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종교 경쟁력
작년에
인구조사에서 종교 변화 추이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10년전 통계 자료와 비교 할 때 불교는 정체, 개신교 퇴보, 천주교
급신장 이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 하고 각 종교의 미래에 대한 대책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언젠가 어떤
기독교 신학자의 글에서 미래의 한국 종교의 성장세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는 지속적 감소 그리고 천주교는 지속적 성장을 제기 한
바 있다. 기독교는 이미 교회와 교역자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또한 개교회주의로 인한 난립과 종교의 상품화와 세속화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이미지가
추락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구멍가게 같은 이미지의 교회수를 줄이고 무허가 신학교를 정비해서 교역자의 질을 향상 시키고 또
개교회의 난립을 막기 위해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천주교는 단일교단으로서 전국을 조직적으로 분할 해 철저 하게 교구 위주로 관리하고 있고 또한 엄숙하고 영적인 분위기와
체계적인 신도교육과 관리로 인하여 품위와 격조 있는 이미지를 주어서 지속적으로 성장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해서는 젊은이들이 불교는 낡은
것으로 간주 하고 외면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락 한다는 것이다.
이 신학자의
말대로 인구조사 결과 일부는 맞는 것으로 입증 되었지만 일부는 판단 유보인 것도 있다.
한국에 있어서
미래의 종교의 경쟁력은 무었일까.
교회수가 많고 신도수가 많다고 경쟁력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회적인 영향력이 크다고 해서 경쟁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
종교는
경쟁력은 청정함에서
첫째로 종교의
가장 큰 경쟁력은 청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한다. 청정함은 무소유와 욕망의 버림에서 부터 시작 된다.
성직자가 재산을 소유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유학을 보내고 하다 보면 일반인과 하등에 다를 바 가 없을 것이다. 성직자는 기본적으로 재산을 가지면 안되고 결혼을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결혼하고 애를 가지면 소유에 대한 갈망이 생기기 때문에 진정한 종교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재산을 가진 성직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은 이미 그 종교가 세속화 되었거나 종교가 상품화 되었다는 증거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시스템화에서
둘째로 종교의
경쟁력은 시스템화에 있다. 마치
맥도날드 햄버거가 매뉴얼만 있으면 세계 어디에서든지 동일한 맛을 가진 일률적인 햄버거를 만들어 내는 이치와 똑같다. 기독교는 이단과의 투쟁의 역사에서 지금과 같은 일률적인 체계를 갖춘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시스템대로 적용하면 어느나라 어느 지역 에서 던지 선교가 가능하다. 또 교회와 연계된 유치원을 운영 한다든지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룰 수 있게 함으로써 하나의 수익사업 역할도 하는 마치 잘 포장된 상품처럼 일목 요연한 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누구든지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신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든지 벤처창업 하듯이 교회를 만들어 운영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도시의
야경을 보면 마치 십자가 물결로 넘쳐 나고 있는 것이 그 이유 가 아닐까.
종교의
경쟁력은 신행과 수행의 전통에서
셋째로 종교의
경쟁력은 신행과 수행의 전통에 있다. 신본주의 종교는 모든 것을 신에 의지하고 신의 종으로 살기 때문에 믿음이
최고로 우선시 된다. 다음 글은 박규태 교수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인데 신을 믿는 종교에 대하여 기술한 내용이다. “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신에
대한 복종,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무력감, 피조물로서의 허무의식 등을 종교경험의 핵심으로 지적하곤 합니다. 이 때 신이 완벽해지면 질수록
인간은 상대적으로 더 불완전해지게 마련입니다. 이윽고 신만이 모든 사랑과 지혜와 정의와 힘을 가지게 되며 인간은 그야말로 앙상한 뼈만 남은
공허하고 궁색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처음에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과 무력함을 해소하고자 신을 생각해 냈는데, 이제는 인간이 자기의 모든 힘을
신에게 다 투사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신을
통한 길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신에 대한 투사로 인해 잃어버린 자기자신과의 만남이 오직 신에 대한 숭배와 복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낍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좋고 선하고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모두 신에게 투사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시 그런 것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신을 믿는 종교는
믿음 이외에 개인의 수행 이라는 말이 없다. 따라서 교리가 단순하고 단조로워서 누구나 쉽게 포섭 할 수 있으며 나이어린 초보자나 단순한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접근성이 용이한 장점이 있다. 반면에 인본주의 종교인 불교는 신행과 더불어 수행이 강조 된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는 지혜를
추구하고 많이 알아야 하고 많이 체험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행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타력과 자력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염불이나 절수행등은 타력적인 요소가 강하 참선수행은 자력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자기에 맞는 방법을 선택 해서 수행 하면 되는 것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교리에서
넷째 종교의
경쟁력은 교리에 있다. 신본주의의
종교는 철저하게 이원론으로서 신과의 관계는 주종관계이고 신 앞에서는 항상 죄인이다. 창조주인 신과 같이 되는 것은 피조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매우
불경스런 행위이다. 반면에 인본주의 종교는 성불(成佛)을 목표로
한다. 누구나 다 지혜와 공덕을 쌓으면 궁극적으로 성불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불교인이 성불을 목표로 하지 않는 다면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불교인들은 항상 지혜를 추구 하며 살고 보살행을 하면서 공덕을 쌓아 가며 사는
것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여론형성층에서
다섯째 종교의
경쟁력은 여론형성층에 있다. 즉
오피니언 리더들이 얼마나 많이 포진 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과 언론, 방송, 시민단체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거의 다 기독교 일색이다. 따라서 이들은 알게 모르게 카르텔을 형성하며 우리사회에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의 황우석
사건을 들 수 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100년전에 기독교를 전파한 이래 이제 기독교는 1000만의 신도를 가지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 하였고
그 거대한 세력자체가 종교권력화 되어서 정치, 사회, 문화등 어디든 힘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세력화와 권력화의 증거가 안티기독교운동
이다. 안티운동은 대게 어떤 집단이 주류로서 확고하게 입지를 구축하고 세를 과시 할 때 일어난다. 따라서 미국이 씨앗을 뿌린 기독교는 미국의
든든한 지지자이고 또한 기독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미국이야말로 은혜의 나라 이면서 동시에 듬직한 후원자 인 것이다. 반면에 한국불교는 조선시대 500년간 척불숭유 정책으로 철저하게 탄압
받았고 한말과 일제시대에는 거의 형해화(形骸化)한 상태 이었다. 조선시대가 중국과 군신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의 지배이념인 유교를 기본으로 하고
불교를 배척 하는 정책이었다면 현재는 미국이 과거 중국이 했던 역할을 이어 받아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포교에서
여섯째 종교의
경쟁력은 포교에 있다. 기독교는 매우 공격적인 선교를 한다. 길거리에서 전철 안에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 가고 남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식의
피켓선교 하기도 한다. 이들 피켓선교단이 전철 안이나 길거리에서
스님을 만나면 마치 사탄을 발견한 양 이성을 잃을 정도이다.
