 최대의 수치스러운 욕에 속한다.
세상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개 같은 사람, 축생 같은 사람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 있다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개 같은 인생보다는 바보천치 같은 인생이 더 나을 것 같다. 백치 같은 사람에게는 최소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 있다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스님의 페이스북에서 강아지 태어난 것을 보고서 글을 썼다. 이에 “어쩌다가 개로 태에 들게 되었을까?”라며 탄식하며 글을 썼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나도 언젠가 개의 태에 들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축생이다. 늘 굶주리며 살아야 한다. 언제 잡아 먹힐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 가운데에서도 축생처럼 비참한 존재도 있다는 것이다.
이 공간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다. 이 공간에는 인간만이 살고 있지 않다. 설령 인간만의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축생처럼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다. 무엇보다 부처님 정법을 만나서 다행이다. 내가 만약 정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축생처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삶을 살아 갔을 것이다. 개자식 소리를 들으며 살아 갔을지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행복한 상태일 때 남도 행복하길 바란다. 내가 불행에 처해 있다면 남에 대한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연민의 마음도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행선하면서 최상의 기쁨을 맛보았다. 눈을 감고 행선대를 왕복했을 때 일시적으로 행복한 상태가 되었다. 이럴 때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겸손한 상태가 되었다.
하루 일과 가운데 오전은 가장 청정한 때이다. 매일 오전만 같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재가의 삶을 살다 보니 오후와 저녁은 오염된 삶을 살게 된다. 재가안거 한계로 본다.
재가안거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팔계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팔계는 반드시 스님으로부터 받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팔계는 하루낮하루밤 계에 지나지 않는다.
재가안거하면서 팔계를 지키고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팔계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이는 “높고 큰 침대를 버리고, 높고 큰 침대를 삼가고 낮은 침대나 긴 의자나 깔린 풀섶에 눕는다.”(A8.42)라는 여덟 번째 항목과 관련이 있다.
오전은 가장 청정한 시간이다. 뉴스를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는다. 아침에 먹는 것은 삶은 계란 두 개, 감자와 고구마 찐 것을 먹는다. 절구질한 한 커피를 마시고 나면 행선과 좌선을 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이렇게 오전은 가장 청정한 시간이다.
청정한 시간에는 세상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내가 행복한 만큼 남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도 일어난다. 특히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하까루나(mahākaruṇā), 큰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청정한 시간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오전은 명상과 글을 쓰는 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살고자 한다. 그것은 여덟 가지 포살계를 지키는 것이다. 특히 여덟 번째 높은 침상을 사용하지 않고 바닥에서 자는 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살고자 한다.
2025-07-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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