또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전 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서 생물학적 전도라는 말도 만들어 냈다. 즉 목사나 교인들이 능력이
되는 한 자녀를 많이 낳아서 기독교인화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출산률 저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가 매우
적극적으로 달려 들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선교에 관한 한 매우 적극적이고 제도화 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에 나와야
만 신자로 인정 되고 교회를 다년야만 교회의 존립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교는 포교에 소극적이다. 대부분의 사람 들이 제발로 스스로
들어 오는 형식인데 기본적으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다는 생각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다원화에서
일곱째 종교의
경쟁력은 종교 다원화에 있다.
천주교는 일찍이 60년대 2차 공의회 때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선언 하였다. 그리고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일에 대하여
참회도 함으로서 천주교의 이미지의 향상과 함께 선교에도 탄력이 붙어서 영성과 품격을 갖춘 이미지로 거듭 나게 된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다원주의를 인정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 교리 상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구원도 하나다라는 입장 때문에 다원주의를 인정 하지 않고 또
다원주의 확산을 두려워 하기도 한다. 만일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인정 하는 순간 기독교의 설 자리가 없어 진다 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도그마를 부정 한다. 진리도 여러 가지 이고 진리에 이르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 한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단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단지
3법인(일체개고,제법무아, 제행무상)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판가름 할 뿐이다. 만일 대한민국에 나만이 진리이고 나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독단적
도그마에 빠진 비슷한 세력을 가진 종교가 하나 더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오래 전에 절단 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불교의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교리에 의하여 그런 충돌은 일어 나고
있지 않은 것 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정보화에서
여덟째 종교의
경쟁력은 정보화에 있다. 구한말에
기독교가 제국주의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후 병원을 만들어 기적의 힘을 보여 주고 학교를 만들어 개화와 선교를 함으로써 문명의 종교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이후 해방후에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타 종교에는 없는 라디오 방송국 2개를 만들어 선교를 독점 하다 시피 하였고 또한 미국의
막대한 인적 물적 지원하에 타 종교와는 게임이 되지 않은 유리한 환경에서 매10년마다 두 배씩 급성장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반면에 1600년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불교는 조선시대와 일제를 거치면서
거의 뼈만 남은 상태에서 자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TV와
라디오 방송국을 갖추고 포교를 시작한지 10년이다. 지금은
정보통신의 발달에 다른 인터넷 시대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과거와 같이 불평등한 조건에서 포교와는 다르다. 누구나 정보에 접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어서 불교로 보았을 때는 인터넷 시대야 말로 공정한 게임을 할 수 있는 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또 현대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되어 있어서
어느 나라든지 국교를 인정 하지 않고 마음대로 포교 할 수 있는 시대 이다. 그래서 미국과 서구에서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고 실제로 교회는
텅텅 비어 가지만 그 빈 자리를 이슬람이나 동양의 종교가 채워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지가 발달되고 정보통신 혁명이 일어 나면 날수록 동양의 종교와
사상이 각광을 받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종교의 경쟁력을 비교해 보았다. 이중 가장 큰 경쟁력은 다른
무엇 보다도
청정함이 아닐까 생각 한다.. 그런 면에 불교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청정한 종교 이다. 그런 청정함은
청정비구와 청정비구니가 있을 때 가능 한 것이다. 매년 하안거와 동안거에 수천명의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정진 해가면서 1600년 전통의
선불교 맥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수행정진 하여서 큰 깨달음과 지혜을 얻은 선지식 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양하기 위하여 신도들은
모여 들 것이며 이들 스님들은 복전(福田)의 역할을 할 것이다.
앞으로 10년 후는 과거 10년 전 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특히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무제한 으로 접하게 되고 판단력도 높아지게 될 것 이다.
프로이트 말에
따르면 “종교란 원래 외부의 자연세계가 내뿜는 온갖 위험에 대처할 수 없었던 원시고대인의 절망감에서 생겨난
것이다. 인간은 자연 앞에 무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원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에 아버지의
성격을 부여하고 자연력을 신으로 형상화 한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원시시대가 아니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서로 공유 되어서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시대이다.
따라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 이면서 동시에 청정함을 갖춘 종교가 21세기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 할 것이다. 과연 10년 후의 종교 지형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진흙속의연꽃(http://blog.daum.net/bolee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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